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왠지 모를 찜찜함.
그리고 스스로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에 그 수를 택하지는 않았으나, 진짜로 궁금하기도 했다.
고대 교단별로 지향하는 가치관이 다르다 한들, 성력과 검은 마나가 상극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엘린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보편적인 생각이 그랬다.
내가 그 자리에서 성력을 드러냈다면, 단번에 내 혐의는 사라졌을 것이다.
설사 신전에서 종교 재판이 열렸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왜 탈출구가 있는 계책을 택했을까.
질문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엘린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실은 네가 페불라의 신도라는 걸 스스로 드러내 주기를 바랐단다.”
“뭐?”
“왜냐하면 그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거든.”
그녀는 한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나를 불어넣었는지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닙니다, 페불라는 세상을 다 잡아먹을 악신입니다. 신이 아니라 악마의 이름입니다! 저건 성력이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엘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모양새였다.
화이트데저트에 마가 꼈나.
“그러며 개판을 벌여 놓으면 사람들은 모두 페불라가 악마라고 믿을 테니까.”
그러다가 돌연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중요한 건 믿음이란다. 달리는 인식이라고도 말하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인식하면 페불라는 악마가 되는 거야.”
“그러면 모리온은 뭐야.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
“신이든 악마든 상위 차원의 존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니 직접 현신할 수도 없어. 그러나 인간을 뛰어넘는 위대한 이를 만들면 그 안에 깃들 수는 있다.”
“단순히 막대한 힘을 쌓아 삼킨다고, 입맛대로 악마가 만들어진다고?”
“존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건 믿음이란다. 그리고 모리온에는 그 힘을 모아 온 교인들의 믿음이 깃들어 함께 쌓여 왔지.”
“왜 하필 페불라인 건데.”
“운명의 힘을 신이 아닌 악마의 것으로 만들어 인간의 삶을 정복하는 것이 우리의 교리. 죽음을 정복해 불사에 이르는 방법이란다.”
이해하지 못하려나, 엘린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란다. 어차피 교인의 대부분이 우리의 뿌리가 페불라라는 걸 잊었으니까.”
“허.”
“어리석은 자는 이해할 수 없기에 나는 이것을 진리라 부른다.”
“결국 증거는 없네. 믿고 싶은 대로 움직이며 떼를 쓸 뿐이야.”
“내가 처음으로 베아티투도를 먹은 날, 나는 그분께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확신했지.
“믿음과 힘의 결합이 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걸.”
그 말과 동시에 내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엘린의 곁에 있던 커다란 뱀이었다.
크루엘로가 상대하고 있지 않았던가?
당황하며 뒤를 돈 순간, 두 개의 독니가 달린 커다란 입이 덮쳐들었다.
아직 주문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하나 이대로 죽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미완성된 주문이라도 쏟아 내 뱀을 찢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
콰득!
그 거대한 독니가 틀어박힌 건 다른 이의 몸이었다.
새하얀 셔츠의 어깨 부분이 삽시간에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코끝을 폭력적으로 헤집고 들어온 비릿한 냄새가 뇌까지 물들였다.
앞을 가로막은 건, 이번에도.
“크…… 루엘로.”
한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희게 물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최악의 사태가 닥친 것은 아니었다.
“괜찮으니 준비나 해요.”
조금 피로감이 묻어날 뿐,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덧붙여 크루엘로가 말을 내뱉은 즉시, 새하얀 서리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독니가 꽂힌 그의 어깨에서 시작하여 뱀의 거대한 몸체가 모조리 한기에 잡아먹힌다.
조각상처럼 얼어붙은 뱀을 뒤로한 채, 그가 고드름이 된 독니를 어깨에서 빼냈다.
그러나 뱀은 여전히도 살아 있었다.
쯧, 크루엘로가 혀를 찬 순간 쩌저정, 그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엘린이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애쓰지 말거라. 어차피 생명체가 아니라 죽지도 않을 테니.”
“하지만 당신은 죽겠지.”
뱀이 부활하기 전 결판을 내려는지, 크루엘로가 마나를 양껏 끌어 올렸다.
허공에 피어난 눈 결정체는 단단하게 얼고 서로를 얽어매며 크고 길쭉한 창을 만들어 냈다.
족히 5m는 될 법한 창이 압축된 냉기를 머금고 곧장 엘린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손쉽게 그 창을 삼켜 냈고, 크루엘로는 역류한 마나로 인해 피를 토했다.
그래, 수백 년을 살아왔으니 처먹은 베아티투도도 적은 양은 아니었겠지.
나는 이를 악물고 성력을 더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바라는 게 뭐야?”
“뭐?”
“영생? 불사? 안 죽고 끝까지 살아서 대체 뭘 하고 싶은데?”
엘린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또 신이 나서 설명을 줄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다소 머뭇거리는 투로 말을 끌었다.
“아니, 처음에 목표했던 바는 부활이었단다. 이제는 중요치 않게 됐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살리고 싶은 아이가 있었단다.”
“누구?”
“내 자식이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그게 딸이었는지 아들이었는지도.”
엘린이 고민하듯 눈가를 좁혔다.
그녀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소리가 점점 더 늘어졌다.
“몇 살이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이상하게…….”
그리고 그 순간, 지긋지긋하게 시간을 끌어온 주문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러면 보러 가.”
지옥에서라면 반겨 줄지도 모르지.
나는 크루엘로의 팔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여파에 휘말릴 일 없이 그를 단단히 끌어안고는 그의 어깨 너머로 끌어모은 성력을 쏟아 냈다.
─8주문. 낙원heaven.
교단의 잔당을 모두 정리할 때 퍼부었던 주문이었으나 많은 게 달랐다.
이번에는 베아티투도를 쓰지 않았기에 순전히 내 성력으로 감당해야 했고, 그러며 퍼부은 성력도 적정량의 세 배를 웃돌았다.
엉망진창이 된 머리로 다음 주문을 외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한 번에 모든 걸 쏟았다.
새하얀 빛기둥이 폭발적으로 나아간다.
그 여파만으로 거대한 바람이 일고,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모조리 깨져 나갔다.
얼음에 뒤덮인 가죽을 막 탈피하고 움직이려던 뱀은 그대로 녹아들었으며, 그림자에 숨어 있던 새끼 뱀들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모든 것을 희게 물들이며 나아간 주문은 기어이 엘린의 코앞에 다다랐다.
그 지긋지긋한 얼굴을 집어삼키기 직전.
“위대하고 아름다운 힘이구나. 이렇게 하는 거니?”
주위의 그림자가 그녀의 그림자로 몰려들었다.
세상의 빛을 다 집어삼킬 정도로 검어진 어둠이 칠흑의 기둥을 세우며, 낙원과 맞섰다.
빛과 어둠의 싸움이라면 능히 빛이 이겨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밀리는 건 내 쪽이었다.
“미친.”
나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다급히 성력을 끌어다 보충했다.
나약한 육신이 안쪽에서부터 비명을 내지른다.
시오라 보네티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여기서 지면, 그 시간은 단번에 0이 되고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울컥울컥 차오른 핏물이 턱밑으로 흘러내렸다.
하나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어둠에 잡아먹히는 속도가 조금 줄어든 정도였다.
“시오라! 젠장.”
삼시 세끼 베아티투도만 처먹고 살아왔나.
출력면에서 상대가 안 된다.
본체로 오지 않는 한, 양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질로 승부해야 한다, 더 고위 주문이 필요했다.
이미 몸이 한계에 달했다고 하더라도 진짜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다급히 주문을 외웠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페불라시여, 그대의 종이 감히 바랍니다. 종말에 새로운 구원을 가져오소서. 결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소서. 어둠에 잠긴 이들, 이들에게…….”
갈수록 혀가 굳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말끝을 흐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실상,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까 낙원의 주문을 외울 때도 나는 끝도 없이 머뭇거렸다.
조금 전 들었던 엘린의 말, 그리고 내가 봐 온 기록들.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믿음이, 근원이, 내 영혼이 통틀어 흔들린다.
신전에서 연습한답시고 수도 없이 외워 온 주문인데도 그 한 자 한 자가 낯설어 도무지 진심을 담을 수가 없었다.
구원이라고, 가능성이라고.
“그게 뭔데.”
나는 점점 가깝게 밀어닥치는 새까만 기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며 중얼거렸다.
“저기요, 보고 있죠. 내가 죽으면 다 끝인데, 진짜로 할 말 없어요? 하나도?”
신은 인간보다 상위 차원의 존재.
인간이 개미와 말을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냥 단절된 관계였다면 성력을 나누어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계시가 있다.
비록 해석하기가 어려워, 신은 짧은 말 몇 마디만을 내리고 인간은 신어 사전을 만들어 힘겹게 그 뜻을 짐작할 뿐이지만, 분명히 있었다.
크루엘로 앞에서 침묵하라 말하던, 신수들을 구원하라 말하던 페불라의 목소리.
그러니 하려거든 가능하지 않은가.
‘믿어라’라든가, ‘해치워라’라든가 뭐가 됐든, 내 흔들림을 잡아 줄 한마디가 어렵지는 않을 텐데, 당신은 왜 여전히 침묵하는가.
마치 내가 보고 들은 그 모든 것들이 진실이라 인정하듯이.
나뿐만 아니라 눈앞의 저 악인 또한 당신의 아이라 말하는 듯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심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
나는 깔끔하게 고위 주문을 포기했다.
그러나 목숨을 포기하기엔 이르다.
─3주문, 전음signal.
수백 마리의 나비가 날개를 펄럭였다.
“마법이든 주문이든 어차피 집중력 싸움이야.”
도무지 저 마법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을 괴롭혀 준다면 잠깐의 틈이라도 나올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그것뿐이었다.
하나 기껏 날려 보낸 나비는 막대한 에너지가 치고받는 길을 넘지 못했다.
이것도 안 되는 건가, 마음이 꺾이려던 때.
“그 나비를 보내면 돼요?”
“크루엘로?”
“하게 해 줘요. 무력감에 돌아 버릴 것 같은 건 지금이 처음이니까.”
“……나비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크루엘로는 곧장 나비의 위에 마나를 내둘렀다.
빛으로 된 얇은 날개 위에 두터운 얼음장식이 쌓인다.
갑옷처럼 얼음을 내두른 수백 마리의 나비가 길을 만들며 날아간다.
모두가 다 주문이 치고받는 길을 통과하진 못했다.
그러나 개중 일부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의 나비는 분명히 그 장벽을 넘었다.
나는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이런 상황에서 떠올릴 감상은 아닌데도, 내 눈엔 그게 퍽 아름다워 보였다.
우습지, 헛웃음이 나왔다.
“크루엘로.”
“중요한 말 아니면 나중에 할래요?”
“만약 여기서 죽으면요.”
만약 여기서 크루엘로가, 시오라의 몸이 죽으면 그건 부정할 여지 없이 페불라의 책임.
그러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혼자 죽게 하진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