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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6화 (86/162)

86화

시오라 보네티로 살면서 참 다양한 경험을 한다.

커튼을 묶어 창문 밖으로 내던지자 누군가 천을 잡아당기며 꾸물꾸물 기어올라 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은색 머리통이 삐죽 창 위로 올라왔다.

홍당무처럼 벌게진 얼굴로 청년이 소리쳤다.

“시오라!”

그게 마지막 힘까지 짜낸 결과물이었나 보다.

가보트 보네티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가슴팍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게 금방이라도 그의 폐가 터질 것 같다.

피아니시모는 그 모습을 안타까운 양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어깨 위에서.

“체력 단련 좀 해.”

“시끄, 헉, 헉!”

저런.

금방 죽는대도 이상치 않을 몰골이다.

가보트를 보면, 시오라의 몸에 들어온 게 차라리 다행인 것 같기도.

나는 그에게 물을 건네주며 문 쪽을 흘금 쳐다보았다.

크루엘로가 눈치껏 천천히 와 주면 좋겠는데.

“그런데 왜 몰래 들어온 거야?”

“뭐! 네가 커튼을 묶어서 던져 줬잖아!”

“아니, 그건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랬지.”

실제로도 재밌었다.

애당초 피아니시모가 그렇게 은밀하게 머리를 내민 게 잘못 아닌가?

누가 봐도 잠입하려는 모양새였는데 내 핑계 대기는.

“제대로 들어올 수 있었으면 몰래 들어왔겠냐?”

“크루엘로가 못 들어오게 했어?”

“그래! 오죽하면 내가 피아니시모더러 염탐을 시켰겠어!”

가보트는 씩씩거리며 물컵을 확 기울였다.

그러다 사레들려 요란하게 기침을 쏟아 내는 꼴이, 몰래 들어왔다는 자각은 있는 건가 싶었다.

“흐윽, 흐…….”

“네가 더 환자 같아, 가보트.”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째려본담.

“그래서 너, 몸은 좀 괜찮냐?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긴 하는데.”

“엥, 수명 깎였을걸.”

“뭐! ……얼마쯤?”

“못해도 1년?”

모호한 수치라고 생각했는지, 가보트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시오라 보네티의 수명이 채 3년이 안 되거늘,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나는 쭈그려 앉은 채 쯧쯧, 혀를 찼다.

가보트 바보.

“말로만 가족이라 그러고, 나한테 별로 관심도 없지? 무도회장에도 안 왔더만.”

“어, 어?”

“진짜 최소한 미뉴엣은 왔어야 하는 거 아니야? 황제 탄일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신출내기 백작이 간도 크다.”

당시에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 무도회장에 들어섰을 때, 황제가 오기 전까지 계속 안을 돌아다녔다.

다름 아닌 황제의 생일이니 틀림없이 보네티 남매가 왔을 줄 알았다.

혹시 걱정하고 있다면 괜찮다는 소식 정도는 슬쩍 전해 줘야겠다고 크게 인심을 썼는데, 아무도 없었다.

황제한테 찍히려고!

“그……. 서운했냐?”

가보트의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뭐어? 이건 걱정이라고 해야지! 간이 부은 줄 알았잖아.”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어. 보네티도 감시받고 있었으니까.”

“엥, 감시?”

“네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다음에 말이야, 수사에 협조하라는 공문을 미뉴엣이 갈가리 찢어 버렸거든.”

딸꾹.

“황실에서 사람이 나왔을 때도, 개소리 말고 증거부터 가져오라고 했고.”

“진짜 그렇게 말했어?”

“말이야 곱게 돌려서 했지만, 그걸 누가 못 알아듣냐.”

가보트는 당시를 떠올리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해 보였다.

음, 으음.

“……진짜?”

“그래! 그날, 공작이랑 같이 나타났으면서 그런 건 말 안 해 주디?”

“안 해 줬지.”

미뉴엣이 그렇게까지 해 줬다고?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하지만 가보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음.

휘슬에서의 일이 정말 고마웠나 보다, 아니면 그만큼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거나.

나는 괜히 멋쩍어져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날 일이 해결된 줄 알았는데, 집에는 안 들어오고 난데없이 여기 틀어박혀 있고.”

“음.”

“제대로 얼굴을 보고 얘기하려고 해도 공작은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가보트는 분통이 터진다는 듯 소리쳤지만, 나는 듣지 않고도 크루엘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찾아올 손님이라 봐야, 나쁜 객이 90%일 테니 사전에 차단한 거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적당히 뭉뚱그렸다.

“내가 그날, 그…… 흑마법에 잘못 휘말렸거든? 그래서 좀 오래 잤던 모양이야.”

“오래 잤다니 얼마나. 너, 설마 내내 의식 없었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기겁하며 나를 살폈다.

팔을 잡고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고, 거참 꼼꼼히도 살핀다.

몹시도 정신없었지만, 아주 조금은 감동적이라 가보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침내 그는 내가 멀쩡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는지 나를 놔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시오라, 너 몸에 뭔 이상 있는 거 아니야?”

“엥?”

“아무리 마법에 휘말렸다고 해도 그렇지! 틈만 나면 픽픽 쓰러져 대질 않나, 심지어 너…….”

가보트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미뉴엣한테 들었는데 너 기억 상실이라며.”

“……미뉴엣이 그걸 말해 줬어?”

“젠장, 진짜였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라고 말해 줬어. 그때도 농담인지 긴가민가했는데.”

“어, 아니, 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너는 맨날 말로는 가족이라고 하면서 그런 건 입을 꾹 다물고 있고. 그래, 너도 미뉴엣만 믿음직하다 이거지.”

“……가보트? 설마 울어?”

“나도 내가 못 미더운 거 알거든.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쿨쩍.”

“아, 아니! 나는 그냥 걱정할까 봐!”

우와, 진짜 울어!

내가 기억 상실을 숨긴 게 뭐라고!

피아니시모를 불러냈을 때보다 감정선이 더 이해가 안 된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다가 품을 뒤졌다.

당연하게도 손수건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가보트가 타고 올라온 커튼을 붙들고 그의 얼굴을 빡빡 닦아 줬다.

“아니, 넌 열여덟이나 먹어선 뭐 이런 걸로! 울지 말아 봐, 이러다 크루엘로 온다?”

“내가, 울고, 싶, 어서 우냐? 네가 숨, 기니까…….”

“안 숨겨, 안 숨겨, 앞으로는 아무것도 안 숨길게! 다 말해 줄게, 내가 다!”

“……진짜?”

“진짜!”

그리고 그게 덫이었다는 걸,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덥석, 가보트가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러면 대답해 봐. 너, 진짜 고대 교단의 성직자야?”

그의 초록빛 눈동자는 여전히 물기에 젖어 있었으나 눈빛은 매서웠다.

새삼 그가 미뉴엣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실감 난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이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내가 가보트한테 속았어? 얘한테?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소몬 후작의 사체가 신성력에 절여진 채 발견됐어. 신전은 뒤집어졌지. 막대한 성력이 발견됐는데 범인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 주인을 찾으려고 곳곳에서 조사에 들어갔지만, 마땅한 피의자는 없었어.”

“…….”

“그런데 나는, 그날 무도회장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신경 쓰이더라고.”

나, 크루엘로. 그리고 줄리안과 데이디어.

이름자가 주르륵 떠오른다.

“물론 사람들이 널 의심하는 건 아니야. 공작 쪽은 수상해하긴 해도. 하지만 난…….”

가보트는 숨을 고르듯, 잠깐 말을 끊어 냈다.

그러고는 곧 다시.

“나, 그렇게 눈치 없진 않거든. 너한테 뭐가 있는 것 같다는 건 진작 알았어.”

“그거야…….”

“그러니까 네가 이상한 복장으로 검은 뱀에 들락거리는 걸 들키기 전에도 말이야.”

그 말에, 내가 가보트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레스를 사냥할 무렵에야 몇 가지 털어놓긴 했지만, 그 이전에 가보트에게 눈치챌 거리를 주진 않았으니까.

이상한 일이 있어도 크루엘로 때문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말 안 해 줄 것도 알아. 미뉴엣에게는 말한 정보라도 말이지.”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미뉴엣에게도 거의 아무 말 안 했어.”

위로가 안 됐는지 가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어쨌거나 좀 전에 숨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면 인간적으로 하나는 대답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게 아니라도 말이야.”

“좋아! 그러면 다른 질문 딱 한 가지에는 대답해 줄게.”

“너, 시오라 보네티는 맞냐?”

아, 진짜.

뒤에 더 독한 걸 들고 있는 건 반칙 아니야?

나는 부루퉁한 눈으로 가보트를 노려보면서도 반사적으로 미뉴엣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너, 시오라 보네티는 맞지?”

남매 맞네, 남매 맞아.

에휴.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툭 내뱉었다.

“맞아.”

“아 씨, 다른 거 물어볼─.”

“고대 교단의 성직자라는 거.”

가보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 하나만 대답해 주면 된다 했으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어쩌면 두 개의 대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어쨌거나 답해 줬으니 이제는 내가 물어볼 차례다.

“정확히 바깥이 어떻다는 거야? 크루엘로를 의심하고 있다고? 그런 것치곤 밖이 조용한데.”

“신전에서도 계속 찾아오고 있어요. 협조해 준답시고 한 사람씩 데려와 달링의 상태를 점검하게 한 거고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미 열린 문에 기댄 사내가 보였다.

트레이에 수프를 들고 선, 크루엘로였다.

“감동적인 재회가 끝나길 얌전히 기다렸는데 끼어든 타이밍이 너무 일렀나요?”

가보트는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그를 경계했고, 나는 조금 전의 대화를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기억 상실 이야기, 들었을까?

조마조마한 한편으로, 대놓고 문을 열었는데도 기척을 못 알아차렸다는 게 놀라웠다.

반성하자, 반성.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는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 두었다.

그러고는 내가 앉을 의자를 빼는 모습이 몹시도 태연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으, 브로콜리 냄새.”

“한동안 아무것도 못 넣은 위에 대뜸 고기를 집어넣을 생각은 아니었겠죠?”

“누가 안 먹는대요. 안 그래도 저번에 용기 내서 스테이크 먹었다가 얼마나 체했는데.”

“달링이 반성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이라 기쁘네요.”

“애 취급이야.”

나는 투덜거리면서 스푼을 쥐었다.

“자긴 편하게 먹어요. 내 말동무는 이 친구가 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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