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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6화 (76/162)

76화

나는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가 참지 못하고 크루엘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상해요?”

“아닐걸요.”

뭐야, 이 애매모호한 대답.

좀 전에 ‘갔을걸’이라고 말했다고 뒤끝?

나는 눈을 찡그리고 익숙하게 그를 타박했다.

“‘아닐걸’이 뭐예요, 똑바로 말해야죠.”

“방금 달링도 그렇게 말해 놓…….”

딴지를 걸려던 크루엘로의 눈이 확 커졌다.

야행성 동물처럼 동공이 열려서는 그 눈으로 날 들여다봤다.

왜 저래.

“……아니요. 잠깐. 음. 또 이러면 안 되지.”

크루엘로는 큰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었고, 곧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여상한 얼굴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조차 안 가.

나는 그를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아, 재판으로 넘어갈 텐데 변호사를 구해야 하나요?”

“재판으로 끌고 가면 사형인데?”

“엥?”

“흑마법사가 엮이면 무조건 종교 재판으로 넘어가요. 그런데 종교 재판으로 가면 피의자의 발언권은 말도 못 하게 약하거든요. 발언할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크루엘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못 위압적인 기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엄숙히 말했다.

“시오라 보네티,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그러니까 저 말에 예/아니오로 답하는 게 전부란 거지?

“우와, 편협해.”

“레카논 때를 생각해 봐요. 갇혀서 조사만 받았지,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던가요?”

“하는 수 없죠. 그러면 재판은 다른 데에서 해야겠네요.”

“음?”

“사람이 많이 있는 곳. 그리고 신전에서 관여하기 곤란한 곳.”

대충 어떻게 항변할지 개요는 짰다.

나는 좀 더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크루엘로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단 움직여 보죠.”

빨리 일을 끝내고 죽은 듯이 자야지.

***

줄리안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장차 미네르바 후작이 될 그는 외모, 두뇌, 부, 능력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어린 날, 그런 칭찬을 들을 때면 아닌 척해도 마음 가득 우쭐함이 차올랐다.

그게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진.

“너 편견이 생기면 옆을 잘 못 보는구나.”

“네가 저평가하고 얕보던 상대가 실은 너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거야.”

“그런 편협한 머리로 무슨 마법을 하겠다고.”

목의 상처보다 그 말이 더 결정적이었다.

몹시도 속이 쓰렸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줄리안은 한 번 내린 평가를 번복해 본 적이 없었다.

강제로 생각이 뒤집혔던, 단 한 번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젠장.”

그는 가끔 생각해 본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가 아카데미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조금은 나았을까.

가장 민감하던 시절에 남들에게 추앙받던 재능이 태양 앞의 반딧불 꼴이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패배감을 배웠다.

아무리 이기려고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었다.

끝내 무력감에 좌절하던 때.

“크루엘로의 재능은 규격 외지. 그건 부러워할 게 아니야.”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백 년의 노력이 쌓였으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론 이길 수 없어.”

“그래도 그걸 따라가고 싶으냐? 하하, 욕심이 참 많구나. 좋아, 내가 좀 도와주마.”

“편법을 쓰면 가능성이 생기지.”

“다만 그 편법이라는 게 값이 꽤 비싸서 말이야. 간단한 심부름 정도, 도와줄 수 있겠지?”

좌절의 냄새를 맡고 뱀이 꼬여 들었다.

한 번도 넘어져 본 적이 없던 줄리안은 유혹에 손쉽게 걸려들었고 목 매인 짐승 꼴이 되었으며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는 목을 더듬었다.

딱히 이물감이 느껴지진 않으나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사슬 조각.’

그게 무슨 역할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자신을 그냥 놔뒀을 리는 없다.

원로회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저를 도울 리 없으니까.

오히려 저를 불러들인 이는 제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결국 남은 건, 이 비밀스러운 거처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적이 급습해 오길 기다리는 것뿐.

돌연 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방의 구석, 불을 켜지 않아 사방이 검었으나 그는 그 어둠에 사람이 파묻혀 있다는 걸 손쉽게 알았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줄리안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그를 주시한다.

“아아, 내 목에 꽂아 넣은 사슬 조각이 알려 줬나? 그것참 대단한 효능인걸.”

그는 아낌없이 이죽거렸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비굴하게 굴 까닭이 없다.

“그래, 내가 큰 실수를 했어. 그 대단하신 공작전하께서 쓸모도 없는 패를 끼고 다니진 않을 텐데 말이야.”

어둠에서 걸어 나온 크루엘로가 슬며시 웃었다.

그 순간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에 줄리안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버티려고 해도 부상 당한 채로는 그 시늉조차 무리였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줄리안에게 가까워졌다.

“사람을 용도로 판가름하는 건 스스로도 도구인 걸 인정하기 때문인가, 줄리안.”

으득.

“그렇게 치면, 자네는 참 형편없는 도구야.”

줄리안은 눈이 충혈될 정도로 거세게 크루엘로를 노려봤다.

그러나 떨리는 손만큼은 어떻게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솔직한 본심을 이야기하자면 그 또한 두려웠으니까.

이렇게 죽는 건가, 여기서?

각오한 줄 알았으나 부족했던가.

급작스럽게 치솟은 동요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줄리안의 눈에 무언가, 익숙한 물체가 들어왔다.

“그 검!”

시선이 향한 곳은 크루엘로의 허리춤.

거기에 걸린 건 분명히 데이디어 크림슨의 검이었다.

그게 왜 저기에?

“설마 데이디어를─.”

“좀 간단한 생각은 안 드나? 크림슨 경이 검을 내주었다든가.”

뭐?

줄리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확히는 내 약혼자에게 내어준 선물이지.”

“어…… 떻게.”

“그러게 말이야. 왜 크림슨 경이 아끼던 검을 내놓았을까.”

줄리안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굳었다.

종종 그런 의문이 들기는 했다.

데이디어 크림슨은 정말로 눈치가 없을까.

이따금 저를 보는 그 눈빛이 묘하게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리고 바로 어제.

하필이면 그 자리에 그 애가 나타난 게 우연이었을까.

치솟을 때마다 외면했던 의문에 대한 답이 이거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듣기론 꽤 미안해했다는 것 같아. 자네가 여기저기에 폐를 끼치고 다니는 걸 알았나 보지.”

“데이디어가…….”

“애당초 자네는 왜 원로회에 협력하는 거지?”

따분하다는 목소리에 약간의 호기심이 깃들었다.

그에, 줄리안은 정신을 차렸다.

왜 남의 사냥개 노릇을 하느냐고? 그건 제게 걸린 올가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올가미를 목에 걸게 한 것이 눈앞의 저 사내였다.

줄리안은 마나를 확 일으켜 크루엘로의 기세를 떨쳐 내고 물러났다.

그러고는 서둘러 품에 손을 넣어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안에 든 건 흰 알갱이 더미.

선천적인 재능으로 상대할 수 없다면 편법을 쓰면 된다.

그리고 그 편법으로 제시된 게 베아티투도였다.

그래, 눈앞의 괴물을 상대하려면 이런 게 필요했다.

“손에 쥐고 쓰는 건 한계가 있어. 최대 3g밖에 못 쓰거니와 그것조차 너무 위태로워서 까딱하면 몸이 터질 테니까.”

“그…… 러면.”

“아무래도 먹어서 쌓는 게 좋겠지.”

줄리안은 베아티투도 한 움큼을 쥐고 금방이라도 털어 넣을 것처럼 입 가까이에 댔다.

그러나 차마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그 유혹을 들어 온 이후, 처음으로 베아티투도를 받은 이후로 줄곧 그랬던 것처럼.

크루엘로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느리게 입을 떼었다.

“베아티투도를 알게 된 초반에는 꽤 의문스러웠지. 그토록 손쉽게 힘을 부풀릴 수 있는데 왜 교단에서는 쓰지 않을까.”

크루엘로가 궐련 하나를 꺼내 끄트머릴 자르고 입에 물었다.

“생존에 목을 매는 아레스도, 편법을 즐기는 큐딜도, 원로 자리에 올라가려고 아득바득 애를 쓰는 교인들도 모두가 손을 대지 않더라고.”

그 끝을 손으로 비비자 새빨간 불씨가 궐련에 달라붙었다.

공간은 삽시간에 새하얀 연기로 가득 찼으나 줄리안은 속이 매캐한 줄도 몰랐다.

“다루기 어려워서? 그러면 아주 극소량을 쓰지 않고 어째서 그럴까.”

사내는 천천히 걸어 줄리안에게 다가왔다.

“답은 신전의 실험일지에 있더군.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부작용이 난다고 하던가.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몸이 터지거나 인격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뇌가 망가지거나. 뭐, 정신력이 극도로 강하면 그런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한 걸음 반.

그 애매한 간격을 사이에 두고 크루엘로가 걸음을 멈추었다.

“공통적으로 나타난 증상은 그래, 자력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던가.”

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지, 공작의 무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과 기름을 섞으면 기름이 떠오르는 법이잖나.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여야 할 입구가 막혀 버리면 마법사로는 끝이지.”

“…….”

“손대면 안 되는 물건이었어.”

그렇지?

되묻는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미묘하게 신경질적인 기색이 섞여 있었고 크루엘로의 미간에도 살짝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줄리안에게 향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 자네는 아직 쓰지 않았나 봐. 자존심 때문이었나?”

속삭이는 말이 정곡을 찌른다.

두렵기도 했으나 그쪽이 더 큰 이유였다.

그래, 그깟 물건에 의존해서야 이자를 이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줄리안은 그 시간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러나 이 꼴이 되어서도 차마 삼키지 못한 걸 보면, 애당초 먹지 못할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크루엘로가 줄리안을 조롱하듯 픽 웃었다.

“그 애잔한 자존심만은 높게 쳐 주지.”

“……닥쳐.”

“그러면 더 그 꼬리에 붙어서 애걸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

“잡일 담당. 끄나풀의 끄나풀. 밟아 죽여도 들여다보지 않는 한 모를 조그만 버러지. 그런 취급이 즐겁나?”

크루엘로는 피우던 궐련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구둣발로 그것을 짓밟는 소리가 줄리안의 귓가에 생경하게 울렸다.

“줄리안, 여태 몇이나 죽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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