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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0화 (80/162)

80화

엘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게 패배 선언과 뭐가 다르담.

재차 그녀를 몰아붙이려는 때, 시종장이 무언가를 잔뜩 끌어안고 나타났다.

옷을 접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검은 천과 양피지였다.

그는 황제에게 양피지를 건네고 귓가에 속삭였다.

곧 황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결국은 다 거짓말쟁이들뿐이었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황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경들도 알 테지, 기사단과는 별도로 궁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정보 조직이 있다는 걸.”

비밀 조사관?

“원칙대로라면 그편을 통해 얻은 정보는 바깥에 공개하지 않지만, 이번엔 예외를 만들어야겠군. 공교롭게도 최근 입수한 정보가 지금 사건과 아주 관련이 깊어서 말일세.”

비밀 조사관이 최근 입수한 정보라면…….

나는 주위를 돌아보는 척하며 데이디어를 쳐다봤다.

그녀는 무표정했으나 나와 눈을 마주칠 때는 약간의 동요를 드러냈다.

오호라, 해석을 마쳤단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시종장이 천을 펼치자 나타난 건 검은 뱀 교단의 로브였다.

시종장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게끔 로브를 들었다.

특수 용액으로 적어 보이지 않던 글씨도 황금빛으로 형체를 드러냈으나 작아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황제가 크루엘로에게 말했다.

“잘 보이도록 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크루엘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황금빛 글씨가 로브에서 분리돼 허공에 떠오르며 그 크기를 키웠다.

그리하여 보게 된 내용은 이랬다.

「나이젤리아NIGELIA = 엘리니아ELINIA.G」

앞쪽에 있던 철자가 순서를 바꾸며 뒤쪽의 이름자에 겹쳐 든다.

마치 그 의미를 강조하듯이.

“헉!”

대부분은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반응이었으나, 몇몇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나 또한 예상 못 한 이름의 등장에 당황했다.

엘리니아 G?

교단에서 ‘사자 부활 실험 일지’를 쓴 저자의 이름이었던가.

척 보기에도 낡아 보이는 기록이었는데 그때의 저자와 나이젤리아가 동일 인물이라고?

황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겠지. 엘리니아 길트리스는 200년 전, 검은 뱀 교단을 이끌던 당시의 교주라네.”

200년 전의 교주라니 오래도 묵었네.

“어떻게 60대인 소몬 후작과 동일인이라는 건지 참 의아한 일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래서 추가로 의문점을 조사해 봤다더군.”

황제는 소리가 나도록 양피지를 펼치고 두 눈으로 내용물을 훑어보았다.

“그랬더니 소몬 후작에게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했지 뭔가. 유년 시절의 기록이 없다고 하던데 이게 사실인가, 공작.”

“서류상으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다가 스물이 된 해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폐하.”

“스물이라.”

“지금의 엘린 럴러바이와 같은 나이 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크루엘로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그러나 그 또한 그 사실을 처음 알았는지, 두 눈에 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나는 새삼 오컬트 도서를 즐겨 읽던, 어린 날의 로이를 떠올렸다.

“특이점은 하나 더 있네. 소몬 후작이 모습을 드러낼 때도, 당시 63세이던 그녀의 친척 하나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는군.”

“그런 사실은 처음 들었습니다만, 참 이상한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렇지. 꼭 인간이 낡은 신분을 버리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 다시 나타난 것 같지 않은가.”

상황 설명은 충분했다.

무도회장의 모든 눈이 저마다의 의혹을 담아 엘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여유는 거의 사라진 듯했다.

“엘린 럴러바이, 그대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지?”

“교단 측에서 감히 폐하를 조롱하기 위해 거짓된 정보를 남긴 게 아닐까 우려되는군요. 이미 늙은 인간이 어찌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글쎄. 검은 뱀에서는 워낙 해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 의심이 거둬지지 않는구나.”

“하나 폐하.”

“장갑을 벗어 보거라.”

잠깐 동안 엘린이 숨을 멈추었다.

황제는 멈추지 않았다.

“나이젤리아 화이트데저트의 손등엔 뱀 비늘 모양의 화상이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공교롭게도 엘리니아 길트리스의 손에도 같은 모양의 흉터가 있다던데.”

황실 기사들이 주인의 뜻을 읽고 천천히 엘린을 둥글게 감싸며 다가갔다.

당장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으나 언제 행동에 나서더라도 이상치 않은 기세였다.

“황명이네.”

무도회장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은 이제 확신을 담아 엘린을 찍어 눌렀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아.”

깊고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묻어나는 감정은 두려움도 체념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뱉은 말은.

“계획대로라면 멋진 데뷔탕트 볼이 되었을 텐데 아쉬워라.”

엘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무도회장에 암흑이 찾아왔다.

샹들리에의 불꽃이 한 번에 꺼지고 사방에서 검은 마나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 또한 머잖아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샤아아!

내 발치에 달라붙어 있던 그림자가 돌연 뱀의 형상을 입고 튀어 올랐다.

잽싸게 내 몸을 휘어 감고는 내 목을 물어뜯을 듯 입을 벌렸다.

뭐, 물론.

─정화purification

이 정도에 당할 정도면 진작 귀향했겠지만.

그러나 나처럼 손쉽게 위기를 벗어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흑, 흑마법이다!”

“그림자를 조심커헉!”

“으아아악, 살, 살려 줘! 죽기 싫어!”

“서, 성녀님! 도와주십시오, 성녀님!”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일반인이 문제였다.

황실 기사들은 황족들을 지켜야 하니 움직일 리 없었다.

마법사들이 임시방편으로 빛으로 된 구체를 허공에 띄웠으나, 그럴 때마다 날아오른 그림자 뱀이 빛을 삼켜 버렸다.

그래도 잠깐잠깐 시야가 밝아진 덕에 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믹은 로 블루에게 보호받고 있었고, 예상대로 황실 기사들은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황족들이 뭐라 뭐라 지시를 내리는 것 같긴 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엘린은 어느샌가 보이지 않았는데.

“이건 대체 뭔 소리야.”

비명이 울리고 물건이 부서지고, 칼을 휘두르고 마법을 흩날리고.

갖은 소란에 가려져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으나, 둔중한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마치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거대한 뱀이 바닥을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천천히 희미해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불길했으나, 나는 당장의 상황부터 수습하기로 했다.

내버려 두면 사상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 마믹이 한 척 성력을 끌어모아서…….

“어?”

무도회장의 한복판에서 치솟은 빛이 내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근원지는 새하얀 검, 그걸 들고 있는 건 로 블루였다.

“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이 틈에 처리하십시오!”

과연 성기사다운 자태였다.

문제는 삼킬 수 없는 불빛에 분노한 뱀들이 로 블루를 표적 삼았다는 것이다.

그는 수월하게 대부분의 그림자를 상대했으나 기어이는 사각에서 날아든 뱀도 있었다.

“로!”

마믹이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며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그 끝에서 빛이 튀어나왔다.

“성력?”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깜박였으나 그대로였다.

빈말로도 높은 수준은 아니었으나 조그만 실뱀쯤은 불태울 수 있는 그 힘은 분명 성력이었다.

혹시 내가 마믹한테 속고 있던 건가?

의아해 마믹을 살폈으나, 그녀는 나보다 몇 배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것 봐, 체험하면 도움된다니까. 어쨌거나 이쪽 신도 센스 있네.”

빛만 있다면, 저 그림자 뱀이 그리 무서운 적은 아닐 터.

내가 나서지 않아도 상황은 수습될 것이다.

나는 관심사를 돌리고 주문을 외웠다.

─확장extension.

선명해진 감각에, 아까의 그 기묘한 소리가 잡혔다.

비단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큰 뱀이 기어가는 듯했던 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그러한 형상대로 검은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건 무도회장의 바깥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엘린이 바깥으로 나간 거겠지.

나는 서둘러 그 기운을 쫓기 위해 몸을 돌렸다.

크루엘로는 알아서 쫓아오겠거니 생각했을 때, 팔을 잡혔다.

“내가 갈게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크루엘로였다.

그런데 이건 뭔 소리야.

“당연히 같이 가야죠! 그 할머니가 실력을 얼마나 숨겼을 줄 알고!”

“달링은…… 그냥 여기에 있어요. 외곽 쪽으로 빠져 있으면 안전할 거예요.”

“네?”

“이번 일은 내가 수습하기로 했었잖아요.”

“아니……. 자신감 있는 건 좋은데 그래서 열쇠는 어떻게 뽑아 오려고요?”

“……죽기 직전에 데려올게요.”

“위급할 때 헛소리 금지.”

난 또 무슨 대단한 계책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티가 안 나서 몰랐는데, 이번 일을 망쳐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보다.

아니면 내가 말도 못 하게 허약해 보였는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니면 걱정이라든가 어쨌거나.

“마나의 흔적이 엄청 희미해요.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따라갈 수 있겠어요?”

“…….”

“모르겠으면, 우리 일의 중요도를 생각합시다.”

나는 팔을 뿌리치는 대신 크루엘로의 팔을 잡고 뛰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버티지 않고 나를 따라왔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고 잠시 뒤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방향만 가르쳐 줘요.”

“악!”

무릎 뒤쪽으로 불쑥 들어온 손이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와 목을 붙들었다.

이거, 이거 손버릇 좀 봐!

“왼쪽! 그리고 두 블록 직진이요!”

너무 편해서 중독될 것 같다.

***

“……꼬마도 어른도 모두가 돌아가네. 나도 캄캄한 상자 속으로 돌아가네.”

반경 1m는 될 법한 커다란 뱀.

그 위에 앉아, 엘린은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민요를 흥얼거렸다.

슥슥, 뱀이 움직이는 소리가 노래를 음산하게 만들었다.

뱀과 그 주인은 무도회장을 나왔으나 황궁을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외려 조금도 모습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뻔뻔한 행태를 고발하지 못했다.

“허, 헉, 뱀이─. 커헉!”

마주치는 이들마다 전부 그림자 뱀의 먹이가 되었으니까.

근방에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는 엘린과 뱀의 꼬리에 매달린 청년뿐이었다.

“쉬이, 다 왔단다.”

목적지에 다다른 엘린이 뱀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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