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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9화 (79/162)

79화

나는 줄리안의 표정을 쳐다보고 싶었으나 일단은 참았다.

영상구의 재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황제는 기가 막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짠 것처럼 증거가 척척 나오는군.”

“신의 뜻이 아닐까요?”

“그래, 신전의 일은 어찌 된 건가.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라 주장하려는가?”

“주장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로 블루 경을 불러내려 하지 않았고 레카논의 성물을 바꿔치기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저 말뿐?”

“실은 증인을 모셔 왔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마믹 성녀님과 로 블루 경을 자리에 모셔도 될까요?”

황제의 선선한 승낙에 마믹과 로 블루가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꼭 와야 하는 증인은 아니었지만, 이름값 때문에 불렀다.

두 사람은 황제에게 간단히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고는 마믹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전의 마믹이라고 합니다. 성물은 바꿔치기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오라 신도님께서 로 블루 경을 빼돌리려 했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오히려 저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블루 경이 방을 나가길 바라셨으니까요.”

“성녀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마믹이 숨도 안 쉬고 말한 탓에 로 블루의 말은 더 간결히 들렸다.

별로 매끄러운 증언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뜻만 통하면 그만이지.

나는 슬쩍 엄지를 쳐들었다가 내렸다.

“이상입니다. 혹시 제 주장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셨다면 그 또한 해명하겠습니다, 폐하.”

“납득이야 되었네. 증거에 증인에 한 무더기를 준비했으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

진짜? 이렇게 순조로워?

음, 나야 좋긴 한데 돌아가는 모양새가 꼭 황제가 그러길 바란 것 같아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은 다 차린 식탁을 걷어찰 수는 없으니까.

“열린 마음으로 제 의견을 받아 주셔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죽은 제 스승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나는 다시 연극 모드로 돌아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 어우, 뭐야. 이제 보니 이거 레이스 달렸네.

눈물을 닦는─척할─ 용도인데 디자인이 별로다.

크루엘로에게 아무거나 집어 달라고 했더니 정말 아무거나 집어 줬군.

어쨌거나 진짜로 운 건 아니기에 시늉을 이어 가면서, 나는 곁다리처럼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그 손녀분을 조사해 주시면─.”

“조사를 원하시거든 여기 있습니다.”

어라.

차분한 톤의 목소리가 내 말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학자풍의 여인이 보였다.

한쪽으로 묶은 머리칼은 나이젤리아와 똑같은 붉은 갈색이다.

나이가 젊다는 것 외에는 이목구비나 차림새도 다 흡사했다.

……손에 끼고 있는 장갑까지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여자가 엘린 럴러바이다.

귀족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나 보군.

황제가 놀란 기색도 없는 걸 보면, 애당초 알던 모양이다.

광대가 된 기분이라 살짝 불쾌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제폐하. 감히 허가 없이 폐하의 앞에 나서기가 곤란하여 이제야 얼굴을 비친 점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엘린은 이어 황제에게 발언권을 허락받고서야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도 그 분위기가 몹시 차가웠다.

확실히 귀족 예법에 익숙한 티가 났다.

“만나서 반가워요, 레이디 시오라. 제가 할머님의 손녀인 엘린이에요. 말씀하신 내용은 잘 들었습니다.”

“음, 시오라 보네티입니다.”

“확실히 제가 오해한 부분도 있는 모양이에요. 특히 그 사형수는 정말 감쪽같이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설마 정체 모를 분께서 위증을 강요하셨을 줄이야.”

한스에게 위증을 강요한 이가 영상구에 드러나지 않아 발뺌하려는 모양이군.

살짝 눈가를 찡그리자 그녀는 곧바로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믹 성녀님께서 성물의 진위 여부를 분간하실 수 있다는 말은 조금 모호하게 들리네요.”

“성녀님께 그걸 구분할 능력이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실례되는 발언인 걸 알지만, 그래요. 내내 레카논의 성물을 맡고 계셨지만 성력은 없으시죠. 성력이 없이 어떻게 성물이 바꿔치기 되지 않았노라 확신한단 말인가요?”

노골적인 모욕에 나도 조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마믹 쪽을 흘금 보자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엘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사실 내내 잠잠하던 성물이 폭도가 들이닥친 순간에만 힘을 발휘했다는 것 자체가 성물이 바꿔치기 됐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저는, 레이디 시오라께서 성물을 들고 그 자리에 나타나셨을 때 이미 성물이 바꿔치기 됐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성력을 발산하는 다른 물건으로요.”

“그게 성력이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으시네요. 제가 정말 네크로맨서였다면 그 성력에 크게 다쳤을 텐데도요.”

“글쎄요, 레이디 시오라께서 흑마법사라는 주장은 그 사형수만 하지 않았던가요. 위증임이 드러난 이상 구태여 그 사실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요.”

“그러면 흑마법사도 아닌 이가 차기 검은 뱀 교단의 교주 자리를 약속받았다고요?”

“네크로맨서는 너무 위태롭죠. 신관의 성력 한 번에 그 정체가 드러나고 마니까요.”

엘린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제 팔을 쓸었다.

“애석하지만 저도 어린 시절, 할머님을 통해 강제로 흑마법을 익힌 적이 있답니다. 덕분에 평생 신관분들께 치료받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요.”

“검은 뱀이 네크로맨서 단체라는 걸 부정하는 발언 같은걸요.”

“중요한 건 흑마법이 아니라 교리니까요. 할머님께서 청소를 입에 담으셨다면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더 치밀하고 교활해지길 바라신 걸지도?”

음.

나이젤리아가 말한 건 그쪽에 더 가깝긴 하지.

엘린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내의 분위기는 다시 변했다.

황제까지 그쪽으로 돌아선 건 아닌 것 같았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엘린이 차게 웃었다.

“그러면 반박해 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디 시오라, 혹은 마믹 성녀님이라도요.”

그녀의 시선이 마믹과 로 블루를 차례로 훑었다.

다행히 로 블루는 신전에서처럼 마믹을 향한 모욕에 곧바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물론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도 대응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었지만.

마믹이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성력을 쓸 수 있다면요? 그러면 성물을 분간할 수 있다고 믿어 주실 건가요?”

화났네, 화났어.

아까보다 말투도, 표정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래, 눌려 살아서 그렇지 마믹의 성격도 보통은 아니었으니까.

엘린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곧 선선히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좋아요, 해 보세요. 아, 물론 폐하의 허락이 뒤따라야겠지만요.”

당연히 황제는 거절하지 않았다.

“제 안목에 의문을 제기하신 분이 엘린 신도님인 만큼 직접 제 성력을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비록 성력에 몸을 다친다고 하셨지만─.”

“대단치 않은 정도일 테니 그쯤은 받아 낼 수 있답니다. 제 무례를 이런 식으로 사죄드릴 수 있다면 오히려 기쁜 일이지요.”

엘린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감을 드러내곤 마믹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믹이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했다.

바깥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타고난 천성이다.

보통은 어렸을 때 성력이 발현되고, 나중으로 미뤄지더라도 스물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른을 넘어 성력이 발현된 케이스는 단 하나뿐, 그러니 확신하더라도 이상치 않다.

나도 마믹을 위로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이야기란 거지.

그러나 엘린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마믹이 그녀의 두 손을 덥석 붙들었을 때 살짝 흐트러졌다.

아차 싶었는지 손을 빼려 했으나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는 게 먼저였다.

“아악!”

엘린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팔을 빼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장갑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나는 중이었다.

흑마법사의 몸에 성력이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증상.

“하하하!”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 꼴이 우스웠는지 크루엘로는 참지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엘린이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반면 마믹은 제가 성력을 쓰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저건, 마믹이 아니라 내 성력이다.

“뭐? 나더러 그 여자의 손을 붙잡고 성력을 쓰라고? 너, 지금 날 놀려? 내가 성력을 못 쓴다는 게 그렇게 우스워?”

“아니야, 내가 빌려주면 너도 쓸 수 있어. 네가 나중에 성력을 발현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까 너한테도 이득일걸.”

“성력이 무슨 돈인 줄 알아! 그걸 어떻게 빌려줘!”

“일단 해 보면 알아! 내가 다른 데서는 못 보는 특별한 주문을 써 줄 테니까.”

“그게…….”

“에헤이, 언니! 체험이라도 해 봐 봐. 넉넉히 챙겨 줄게.”

답만 말하자면 9주문. 수정modification이었다.

마법사들이 심장에 마나를 담아 두는 것처럼, 마믹의 심장 부근에 성력을 담는 기관을 만들었다.

물론 기존에 없던 기관이기에 효용은 좋지 못했다.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1회용인 데다가, 쓴다기보다는 버린다는 말이 더 가까울 정도로 낭비가 심했다.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했지만.

덕분에 지금 내 상태는 아주 굉장했다.

이거 다 끝나면 푹 쓰러져서 잠만 자야지.

인간도 겨울잠을 잘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

하지만 그전에.

“괜찮으세요, 엘린 님?”

나는 자못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엘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색이 창백하세요. 장갑이라도 벗어 보세요. 성력은 안 되더라도 치료는 받으셔야 하잖아요.”

“아, 니요. 됐습니다.”

“왜요. 장갑을 벗지 못하는 사정이라도 있으세요?”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린의 동요가 내게 확신을 주었으니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똑 닮은 손녀딸이 튀어나오는 건 이상하지.

똑같은 얼굴에 비슷한 목소리, 그리고 절대로 벗지 않는 장갑.

“실험을 진행하던 중, 불에 크게 덴 적이 있다. 한쪽만 끼고 다니긴 꼴이 우습지 않겠니?”

이 여자, 나이젤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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