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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7화 (77/162)
  • 77화

    “아니, 내 말은.”

    크루엘로는 입을 열어 사람들의 이름자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뜬금없는 짓을 하나 했으나 줄리안은 곧 알아차렸다.

    그건 제가 원로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처리한 사람들이었다.

    공통점을 집어내자면, 모두가 악인이었다.

    구태여 줄리안이 도덕을 따졌다기보다는 검은 뱀과 엮인 이들 모두가 그랬기 때문이었지만.

    “이 이외에 죽인 사람이 있냐고 묻는 거야. 너무 큰 죄를 지으면 사형을 면하기 어려울 테니까.”

    “…….”

    “대답 안 하나? 자네의 마음은 검 주인만큼 애틋하지는 않은가 본데.”

    은근한 협박에 분기가 치솟는다.

    줄리안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처해 주지.”

    기다렸다는 듯, 공작은 눈을 기묘하게 빛냈다.

    위압적인 시선에 목덜미의 솜털이 하나하나 곤두섰다.

    “물론 자네가 목숨값 정도는 쥐고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

    무늬 없이 희고 깨끗한 침대.

    짙은 녹빛 머리칼의 여성은 반듯이 누워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눈꺼풀이 반짝 올라가더니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허억.”

    너무 놀라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마믹은 제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스스로를 달랬다.

    “별거 아니야, 그냥 악몽이야. 그냥 꿈이라고.”

    마믹에게 악몽은 익숙했다.

    레카논의 후인인 양 거짓말한 이후로, 틈만 나면 그것이 발각되는 꿈을 꿨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꿈에선 종교 재판이 열렸으며 그 피의자는 시오라 보네티였다.

    그녀는 검은 뱀 의혹을 받아 끌려갔고 마믹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면 굳이 악몽이라고 할 일도 아니었겠지만.

    “성녀님, 유감스럽지만 신전에서는 성녀님께서 시오라 보네티에게 협조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 아무것도 모를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에요, 전!”

    “신전을 떠나 주셔야겠습니다. 시오라 보네티와 함께 가십시오.”

    시오라와 한패로 몰려 처형장으로 향하는 꿈이라면, 악몽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아무리 애걸해도 제대로 들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럴 리 없어.”

    굳이 그녀를 음해하는 증인으로 나설 생각은 없지만, 옹호할 생각 또한 없다.

    제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겨우 진정한 마믹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으나, 그녀의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보안 때문인지, 감시 때문인지.

    ‘잠깐 나갔다 올까.’

    성기사를 대동하면 잠깐 정도는 산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를 좋아하지 않았고 귀찮은 일을 시키면 더 싫어할 테지만 어떤가.

    세상에 누가 저를 그렇게 좋아해 줬다고.

    결심한 마믹이 겉옷을 걸치려는 때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무심코 대답하려던 마믹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코앞이다.

    순찰 중인 성기사를 제외하고, 아무도 깨어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노크할 때 소속을 밝히는데.’

    혼란스러워하던 중, 두 번째 노크가 울렸다.

    똑똑.

    그쯤에서 마믹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는 소리를 한껏 죽이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조금 전의 악몽 때문인지 불길함이 치솟았다.

    자는 척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며 제법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똑똑똑똑똑똑똑!

    ‘뭐야, 대체 뭔데!’

    숫제 문을 부술 듯 두드려 대는 소리에, 마믹은 주저앉은 채로 귀를 틀어막았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소리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게 나을까?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급기야는 문이 열렸다.

    벌컥!

    악몽에 혹사당한 심장이 멎을 듯 쥐어 짜였다.

    “끼야아읍!”

    마믹이 곧장 입을 벌렸으나, 무언가가 날아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작게 소리쳤다.

    “아, 시끄러워! 누구 깨면 어쩌려고 그래!”

    “으읍?”

    그러라고 소리친 건데?

    마믹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그 와중에도 그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렸고, 그러자 상대가 바로 보였다.

    후드를 깊이 눌러썼으나 그 아래로 금발이 비죽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 진 얼굴은.

    “아니, 노크를 하면 대답을 하든 문을 열든 해야지? 무슨 성녀가 그렇게 매너가 없어?”

    “시오라 보네티?”

    말하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마믹은 휙 침입자의 후드를 벗겨 버렸다.

    심통이 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쓸데없이 예쁘게 생긴 여자는 분명 시오라 보네티였다.

    이 여자가 여기에 왜?

    지금 수배에 걸려 한창 도주 중이지 않나?

    혼란으로 가득 찬 마믹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헉!

    “혹시 나를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뭐?”

    시오라의 눈썹이 모로 기울었다.

    “너 혹시 저쪽에 편승하려고? 나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증언 준비하고 있었어?”

    “아, 아니! 아직 버티고 있거든!”

    “그래? 그러면 잘했어.”

    그녀는 곧바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순순히 믿는 모습이 그 나름대로 의심스러웠다.

    마믹은 시오라를 경계하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다시 눈을 동그랗게 되돌렸다.

    착해 보여야 했으니까.

    “밤중에 몰래 들어온 거라 길게 말할 여유는 없고.”

    “그런데 진짜 어떻게 들어온─.”

    “마믹, 너 전에 나 한 번 도와주기로 했었지?”

    “어? 아, 하지만 기록을 보여 줬잖아.”

    “그건 부수적인 거고 도와주기로 했잖아. 입 씻으려고?”

    “……뭘 바라는데.”

    “재판 열리면 사람들 앞에서 내 무고를 증언해 줘.”

    “미쳤어?”

    소리를 낮추어 말하던 것도 잊고 마믹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가 소리를 낮추었다.

    “종교 재판이 열리면 넌 그냥 끝이야, 끝!”

    “오올, 지금 걱정해 주는 거야?”

    “누가 걱정을! 됐어, 말을 말아야지.”

    “다른 재판으로 끌고 갈 거야. 생각이 있으니까 넌 그냥 약속이나 하면 돼.”

    할 거지?

    당연하다는 듯이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얄미울 만큼 예쁘다.

    마믹은 그걸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내가 왜?”

    삐딱한 답에 시오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 솔직히 저쪽에서도 증언해 달라고 압박받고 있거든? 그걸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널 도와주는 거 아냐?”

    “내가 왜 혼자 왔다고 생각해, 마믹?”

    그러게.

    무심코 생각하다가 마믹은 뒤늦게 음산한 분위기를 읽었다.

    아차, 그녀는 애써 눈꼬리를 끌어내렸다.

    “하, 하하, 농담이지, 물론.”

    “응, 나도 농담. 그런데 이건 진담이야, 내가 망하면 너도 함께 가는 거야.”

    “어?”

    “나한테 만약 검은 뱀 낙인이 찍혀 버리면, 네 정체를 까발리고 갈 거거든.”

    지금 이거, 대놓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겠단 건가?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멍하니 입을 벌린 마믹의 머릿속에 다시금 악몽이 떠올랐다.

    예지몽이었나.

    “물론 신전에도 알면서 눈감아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내가 재판장에서 폭로해 버리면 다 끝날걸.”

    “지금 나, 협박해?”

    “에이, 뭘 그렇게까지 이야기해. 내가 네 사기 건도 덮어 줬고 레카논 사건도 막아 줘서 입지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잖아?”

    “그건…….”

    “그리고 내가 전에 말은 안 했는데, 우리는 운명 공동체란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시오라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끝에서 흰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정체를 알아본 즉시, 마믹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성력?”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시오라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제 얼굴 앞까지 끌어당기고는 사기가 아닌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짜였다.

    “뭐야, 이게 어떻……. 잠깐만. 현 신전의 성력이 아닌 것 같은데?”

    “오. 어떻게 알았어. 일반인은 그런 거 구별 못 하지 않나?”

    “어? 그냥 알겠는데…….”

    “너, 혹시 신성력 같은 거 쓰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믹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안 그래도 명목상의 성녀로 행세하면서 눈치를 주는 사람이 많아 딴에는 노력했었다.

    혹 신성력이라도 발현되면 한 식구로 받아 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아무리 착한 척 웃고, 고대 교도의 교인들을 편입하려 애쓰고 사회봉사를 다녀도 마믹은 성력을 쓸 수 없었다.

    그래, 사기꾼에게 쥐여 주기엔 너무 고상한 힘이라 이거지.

    로 블루는 조금 더 노력해 보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으나 희망 고문이었다.

    저도 이젠 됐다고 코웃음 치고 포기했지만,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난 그런 거 못 써.”

    “저런. 드물지만 후천적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대. 한 번 써 보면 감 잡기 쉬울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됐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 봐.”

    “맞아, 현 신전의 성력은 아니야.”

    “그러면.”

    “나는 페불라의 교인이거든.”

    “어?”

    “그리고 너는 페불라 교인의 후손이지.”

    “어……?”

    잠깐만 그 이름자가 왜?

    난데없는 등장에 마믹은 재차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러…… 면 다 끝난 거 아냐? 교단별로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도 성력을 쓰는 사람이 네크로맨서라니 말이 안 되잖아.”

    “나도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는데 말이야, 바깥에서는 내 신을 악신이라 오해하고 있더라고. 어떤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굳이 불구덩이에 기어들어 갈 필요 없잖아?”

    “뭐!”

    “마믹, 여기서 계속 호의호식하고 싶지? 나도 마찬가지야.”

    이번에는 시오라가 마믹의 양손을 덥석 붙들었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용기를 내, 마믹. 우리의 운명을 함께 구원하자!”

    이 미치광이 또라이 같으니!

    팔을 빼내고 밀쳐서 쫓아 버리고 싶었으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가능했다.

    마믹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정치적인 힘도 무력도.

    그녀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

    “도착했습니다, 작은 아가씨.”

    “고맙다.”

    데이디어는 에스코트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화려하고 장엄한 황궁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건물의 외관을 훑듯이 살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피곤해.’

    되도록 칩거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림슨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황제의 탄일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건 의무였으니까.

    솔직히 그녀는 티파티나 무도회 등의 사교 행위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따금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건, 살펴보고 싶은 이가 있을 때뿐이었다.

    황실에 위협이 될 만한 위험 분자라든가 혹은 최근의 뜨거운 감자인 ‘시오라 보네티’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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