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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1화 (81/162)

81화

엘린이 멈춘 곳은 황궁의 예배당이었다.

네크로맨서가 숨어들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이었으나 그녀가 판단하기로 지금 상황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지금쯤 새끼 뱀들이 얼마나 먹어치웠을까, 상상해 보며 엘린은 손짓했다.

그림자 뱀이 꼬리에 매달고 있던 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커윽!”

충격에 비명을 삼키며, 청년은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무도회장의 불이 꺼지자마자 뱀에게 꿰뚫린, 줄리안 미네르바였다.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손끝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그는 간신히 눈꺼풀만 들어 올렸다.

“정신이 들었니, 아이야?”

엘린은 줄리안의 앞으로 걸어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애쓸 거 없다. 내가 준비한 마비독이 네가 풀려날 만큼 가벼운 건 아니니.”

“왜…….”

“그러게, 현명한 선택을 했어야지.”

하기야 현명한 아이였다면, 애당초 그런 일도 하지 않았겠지만.

엘린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줄리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화를 토해 낼 상황이 아니란 건 명백했다.

“당신……. 정말 2원로입니까?”

“글쎄, 직함 같은 게 중요할까.”

그런 건 시도 때도 없이 변한다.

교주, 원로, 하급 교인에 연구자.

태어날 때는 엘리니아였고 며칠 전까지는 나이젤리아였으며 지금은 엘린인 이에게 그런 건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목줄이 매여 있으면서 왜 그편에 증거를 넘겨줬니. 덕분에 나만 우스운 꼴이 되었잖아. 교단에서는 배신자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

“뭐, 네가 방만하게 군 것도 이해는 한단다. 여태 실패의 책임이 가벼웠으니 만만하게 보였을 법도 해. 하지만 말이다.”

엘린은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가만히 줄리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분홍빛 머리칼이 가지런히 정리된다.

그 손끝이 스칠 때마다 청년의 얼굴은 점차 창백해졌다.

“네게 기대한 바가 있었기에 눈감아 줬을 뿐이란다.”

서론은 이쯤이면 되었다.

엘린이 품에서 새하얀 알갱이가 든 봉투를 꺼내어 줄리안의 앞에 내던졌다.

툭. 베아티투도였다.

“먹으렴.”

줄리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걸 먹어 크루엘로를 뛰어넘길 바랐다지? 지금이 그날이란다.”

“제가, 이걸 먹길 기다린 겁니까?”

“그래. 되도록 자의로 입에 넣어 주길 바랐는데 쓸데없이 겁만 많아서는 통 움직이지 않더구나. 그렇게 많은 시간을 줬는데도 말이야.”

“…….”

“이걸 먹어서 생기는 부작용이 두려우니? 걱정할 것 없다. 위험이 크다는 건 그만큼 얻을 게 많다는 이야기야.”

엘린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제 뱀을 다정스럽게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그 결실이야. 무도회장의 그 많은 사람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킨 것도 이 애의 힘이지.”

사람들의 그림자에 새끼 뱀을 까서 주인을 공격하게 만든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뱀의 수도 늘어나기 때문에 단시간에 혼란을 만들기 좋은 마법이었다.

생각하니 그리워져서 그녀는 구태여 옛일을 입에 담았다.

“내가 처음 베아티투도를 먹은 건, 당시 진행하던 연구가 막혔기 때문이란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 분해서 그 한계를 깨고 싶었거든.”

“흐…….”

“같은 도전을 한 연구원들도 있었는데 결론만 말하면 모조리 죽었단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어.”

그녀의 목소리에 서서히 황홀함이 배어들었다.

“늙었던 육체는 한순간에 젊음을 되찾고 다룰 수 있는 마법이 몇 배는 늘었지. 무엇보다, 나는 그날 이후로 그분의 계시를 들을 수 있게 됐단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따위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너의 조건은 당시의 나와 상당히 흡사하단다. 살아남을 가능성도 그만큼은 되지. 염려하지 말거라.”

줄리안은 제 의사를 드러내듯 입을 꾹 눌러 다물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그림자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개중 하나가 뱀처럼 기어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줄리안의 입가로 가져갔다.

“먹지 않을 겁니다. 그냥 죽이십시오.”

“하하, 내가 친절히 설명해 줘서 오해한 모양이구나.”

줄리안의 다른 쪽 그림자가 그의 몸을 타 넘어서는 머리채를 쥐어 확 젖혔다.

그의 입이 억지로 벌어졌다.

“이제 와 네게 선택지 따윈 없단다.”

봉투가 뜯겨 나갔다.

소금만 한 굵기의 알갱이들이 사정없이 줄리안의 입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으나 저항은 조금의 성과도 내지 못했다.

“그러게, 모르는 사람을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도 못 들어 봤니?”

“우읍, 읍!”

“살아남으면 내 몸소 교리를 가르쳐 주마.”

베아티투도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

서둘러 튀어나온 검날이 줄리안의 그림자와 베아티투도 봉투를 통째로 베어 냈다.

소금 같은 알갱이들이 바닥을 희게 물들였다.

일을 벌인 이는 재빨리 줄리안을 낚아채어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얌전히 먹게 했으면 좋았을걸, 괜히 바닥이나 핥게 되었구나.”

엘린은 가만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급습한 이를 바라보았다.

고동색 머리칼과 재색 눈. 장신의 기사는 검으로 그녀를 견제한 채 줄리안을 챙기고 있었다.

데이디어 크림슨이라고 했던가.

엘린은 어렴풋이 그 이름자를 떠올렸다.

“줄리안! 뱉어!”

“욱, 우웨엑!”

“전부 토했나? 삼킨 건 없겠지.”

“쿨럭, 큭, 흐으, 데이…… 디?”

줄리안은 초점이 잘 안 맞는 눈으로 힘겹게 데이디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엉망이었다.

데이디어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서둘러 품에서 마도구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줄리안이 그걸 알아볼 새도 없이.

“긴말은 않겠다. 돌아가면 자수해, 줄리안. 나도 더는 눈감아 주지 않을 테니까.”

“너, 지금 무슨……. 데이디!”

“나중에 보자.”

이동 마법이 이식된 마도구가 줄리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게이트가 연결된 최상등품은 아니기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

‘마지막 인사를 들었을지는 모르겠군.’

생각하며 데이디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검 끝에는, 엘린이 무감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 애가 정말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제국에 있는 이상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레이디를 해치우면 어떻게든 길이 나오겠지요.”

“아직도 날 레이디라고 불러? 하하, 재미있구나. 그래, 그러고 보니 비밀 조사관에게도 빚이 있었지.”

그녀가 픽 웃으며 손끝을 까딱였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길쭉한 뱀이 튀어나왔으나 데이디어는 무리 없이 베어 냈다.

그러나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 적.

엘린의 지휘를 따라 뱀들은 교묘한 경로를 그리며 그녀를 공격했다.

그것까지도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었으나.

“별거 아닌 정보를 주워 가 놓고 으스대는 줄 알았더니, 내 비밀을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누가 흘렸을 거라고 보는 게 맞겠지.”

“크윽!”

“그 건방진 아이가 누구일지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거대한 뱀의 습격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입을 벌리고 덮쳐 오는 뱀을 가까스로 검으로 막았으나, 근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뱀은 데이디어를 물어 삼키지 못했으나 충격에 밀린 몸이 기어이 벽면에 처박혔다.

설상가상으로 데이디어의 검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진작 애검을 줘 버린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다음 생에는 좀 더 현명하게 사는 게 좋겠구나.”

기어이는 검이 깨끗하게 조각났다.

뱀의 입이 그대로 데이디어를 삼키려던 순간.

─6주문. 광휘brilliance.

새하얀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뱀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물렸으나, 빛이 닿았던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마치, 성력에 손을 덴 엘린이 그랬던 것처럼.

흡사 안개만큼이나 자욱한 연기 사이, 어렴풋이 비치는 형상을 데이디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명의 남녀가 있었으나 위치상 보이는 건 선두에 선 여자다.

흐드러진 금발 아래,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

내면을 그대로 투과해 볼 듯한 보랏빛 눈동자에 제 속마저 꿰뚫리는 듯했다.

‘원래, 저런 눈빛이었나.’

반면, 엘린은 데이디어와는 달리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외려 웃었다.

“왔니, 제자야?”

아니지, 아니지.

나이젤리아의 이름은 버렸으니 그런 호칭은 사용할 수 없다.

그녀는 제대로 시오라 보네티를 불렀다.

“어서 오거라, 페불라의 어린 사자야. 오래도록 너를 기다려 왔단다.”

급하게 내던진 신성 주문으로 데이디어와 뱀을 갈라놓은 즉시, 예상치도 못한 인사말이 귀를 뚫고 들어왔다.

내가 페불라의 신도인 걸 알아?

당황스러웠지만, 한동안 성력을 남발했으니 누군가 안 대도 이상치는 않았다.

나는 일단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삼켰다.

“놀라지 않은 척하는구나.”

“워낙에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시니까요.”

크루엘로가 반 발자국 앞에 서며 맞받아쳤다.

“반가운 얼굴이 연달아 오는구나. 그러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빚을 정리해야겠지.”

엘린이 장갑을 벗었다.

그토록 꼭꼭 숨겨 오던 살갗이 드러났다.

황제가 말했던 대로 그녀의 손등에는 파충류의 비늘 같은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

손에 흉터가 난 거야 본인 입으로 들었지만, 모양 한번 화려하네.

저걸 기어이 보여 주려고 벗은 건가, 그녀에게도 애 같은 구석이…… 아니라, 열쇠 자랑이었다.

엘린이 그 흉터에서 열쇠를 끄집어냈다.

하필이면 그 색이 또 피처럼 붉어서 또다시 연출이 괴기해졌다.

원로회 인간들은 하나같이 왜 저러는 거지?

남은 열쇠는 막 눈이나 머리, 콩팥, 그런 데에 들어 있는 거 아니야?

기겁하면서도 나는 데이디어가 신경 쓰여 크루엘로에게 눈짓했다.

그가 곧바로 그녀를 기절시켜 주었다.

나이스 파트너.

“거기에 열쇠는 없다고 하지 않았어?”

“흉터가 있다고 말한 기억밖에 없구나.”

그렇게 말하며 엘린은 나한테 열쇠를 던…… 져 주었다?

일단은 받으면서도 이번엔 표정 관리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나한테 열쇠를 준다고? 갑자기? 자신감의 표명인가?

“인질을 무사히 구해 낸 보상이란다. 성취에는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음. 그 지푸라기 인형이라면 안 들고 왔는데.”

“아니지, 인질은 너 자신이었다.”

어디서 사람 속 긁는 멘트라도 배우고 다니나, 재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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