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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5화 (85/162)

85화

둥글게 퍼진 광휘가 크루엘로의 몸을 감싸더니 곧 그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음, 일단은 만족.

“달링은 원래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그런 말 하고 싶으면 내 상급자가 되고 나서나 해요. 아,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난 엄마 아빠 말도 안 들었어요.”

“허.”

“당신들께서 그랬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의심하지 말라고. 그런데.”

나는 힘없이 웃었다.

“의심하게 만드는 게 나쁜 거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않으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세뇌당한 거다.

엘린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더라도 맹목적인 신앙이 독임은 명백했다.

크루엘로의 상처를 지우고, 나는 잠깐 주위를 살폈다.

몰려오던 황실 기사들은 이제는 예배당의 바깥쪽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엘린은 완전히 죽어 생기를 잃었으며 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망가졌다.

이걸 다 수습하려면 음.

“아, 다 귀찮아. 진짜.”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안 해, 못 해!

치솟은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나는 다 털어 냈다.

“졸려요. 잘래요. 뒷수습은 알아서 해요.”

“달링?”

“쉬고 싶었어요. 며칠 전부터 계속, 계속.”

더는 버틸 생각도 않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일이 끝났다.

머릿속에 거대한 매듭을 남기긴 했지만, 어떻게든 쉬어도 될 시간이었다.

그래도 뒤를 맡길 사람이 있었으니까.

이제 남은 열쇠는…….

***

“부고입니다, 대원로님.”

보고를 듣고도 대원로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 놓인 체스판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더 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야 고개를 들었다.

“누구의.”

“2원로님입니다. 궁정 무도회에서 귀족들을 습격했다가 예배당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엘린 럴러바이가 아니라?”

“동일인임이 밝혀졌습니다.”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숨을 골랐다.

“사인은 무어라 하더냐.”

“자세한 상황을 아는 이는 없으나 현장에 냉기 계열의 마나와 성력이 짙게 남아 있었습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는.”

“무도회에서 일이 털어질 때, 2원로님께서 대적하시던 상대가 함께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와─.”

“시오라 보네티?”

“예.”

그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그 상황에 성력을 썼을 법한 이가 누군지는 천치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황당함과 패배감이 노인의 가슴을 적셨다.

대원로는 침음을 삼켰다.

“알겠다, 나가 보거라.”

“저……. 황궁에서 입궁하시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허허, 나더러 2원로의 일을 해명이라도 해 달라는 겐가.”

“그런 듯합니다.”

“되었다. 2원로가 저지른 짓거리의 증거나 내어 주고 쫓아내거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원로님.”

교단이 폐허가 되었다고 찔러 보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제 원로회는 굳건했고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일에 끌려다닐 여유는 없었다.

‘이번이 아니라도 한번 단속하러 가야겠군.’

수하가 대원로의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노인은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괘씸한 황궁 놈들의 작태에 분노하면서도 내심 씁쓸하기는 했다.

페허……. 제가 떠올린 그 말대로였다.

헤오림의 선조들이 오래도록 가꾸고 지켜 온 터는 엉망진창이 되어,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할 가능성조차 남지 않았다.

연결되어 있는 대원로의 저택 또한 일부가 그대로 무너져 내려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지금 그가 거처하는 곳은 수도에 있는 다른 저택이었다.

그 참담한 일의 원흉이 보잘것없는 여자아이란 사실이 놀라웠으나, 그녀를 끌어들인 건 나이젤리아였다.

“진작에 죽었어야 했거늘, 노괴물이 오래도 살아남았지.”

아랫것들의 믿음이야 어찌 됐든, 신앙은 윗사람의 몫인데 왜 굳이 교단을 청소하겠다고 설쳐 댄 건지.

대원로는 노여움을 참을 수 없었으나, 그녀의 죽음만은 기꺼웠다.

그녀를 죽인 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시오라 보네티.’

그 이름자를 떠올리면 조금 전만큼이나 속이 쓰렸다.

그 어린 여자아이를 아무리 조사해도 나오는 게 없어, 대원로는 보이는 그대로 믿었다.

신전이 검은 뱀의 확고한 적이란 걸 알면서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박적으로 정의로운 방식을 고수했고, 그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흔적을 남겼으니까.

그 풋내기들이 이토록 완벽하게 제 눈을 가리고 세작을 넣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번엔 자신이 틀렸나 보다.

신관이 그리 교활하게 굴 리 없다는 것도.

시오라 보네티가 별 볼 일 없는 천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크루엘로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나면, 후처리는 어렵지 않은 법이지.”

꼬인 매듭이 있다면 잘라 버리면 될 일이다.

그전에 벌여 놓은 일부터 정리해야겠지만.

대원로는 느리게 일어나 제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안에 든 건 수많은 서류, 그러나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그 내용물이 모두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류에서는 나이젤리아의 실체를 고백하고 있었다.

그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가 이런 증거를 남긴다는 건 말도 안 됐지만, 세상에 만들어 내지 못할 증거가 뭐가 있으랴.

대원로는 케인으로 그 서류 더미를 두드렸다.

화르륵, 청람색 불길이 기록물을 집어삼켰다.

돌아서는 노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다.

***

악몽이다.

꿈을 꾼 순간부터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거대한 숲에 있었고 바로 맞은편에는 빛으로 된 곰이 있었다.

그 곰은, 내가 먹은 베아티투도였다.

‘왜 나를 먹었어.’

분노를 토해 내듯 곰이 울부짖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누가 지우개로 지워 낸 것처럼 내 몸이 한 움큼씩 사라진다.

팔이, 다리가, 몸통이, 머리가.

그러고서야 눈이 떠졌다.

“아.”

내게는 익숙하고, 시오라의 눈으로는 생소한 천장이 나를 맞았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저?

내가 왜 여기 있는지는 의문도 들지 않았다.

마지막에 크루엘로 앞에서 쓰러졌던 게 생생했으니까.

“으.”

얼마나 잔 건지, 몸이 말도 안 되게 무겁고 시야가 부옇다.

나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다가 옆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말을 걸었다.

“크루엘로.”

“네.”

“쪄 죽을 것 같으니 벽난로 꺼요.”

곧, 타닥거리는 소리가 사그라졌다.

후덥지근한 공기는 그대로였지만.

아니, 그건 이불 때문인가.

나는 고개를 내렸다가 내 위에 쌓인 이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몇 겹이야.

조금만 더 올렸으면 이번 사인은 압사였다.

끙끙거리며 이불을 치워 내고 있으니, 크루엘로가 다가와 제가 벌인 일을 해결했다.

이제야 살겠네.

“나, 얼마나 잤어요.”

“3주요.”

“미쳤네, 미쳤어. 뭔 비련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황당해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의아해졌다.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그런 것치곤 목도 괜찮고 몸에 힘도…….”

추궁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말끝을 흐렸다.

크루엘로.

내 입장에서는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도 그 얼굴에서 시간의 차이가 확 느껴졌다.

한동안 잘 먹지 못했는지 턱이며 얼굴선이 전보다 날카롭고 눈 밑의 그늘이 짙었다.

혹시 걱정해 준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내뱉던 말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정정했다.

“잘 들어가는 걸 보면 크루엘로가 그만큼 성의껏…… 돌봐 줬나 보네요. 그러니까 거짓말 같을 정도로요.”

“신관만 매일 만나도 몸 상태가 최악이 되진 않아요.”

“신관을 매일 데려왔어요? 이야. 그렇게 내가 걱정됐어요? 어쩐지 눈을 떴을 뿐인데 바로 옆에 있더라.”

“…….”

“……농담이잖아요. 좀 받아 줘요, 아까부터 되게 무섭게 하네. 큼.”

멋쩍어 헛기침하자 그가 내게 물컵을 내밀었다.

몸 상태가 비교적 좋다뿐이지 목이 마르지 않은 건 아니라서, 나는 사양 않고 컵을 받았다.

안에 든 물을 다 삼키자 그가 빈 컵을 도로 채워 주었다.

그러길 세 번쯤 반복하고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음.”

저쯤 심각한 걸 보면 날 걱정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고.

내 의식이 없는 새 다른 일이 터진 건지, 아니면…….

나는 물에 비친 시오라 보네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쪽도 꽤 야위어 있긴 했으나 원래도 워낙 마른 탓에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나는 내 것이 아닌데도 제법 익숙해진 얼굴을 빤히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나 안 믿죠.”

당연한 일이었다.

하필이면 내 신과 교단에서 믿는 그 존재가 같을 줄이야.

나라도 상대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크루엘로는.

“믿어요.”

“거짓말 안 해도 돼요. 어차피─.”

“진짜로요.”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자르고는, 손에 쥔 물컵을 가져가 옆에 두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마 쪽에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튀어 올랐다.

“방…… 금!”

“걱정했어요, 많이.”

그는 나를 끌어안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대로 굳은 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니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아.”

“눈을 뜰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마음이 뜻대로 되지가 않네.”

“음, 고마…… 워요?”

말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다.

크루엘로가 나를 놓아주며 픽 웃었다.

“기다려요, 먹을 걸 가져올게요.”

뒤돌아 나가는 이의 뒷모습, 그리고 문이 닫히는 모양새.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깜짝이야.”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런담.

나는 가슴께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심장도 평소답지 않은 크루엘로의 행태에 놀랐는지 격하게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에잇! 생각하지 마!”

나는 내 양 뺨을 거세게 내려쳤다.

몹시도 얼얼했지만, 정신은 바짝 들었다.

아무튼 여전히 믿는다니 내게 나쁜 일은 아니다.

음, 아직 열쇠가 두 개나 남았으니까 사이좋게 지내야지.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똑똑, 어딘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노크는 무슨. 그냥 들어와요.”

무심코 대답했다가 그 소리가 문이 아니라 창가 쪽에서 난다는 걸 알았다.

창에서 노크? 누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뺙!

나는 위풍당당하게 가슴 털을 부풀린 뱁새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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