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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4화 (84/162)

84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기야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겠는가.

이 자리에서 그가 죽으면 나 또한 살아 나갈 수 없는 건 그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일 텐데.

하나 내게는 퍽 대단한 선언이었다.

페불라의 마지막 신도로서의 사명을 기꺼이 저버리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어떤 의미로, 그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모셔 온 신을 죽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냥 그렇다고.”

그 말들을 다 할 시간이 안 되어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리고 첫 번째 나비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느껴졌다.

일이 풀리리란 기대감은 희미했다.

내 마음은 어쩌면 죽음을 각오한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어.”

단 한 마리의 나비.

아무것도 해칠 수 없고 다만 소리를 전할 뿐인 소소한 주문이었을 뿐인데도.

“어, 떻게…….”

나비가 도착한 그 순간, 엘린의 마나가 단번에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어둠의 기둥이 한순간에 와해되고, 적이 약해진 틈을 타 낙원이 길게 포효했다.

콰아아앙, 새하얀 빛은 여태 막혀 있던 것이 거짓이라 말하듯이 눈앞에 큰 길을 뚫어 버렸다.

시원하리만치 시야가 깨끗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눈을 깜박였다.

말이 되나? 저 나비가 뭘 했다고?

크루엘로가 조용히 물어 왔다.

“저거 전음 주문이었죠. 무슨 메시지를 실었어요?”

“……그냥요. 죽으라고.”

달리 무슨 말이 있겠는가.

[죽어!]

악질 스토커가 보낼 법한 쪽지를 잔뜩 보냈지.

애당초 창의력을 발휘할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기우뚱 기울였던 고개를 문득 들었다.

“아. 건물 뚜껑 날아갔다.”

어쩐지 시원하더라.

소란을 듣고 몰려왔는지, 바깥에 황실 기사들의 기운이 바글바글했다.

더 시간을 끌면 쳐들어오겠는데.

나는 크루엘로와 눈짓하고 뚫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 끝에는 엘린이 있었다.

넝마가 된 꼴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주변에는 아직 메시지를 전하지 못한 나비들이 몇 마리 남아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이마로 스며들 때마다 엘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진짜로 나비 때문에 물리친 건가? 뭐지?

“……집중할 때 엄청 예민한 타입?”

아니면.

“나비 알레르기?”

“뭐, 야. 이 나비들은.”

마침내 마지막 나비마저 사명을 다하고 사라졌을 때, 엘린이 고개를 쳐들었다.

실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이 소름 끼칠 만큼이나 기괴했다.

조금 전까지 내비치고 있던 여유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육체적인 충격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을 더 크게 입은 사람처럼.

진짜 알레르기인가?

“신이 보낸 전령……? 그런 건가?”

“뭐?”

무슨 헛소릴 하는 거람.

횡설수설하는 엘린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위 주문 하나가 뭐 대수라고 이렇게 요란을 떠는 건지, 캐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크루엘로가 나를 툭 건드렸다.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레스.’

그 말에 나는 지나간 일을 떠올렸다.

10원로, 아레스.

조그만 소리에도 털을 곤두세우던 그 남자를 어떻게 꼬여 내고 붙들었는지.

가짜 계시가 그를 얼마나 맹목적으로 만들었는지.

딜런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계시가 바로 들리는데, 이쪽 기도실에는 마나의 흐름도 둔화하여서 텔레파시 마법 같은 섬세한 건 못 쓴단 말입니다!”

“그럴…… 리가? 성력을 제일 먼저 막았다고 들었는데요. 거짓말이었나? 그분께서 악마가 아니라 신이셨나? 악신, 악, 또 왜 때립니까!”

숨겨진 기도실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던 건 페불라의 힘뿐.

그렇다면 설마.

“혹시, 그쪽이 계시를 받을 때 이런 나비가 날아왔어?”

애당초 딜런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 바로 떠올린 추측이었다.

신도 아닌 악마가 계시를 내릴 리 없다.

그러니 나이젤리아가 거짓말을 하는 거든, 혹은 그녀 또한 속고 있는 거라고.

엘린의 장황한 궤변에 넘어가 흔들렸으나 아무래도 당시의 내 추측은 진짜인 듯했다.

“닥쳐!”

아아악, 엘린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며 그녀의 그림자가 용암처럼 끓어올랐으나, 낙원에 제대로 얻어맞은 통에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다만 두 눈에 진득하게 어린 살기만큼은 좀 전보다도 몇 배는 짙었다.

“닥쳐, 닥쳐, 닥쳐! 그건 그분의 계시였다. 더없이 드높은 당신의 뜻이셨어, 네까짓 게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나비가 날아왔다는 거네.”

“네깟 게, 한낱 인간 따위가 계시를 내릴 수 있을 리 없다!”

쇳소리가 섞인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다가 돌연, 엘린이 기세를 바꾸었다.

죽일 듯 노려보던 얼굴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지, 아니야.

“네가 그분께서 보내신 사자였구나.”

“허?”

“응? 아이야. 그분께서 보내신 거였어. 그래서 그 나비를 다룰 수 있는 거야. 그렇지?”

“음…….”

“아니다, 아니야! 그렇다면 그분께서 내게 죽으란 말을 전하실 리가 없지. 전부 환각이고 환청이었던 거야! 맞지, 그렇지?”

우호적인 듯 친근하게 굴다가, 귀신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리를 쏟아 내거나.

한순간에 휙휙 바뀌는 태도는 연극을 보는 듯했으나 어느 쪽이든 절박한 기세가 묻어났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답을 구하고 있었다.

그 말에 답하는 대신 나는 다시 나비를 불러냈다.

─3주문, 전음signal.

엘린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비는 우아하게 날아 그녀의 살갗에 스며들었다.

[내가 섬겨 온 건 악마가 아니야.]

“아.”

[네가 섬긴 건 현실에 나타날 수 없는 허상이고.]

“아아, 아!”

[너는 일평생 속아 왔을 뿐이야.]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뱃속에서부터 쥐어짜 낸 비명에 근방의 그림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나 뱀이 튀어나오는 대신, 모든 그림자에선 검고 질척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그리고 엘린의 두 눈에서도 검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머리칼이 뜯겨 나갈 만큼 제 두피를 거세게 움켜쥐고 절규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 내가 격이 떨어져서 시련을 받는구나. 하하, 속을까 보냐. 내가, 이 내가 겨우 이 정도 시련을 못 이길 것 같아!”

엘린이 돌연 제 품을 뒤져 무언가를 쏟아 냈다.

봉투에 밀봉되어 있는 것은 베아티투도.

만류할 새도 없이 그녀는 봉투를 뜯어내고 그 내용물을 우악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 잠깐 손을 뻗었다가 곧 거두었다.

자멸하는 악을 구해 줄 만한 자비심은 없었으니까.

그러며 나는 나이젤리아가 어떻게 엘린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윽, 큭!”

엘린의 몸이 마구잡이로 변했다.

젊은 여자는 노인이 되었다가 아이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성별이 바뀌기도 했다.

기적이란 이름의 에너지원은 인간의 육신을 멋대로 주물러 대며, 마나를 담아 두는 기관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베아티투도는 그 안에 정착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기관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엘린의 마나가 줄줄 흘러나왔다.

인위적으로 담아 둔 생명력이 덩달아 빠져나오며, 그녀의 머리칼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이제는 앉아 있을 기력조차 잃은 노인은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그녀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 악마가 아니면, 그러면, 난 그동안, 뭘 믿어 왔단 말이야. 난 뭘, 믿으며, 아등바등…….”

“…….”

“아……. 루에리가 날 기다릴 텐데. 그 애, 불쌍한 내…….”

엘린은 몸을 일으키려는 듯 손을 들어 바닥을 짚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툭, 힘없는 소리가 악인의 죽음을 알렸다.

일생의 믿음을 부정당한 얼굴은 여태 본 중 가장 처참했다.

“끝났네요.”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최근 며칠간을 생각하면 속이 시원해야 정상인데도, 머릿속은 오히려 복잡하기만 했다.

차라리 엘린이 코웃음 치며,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다 믿었냐고 비꼬았으면 속은 시원했을 텐데.

크게 한숨을 내쉬자 겨우 버티던 몸에서도 쭉 긴장이 풀렸다.

나는 마음대로 크루엘로를 지팡이 삼아 붙들었다.

“빌릴게요.”

그 또한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나만 하겠어.

나는 지금, 네 번째 몸뚱이를 판다고 하면 전 재산의 반까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괜찮아요?”

“죽진 않았으니까 괜찮은 거겠죠.”

성의 없이 대강 답하다가 문득 크루엘로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림자 뱀에게 꿰뚫렸던 곳이다.

괜찮은 듯 굴었으니 별일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봤지만.

“뭐야.”

아까보다 붉은 영역이 크고 넓었으며 피부색에서 핏기가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주문을 외우는 사이 그 많은 뱀을 거의 감당한 건 크루엘로였다.

내가 모르는 곳도 다쳤을지 모른다.

그가 다친 걸 처음 보기 때문일까, 불쑥 고개를 든 불안감이 생소했다.

“어깨 좀 봐 봐요.”

“달링이 남 걱정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됐으니까 일단─.”

“그냥 좀!”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입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 감정 통제가 안 돼.

크루엘로 또한 놀랐는지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나는 눈을 피했다.

“소리친 건 미안해요, 그냥 여유가 없어서.”

“그쪽이 본모습이에요?”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요. 비꼬긴.”

“아니요, 평소에는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굴잖아요. 사람한테 관심 없는 듯 굴고 거리를 벌리고.”

“……아니거든요.”

“아니라면 됐어요.”

크루엘로는 습관적으로 어깨를 으쓱이려다가 통증이 왔는지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이 우스워,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달링은 내 고통이 즐거운가요?’ 따위의 헛소리를 하면서 셔츠를 벗었다.

음.

“자신하던 대로 몸 좋은데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으나, 표정이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안다는 듯이 크루엘로의 눈빛이 묘했다.

아, 오늘 진짜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나는 하는 수 없이 본심을 드러냈다.

“귀찮아서 새끼 뱀이 무는 건 다 맞고 다녔어요?”

“피한다고 했는데 이 모양이네요.”

“하여튼. 나더러 운동 신경 없다고 뭐라고 할 자격도 없어.”

나는 상처 위에 손을 올렸다가 잠깐 주춤했다.

혹시나 이 상황에서 성력이 나오지 않으면 곤란했으니까.

그러나 다행이라고 할지, 흰 빛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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