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82화 (82/162)
  • 82화

    일단 열쇠는 잘 챙겨 두었다, 크루엘로가.

    엘린은 그걸 한담의 소재로 삼았다.

    “아레스가 죽을 때, 열쇠를 꺼낸 게 너였지?”

    “알아서 뭐 하게.”

    “그 자리에 페불라의 성력이 남아 있었단다. 페불라의 성물이 내게 있어서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지.”

    그걸로 알아본 거였군.

    맥이 풀리는 사정이다.

    성물은 뭐…… 해당 신도가 아니면 제대로 쓰지도 못할 테니, 가지시든가.

    “네가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너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봤단다. 그전엔, 솔직히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만.”

    “황송해해야 해?”

    “페불라에 관해 이런저런 조사를 하고 다닌다며. 네 신인데도 잘 몰랐던 모양이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아무래도 페불라 악신설을 또 들으려나 보다.

    진작 결론 내서 잘 정리한 걸 왜 이리 물고 늘어지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 내가 대답해 주마. 페불라는 정말 악신이란다.”

    헛소리란 걸 알면서도 크루엘로 쪽을 흘금 쳐다보자, 그는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시의 성자가 인간 제물을 받았지. 강제는 아니었다. 자원한 이들 중에서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 제물을 선별했지.”

    “몰랐네, 제물도 면접을 보는구나.”

    “선별된 제물은 신에게 있는 수십 가지 이름 중 하나를 부여받아 그 이름으로 제물이 되었어. 그건 신이 쓸 화신체의 몸이었다. 그러니 참 영광스러운 자리였어.”

    “크루엘로, 이 소리 언제까지 들어야 해요?”

    “글쎄, 시간을 끌려는 건 아닐까 싶네요. 알기로, 올 만한 원군도 없을 텐데.”

    대놓고 면박을 주는데 엘린은 들은 척도 않고 꿋꿋이 이야기했다.

    설명을 좋아하는 건가, 어떤 의미론 참 스승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었다.

    “세간의 도덕을 기준으로 하면, 인신 공양을 받는 건 터무니없는 악행이었지. 그러면 어떻게 페불라는 신의 이름을 지켜 낼 수 있었나.”

    “그 성자가 쓰레기라서 자격을 박탈당했나 보지.”

    “아니, 애당초 고대 신에게 선악의 개념은 중요치 않았다는 증거란다. 성직자가 무조건 네크로맨서의 반대편에 설 거라는 것조차 편견에 불과했다는 말이야.”

    그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엘린의 눈, 광기로 번들거리는 두 개의 구체에서 기묘한 빛이 쏟아졌다.

    “고대 신이란 건 그래, 개념에 깃들어 있는 절대적인 에너지일 뿐이다. 선하다 믿으면 신이 될 테고, 악하다 믿으면 악마가 될 것이며 어느 쪽도 아니라고 믿으면 정령이 되겠지.”

    얼마 전에 읽었던 두 가지 자료가 떠올랐다.

    「폭풍이 불며 생긴 형체는 전설로 이야기되던 짐승을 닮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신수인 줄 알았으나, 곧 세간에 불리는 정령임을 알았다.」

    페불라의 성력으로 정령을 불러 낸 보네티 일가.

    「‘저는 고대신의 성력이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면 교단이 품을 수 있는 교인 또한 늘어날 테니까요. 정령은 개중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리고 성자가 말했던, 가능성에 대한 시험.

    그렇다면…….

    “그게 본질이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엘린은 짐짓 가련하다는 양, 애석한 표정으로 나를 비웃었다.

    “딜런의 집무실에, 당시 제물을 바친 성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단다.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교단에서도 거의 없지. 그러니 너도 몰랐겠다만.”

    그게 왜 거기에.

    의문을 온전히 떠올리기도 전에 머릿속에 답이 나타난다.

    동시에 내가 떠올린 답을 엘린이 입에 담았다.

    “그분께서 검은 뱀의 초대 교주시란다. 무작정 모리온을 만들려는 이들을 포섭해 진리의 일부로 삼으셨으며 신의 교리를 악마의 교리로 바꾸어 가르치셨지.”

    쿵, 쿵, 규칙적이던 심장 박동이 엇박자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러며 가슴께가 점차 무거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어지는 말을 그저 들었다.

    “이야기와 운명의 신, 페불라. 세상에 해피엔딩이 있으면 새드엔딩이 있듯이, 즐거운 운명이 있으면 처참한 운명이 있듯이.”

    기나긴 연설의 끝, 연기를 내뿜으며 괴로워하던 뱀은 어느새 몸을 회복했다.

    나이젤리아를 둥글게 감쌌던 그림자가 머리를 쳐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슥, 바닥을 기는 소리가 깔리며 사방의 그림자에서 붉은 빛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어둠에 숨어 우글거리는 그건, 전부 뱀이었다.

    “너는 신이라 받아들인 그 이면에 우리가 섬기는 악마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존재를 섬기고 있는 자매란다.”

    “……헛소리.”

    “다만 선과 악은 상극인 가치관이라서, 어느 한쪽의 영향력이 강하면 다른 쪽은 존재할 수 없어. 그러니 결국.”

    엘린은 벗었던 장갑을 도로 제 손에 끼우며 음험하게 선언했다.

    “너는 죽어 줘야겠구나.”

    몸을 구부리고 있던 거대한 뱀이 나를 향해 튀어 올랐다.

    공격 신호는 확실했기에 놀라지 않고 크루엘로가 앞을 막아섰다.

    커다란 눈꽃 모양의 방패가 뱀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엘린은 희열에 찬 얼굴로 웃었다.

    “크루엘로, 네가 있는 자리에서 신의 사자를 죽일 수 있는 게 그저 기꺼울 뿐이란다.”

    대꾸도 없이, 크루엘로는 나를 향해 속삭였다.

    “뱀은 내가 감당할 수 있어요.”

    그 말에 페불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래, 적이 나한테 무슨 좋은 소릴 해 줬다고 일일이 휘둘리고 있어.

    신빙성도 없는 혀 놀림에 넘어가선 좋을 게 없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말했다.

    “막고 있어요. 큰 거 하나 준비할게요.”

    크루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눈꽃 모양의 결정체가 폭발적으로 커져 나갔다.

    고드름처럼 얇고 길쭉한 창살이 잔가지처럼 뻗으며 거대한 뱀을 옭아매고 공간을 장악했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려던 새끼 뱀들이 가지에 찔려 얼어붙었다.

    그 모습은 흡사 새하얀 거미줄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윽, 아! 어우!”

    아무리 크루엘로가 넓은 범위를 커버하고 있더라도 그 많은 공격을 다 틀어막을 순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고 엎드렸다가 뛰어오르고.

    간혹 그가 놓치고 날아드는 새끼 뱀과 잔해물들을 재주껏 피하며, 나는 재빠르게 신성 주문을 외웠다.

    밉다, 시오라의 몸! 성력을 양껏 끌어 올려도 모자란 이 운동 신경!

    “어우 씨, 맞을 뻔.”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을 피하려 나는 바닥에 몸을 굴렸다.

    피부가 좀 긁히기는 했으나 별로 다치진 않았다.

    서둘러 일어나려는데 옆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

    추욱 늘어져 있는 데이디어 크림슨.

    맞다, 이 사람 있었지. 존재조차 잊고 있었네.

    이미 쏟아지는 잔해에 긁히고 베였는지 이마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음.

    “미안합니다.”

    못 지켜 줄 것 같아서 미리 사과했다.

    괜찮겠지.

    대충 여기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들이 말을 나누고 있을 때, 나와 크루엘로는 이미 예배당의 부근에 있었고 한껏 확장한 감각에 그 말소리가 잡혔으니까.

    아마도 데이디어 크림슨은 불량한 소꿉친구를 저버리지 못하고 숭고한 희생을 하러 온 것 같았다.

    정작 데이디어를 기절시킨 건 크루엘로였지만 뭐, 각오했겠지.

    더군다나 그녀는 비밀 조사관이니 죽음을 불사하고…….

    “살아왔을 텐데 나는 왜 오지랖이 넓어서!”

    크루엘로, 뭐 해!

    비명을 지르며, 나는 데이디어의 멱살을 잡고 같이 굴렀다.

    속으로 신성 주문을 외우고 자잘한 공격을 피하며 남의 목숨까지 챙기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기둥에 데이디어의 머리가 부딪치기도 했지만, 이쯤이야.

    “으음.”

    오, 그게 오히려 득이 된 듯했다.

    데이디어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는 반색하며 물었다.

    “깼어요?”

    “레, 이디 시오라?”

    “잘됐네, 그럼!”

    참전하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애당초 데이디어를 왜 기절시켰는데.

    엘린이 무슨 말을 더 지껄일지도 모르는데 안 되겠지?

    마침, 데이디어의 뒤쪽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크루엘로도 이쪽의 상황을 보고 있었나 보다.

    에휴. 그래, 짐이라도 덜자.

    “제가 왜 의식을 잃고 있던 겁니─.”

    “그럼 이제 꺼져요!”

    나는 날아드는 뱀을 피하며, 데이디어를 발로 차서 게이트로 밀어 버렸다.

    그녀는 어어, 하며 게이트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땀이 난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휴우.”

    이것이 바로 참된 선인의 삶!

    오늘도 누군가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미적거리지 말고 피해!”

    “알아으아!”

    크루엘로의 외침에 나는 또 데굴 몸을 굴렸다.

    그 와중에 머리를 부딪쳐서 설움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으흑흑, 진짜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야 해?

    그러나 괴로워할 여유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녀야 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주문을 외우는 시간도 평소보다 배는 오래 걸렸다.

    쓸 수 있는 성력이라도 많으면 베아티투도를 썼던 때처럼 양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지만, 외부의 에너지가 아닌 내 성력으로 그 짓거리를 했다간 이 몸은 넝마가 되고 말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끌자.

    나는 잠깐 새 파악한 엘린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었다.

    “질문! 선생님, 질문!”

    잠깐이지만, 공격이 멈추었다.

    그러면 그렇지!

    엘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선생님? 질문?”

    “아니, 아니, 설명이 부족하잖아요!”

    아까 묻지도 않은 이야길 줄줄 늘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여자는 설명을 좋아한다.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엘린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서술하자면,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당신도 이야기의 신인지 악만지를 섬기는데 안 풀린 이야기가 있어서 되겠어?”

    “……어이없는 수작을.”

    “아니야, 재밌을 거야. 들어 봐.”

    이마에 묻은 피도 이제야 닦을 수 있었다.

    흑흑, 내 신세야.

    “나를 차기 교주라고 몰아갈 때 말이야, 내가 페불라의 신도인 걸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내가 성력을 써서 혐의를 벗으면 어쩌려 그랬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