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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8화 (78/162)
  • 78화

    시오라 보네티를 생각하니 기분이 더 가라앉는다.

    지금 모습만 봐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지만, 어린 시절의 데이디어는 병약했다.

    틈만 나면 열이 오르고 쓰러져 앓았다.

    유서 깊은 무가에서는 드문 일이었기에 아이는 많은 이들의 우려 섞인 관심 속에 자랐다.

    다행스럽게도 데이디어는 자라며 여느 무인들처럼 튼튼해졌고 검술에 상당한 재능도 드러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족들은 걱정을 지우지 않았다.

    심지어는 기사 임명을 받고 나서도 기사단에 들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크림슨 공작가의 핏줄이라면 믿음직하지. 자네 가족들의 염려와는 달리 솜씨도 괜찮고. 어때, 내 밑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크림슨 경.”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으나 적성에 맞았다.

    사람들의 걱정이 귀찮아 눈치 없는 척 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주변인을 속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간 평생 새장 속의 새 꼴이 될 게 분명했다.

    다만, 줄리안 미네르바에게만은 죄책감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알았던 소꿉친구는 자신을 허약한 병자로만 취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뭘 하든 응원해 주려고 했으니까.

    비록 아카데미를 다닐 적, 어딘가 어긋나기는 했으나 한때의 방황이라 믿었다.

    그녀가 ‘검은 뱀’ 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데이디어는 머잖아 줄리안이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교단은 건드리기엔 너무 컸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에겐 각오가 부족했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어.’

    데이디어 크림슨은 제가 비밀 조사관의 일을 지나치게 얕봤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은 그만둘 것이다.

    오늘 무도회가 끝나는 즉시 황태자에게 독대를 청해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며 제 죄도 함께 고백해야겠지만.

    “크림슨 경? 오늘은 혼자 오셨나 봅니다!”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안에는 벌써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데이디어는 적당히 인사를 받아 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회장 안을 돌아봤다.

    그러다 먼저 와 있던 줄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는 시선을 피해 버렸다.

    어쩔 수 없나, 데이디어는 씁쓸하게 웃었다.

    굳이 줄리안을 찾아가 말을 건네는 대신, 그녀는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와인잔 하나를 나눠 받았다.

    그 순간, 황제 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도회장의 귀족들은 모두 허리를 구부려 주인을 맞았다.

    “대단치도 않은 생일에 많이들 찾아와 줬군.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겠네.”

    엄숙한 목소리가 무겁게 깔려 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년간 제국을 지배해 온 위엄이 녹아 있었다.

    감히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장엄한 분위기에는 군주 특유의…….

    “일단 그 부담스러운 허리들부터 펴고─.”

    “감히 고할 것이 있습니다, 황제폐하!”

    ……음?

    높은 톤의 목소리가 감히 황제의 말을 잘랐다.

    경악하며 사람들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전에, 허리를 펴도 된다는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황제 앞에 납죽 엎드려 있었는데 그 거리가 황제와 상당히 가까웠다.

    ‘기사들은 뭘 했길래.’

    데이디어가 황실 기사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마법이다.

    그리고 어지간한 마법사는 마법을 쓸 수도 없고 그럴 배짱도 없는 무도회장에서 함부로 힘을 남발해 댈 사람이라면…….

    데이디어를 비롯하여 몇몇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굴러 한 사내를 찾아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웃고 있는 이,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였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데이디어는 다시 황제 앞에 엎드린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침 여자가 머리를 들었다.

    그러며 드러난 얼굴은 데이디어의 예상과는 달랐다.

    갈색 머리칼에 평범한 이목구비.

    하나 혼란은 잠시.

    “목숨을 걸고 아뢰오니 부디 잠깐만 발언할 기회를 주십시오.”

    변신 마법이라도 걸어 두었던지 여자의 얼굴이 금세 달라졌다.

    동그랗게 부푸는 이마,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콧날 양옆으로 보석처럼 선명한 빛깔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이런 상황임에도 데이디어는 잠깐 동안 감탄했다.

    정말 잠깐이었다.

    ‘시오라 보네티가 왜 여기에.’

    종교 재판을 피하기 위해 황제를 이용하려는 건가.

    데이디어의 시선에 흥미가 깃들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기울여 와인 한 모금을 머금었다가.

    “제 스승님, 소몬 후작께선 무고하십니다!”

    도로 뱉어 내고 말았다.

    플랜 A, 일명 ‘사기는 너만 칠 수 있냐’ 작전이 시작되었다.

    듣기로 황제는 과묵한 사람이며 남의 말을 잘 끊지 아니하고, 크루엘로의 미친 짓거리를 즐겁게 감상할 만큼 재밌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신전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과연, 지금 상황에서 딱 필요한 인재로다.

    지금 상황에서 황제의 권위가 알 바냐.

    사람은 배짱! 어차피 죽어도 남의 몸!

    사람들이 얼빠져 있는 사이, 나는 남은 말을 이었다.

    “제 이야기를 모두 들으시고 그때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신다면,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쳐 주십시오!”

    물론, 이 목은 잘려 나가지 않겠지만.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설마 죽기야 하겠어?

    크루엘로가 알아서 빼돌려 주겠지.

    “본인이 아닌 다른 이의 무고라……. 관심이 없지는 않군.”

    “폐, 폐하, 아니 될 말씀입니다! 신전에서 이미 종교 재판이 예정된 걸 아시지 않습니까!”

    “당장 저자를 하옥하셔야─.”

    “그만.”

    반발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꼬리를 잘렸다.

    이 와중에 신전을 운운하다니 나보다도 황제를 모르는군.

    심기가 상했는지 중년 사내가 눈가를 잘게 찡그렸다.

    그러나 황제는 노하여 소리치지는 않았다.

    “아직 경들에게 생일 선물을 받지 않았지. 선물로 나는 이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군.”

    그리고 해 보란 듯이 그가 턱을 까딱였다.

    좋아.

    “소몬 후작이라면, 이번에 그 손녀가 죄를 고발한 나이젤리아 화이트데저트를 말함인가?”

    “그러합니다.”

    “무고하다는 건 후작이 실은 ‘검은 뱀’이 아니라는 이야기겠고.”

    “아닙니다. 그분은 ‘검은 뱀’에서 중책을 맡은, 뛰어난 솜씨의 네크로맨서셨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무고하다는 말인가.”

    “사람이란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 죄를 되돌릴 줄도 압니다. 그분께서는 검은 뱀을 배신할 생각이셨습니다.”

    교단 청소도 따지고 보면 배신이지, 아무렴.

    빈말로 들리지 않도록 나는 증거물을 하나 꺼내 들었다.

    출처는 크루엘로였으며 품목은 영상구였다.

    [네 말대로다. 나는 검은 뱀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싶다.]

    당연히 영상구를 만들어 둔 것도 크루엘로였다.

    원래는 원로들을 이간질할 때 쓰려고 했다지만, 이것도 어떤 의미론 이간질이니까.

    “그분께서는 평생을 네크로맨서로 살아오셨지만, 그 삶을 후회하셨습니다.”

    나는 연극을 하는 것처럼 내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해체해야 할! 악의 무리라고요. 그러나 그 세력은 너무나 강대했고 혼자 힘으론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힘을 빌렸다. 하필이면 같은 가문에 있는 공작의 약혼녀에게?”

    어라, 원로회가 검은 뱀과 한통속인 걸 아는 건가.

    하기야 안 대도 이상하진 않지.

    〈운명〉에서는 별로 존재감이 없어 얕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황제니까.

    일단 계속하자.

    “저는 눈가리개 정도였지만요. 당신께서는 일을 마치기 전에 살해당하실 걸 가장 염려하셨습니다. 가까운 이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도요.”

    상상의 여지를 주기 위해 나는 한 박자 쉬었다.

    이 시점에서 나이젤리아에게 가까운 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그 공백에 답을 채웠다.

    내가 먼저 꺼내 놓는 것보다 이편이 동조받기 좋았다.

    사람은 스스로 떠올린 답을 더 신뢰하는 편이니까.

    그쯤에서, 나는 슬픈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저는 스승님이 실종되신 원인으로, 손녀라는 그분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의심이야, 의심.

    확신한다고 안 했어.

    일단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뒀고.

    “스승님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내리신 지시는 황실의 비밀 조사관을 구하고 동태를 살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당신께서 알아서 하시겠다고.”

    맹세의 사슬 때문에라도 조사관이 나와서 증언해 줄 리는 없겠지만, 그 조사관이 살아 나왔다는 걸 황제는 알고 있을 터.

    황제한테 그럴싸하게 들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말대로 교단의 본거지가 무너졌다는 말을 얼마 전에 전해 들었습니다.”

    “교단의 복장을 한 건 잠입하기 위해서였다? 좋네, 그렇다면 사형수 한스의 말은 어찌 반박하려는가.”

    한스의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황제가 이번 사건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 또한 증거물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두 번째 영상구를 꺼냈다.

    이쪽의 출처는 줄리안 미네르바였는데 크루엘로가 그를 족쳐서 잘 가져왔다.

    [네가 한스?]

    분명 줄리안의 목소리일 테지만, 인식 방지 마법으로 인해 그냥 들어선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영상구에 비치는 청년, 벨벳가 방화 사건의 범인인 한스뿐이었다.

    줄리안은 원로회에서 주로 잡일을 담당했기에, 한스 섭외도 그의 몫이었다.

    그 성질머리에 순순히 원로들의 말만 따랐을 리도 없으니, 당연히 물고 늘어질 거리를 마련해 뒀으리라 짐작했고.

    없으면 증언대에 세울 참이었지만, 영상구가 있어서 피차 다행이었다.

    [시간 아까우니 긴말은 됐고. 이대로 사형 당하기는 싫지?]

    […….]

    [한 가지 증언만 해 주면 내 재량으로 널 살려 줄 수 있어. 네게도 나쁘진 않은 이야기일 거야.]

    한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직 죽이지 않은 벨벳이 남았잖아?]

    [그게 무슨…….]

    [시오라 벨벳이 흑마법사라고 증언해. 네게 저택에 불을 지르라고 최면을 걸었다고 주장하면 네 죄는 감형될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악마처럼 달콤했다.

    [그러면 넌 살 수 있어.]

    영상구의 재생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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