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75화 (75/162)

75화

“하루 늦었지만, 그건 그쪽이 지각한 책임이니까 내 탓 아니고.”

“아…….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그것도 모를 거라 나를 얕보는 거예요, 아니면 약혼자의 생일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달링의 생일은 알아요. 6월 13일이잖아요.”

그렇군, 시오라의 생일은 6월 13일.

나는 몰랐다.

“추궁하려던 건 아니고. 음, 고마워요. 고맙게 쓸게요.”

크루엘로는 다소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검을 받아 들었다.

검집을 나온 칼날이 햇빛에 예쁘게 반짝이자 괜히 뿌듯해졌다.

반응은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했지만, 좋아하는 걸 안다.

에이미 때도 검을 선물하려다가 죽었었지.

몇 년 만이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줬다!

내가 주문 제작을 한 건 아니지만, 아무렴 이게 더 비싸…….

음.

“……검집은 바꾸는 게 좋겠어요.”

나는 넌지시 조언했다.

왜 쓸데없이 검집에 가문의 문양 같은 걸 새겨 놓은 거람?

하여튼 크림슨 공작가, 쓸데없는 짓을 해 놨어.

크루엘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

병사들을 따돌리고 옮겨 온 곳은 크루엘로의 새 아지트였다.

이 김에 마련했다고 한다.

그가 공간의 좌표를 등록하고 이런저런 방비를 해 두는 동안, 나는 소파에 축 늘어져 그 모습을 구경했다.

마법사란 내 생각만큼 편리하지는 않군.

물 아래에서 끊임없이 발을 휘젓는 백조가 생각났다.

나는 다시 페불라와 잘해 보기로 했다.

“좀 더 여유를 부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달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겠죠?”

작업을 마치고 크루엘로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은 내가 왜 검은 뱀 의혹을 받는지부터 알아야겠네요.”

“제보가 있었대요. 황실에선 제보자를 숨겼지만, 하루쯤 쓰니까 그래도 알아냈어요.”

“누구예요?”

“엘린 럴러바이요.”

뉘신지.

“나이젤리아의 손녀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현재 나이젤리아는 실종 상태라 그쪽 증언은 없고요.”

“2원로는 미혼 아니에요?”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딱히 의심하지도 않는 게.”

크루엘로는 말끝을 접으며 테이블에 구슬을 올려 두었다.

저번에 본 통신구랑 비슷하게 생겼으나 크기는 그 두 배 정도에 색이 녹빛이다.

기존에 있던 일을 재현하는 영상구였다.

곧 구슬 위로 형상이 비쳤다.

장소는 저번에 갔던 황태자의 집무실.

대각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시야에, 적갈색 머리칼의 여성이 보였다.

그 얼굴은 그야말로.

“젊은 나이젤리아 같네요.”

“말대로예요. 검증해 본 결과, 마법으로 외관을 바꾼 거도 아니었고요.”

“그렇다 쳐도 엄청엄청 수상한데요. 관련도 없는 저를 물고 늘어진 것도 그렇고.”

“한번 봐요.”

크루엘로가 영상구를 두드리자 멈춰 있던 여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는 무릎을 꿇어 상대에게 예를 갖추었다.

아마도 황태자인 듯싶었다.

[만남을 허락해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시 소개드립니다. 저는 나이젤리아 할머님의 손녀인 엘린입니다.]

[소개는 됐네. 중요한 제보라는 게 뭔가.]

[제가 황태자전하께 귀중한 만남을 청한 건, 제 할머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본론은 깔끔……. 뭐? 누구?

[그분이 바로 검은 뱀 교단의 교주십니다.]

어라? 어라라?

궁금한 건 잔뜩 부풀려 놓고 영상구가 비춘 건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빈 구슬의 표면에 입을 벌린 내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합, 체통을 지켜야지.

“교주 같은 게 있었어요?”

“몇 대 전에 사라진 직함이지만, 실질적인 영향력만 따지면 맞는 말이죠.”

“으으음. 그런데 고발당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 나이젤리아인데?”

“시오라 보네티는 교주에게 정식 가르침을 받고 있던 그 후계라던걸요.”

나이젤리아의 시험을 이렇게 엮었나?

어처구니가 없다.

“그 가르침을 보네티에서 전해요? 보네티가 죽음의 정령을 섬겼나 보네요.”

“은밀한 전수를 위해 그랬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뱀 반지가 교주 전용이라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물렸군.

어쩐지 딜런이 놀라더라.

근데 잠깐만 그 반지가 교주 전용이면 어떤 원로가 배신했는지는 왜 물어본 거야?

나는 딜런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냈다.

소소한 추리는 접어 두고 일단 이야기를 더 듣기로 했다.

“뒷받침하는 증인도 있어요.”

크루엘로가 손가락을 하나 펼쳤다.

“첫 번째, 한스. 벨벳 방화 사건의 범인이었죠.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집행이 멈췄고, 흑마법에 조종당해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물론 그 배후는 달링이고요.”

“허…….”

“두 번째, 코튼 내로우. 그때 달링을 잡으러 온 황실 기사예요. 자기가 교인의 복장을 한 걸 두 눈으로 목격했죠.”

이건 할 말이 없다.

“세 번째, 엘린 럴러바이. 달링이 받은 시험 내용을 문서로 정리해 가지고 있어요. 그걸 토대로 세부적인 가지를 더 뻗었는데.”

“아, 하나 짐작 가는 거 있어요. 내가 로 블루를 빼돌려 꼬리 자를 시간을 벌었다? 그런 거?”

“폭도 소동을 일으켜 레카논의 성물을 바꿔치기했다는 주장도 있어요. 그때, 폭도의 대장이 달링을 콕 집어 성물을 운반시킨 게 그것 때문이라고요.”

크루엘로는 이어 네 번째 손가락을 펼쳤다.

“마지막, 마믹. 이쪽은 현재 포섭 중인 걸로 알아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원래 심지가 강한 사람은 아니라서?”

못 믿겠다는 소리군.

“작정하고 들어왔네요. 그러면 그렇지, 교단 청소는 개뿔.”

“내 실책이에요.”

“안다니 대책도 있겠죠?”

“사과할 겸 깔끔하게 처리해 놓을게요.”

“어떻게요?”

“증인을 다 죽이면 돼요.”

뭐 저렇게 살벌한 농담을 해.

어이가 없어 그를 째려봤으나, 크루엘로의 눈은 담담하기만 했다.

“진짜?”

“죽여서 안 될 사람이 있나요?”

“……우리 평범하게, 정석적인 돌파법부터 찾아볼까요?”

나는 간만에 크루엘로를 가르칠 때의 말투를 썼다.

불쾌했는지 그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내가 악마가 아니라 신을 섬기는 이상 할 수 없다.

무고한 사람도 둘이나 껴 있는데!

“비밀 조사관은 증언을 안 해 주겠죠? 내가 구해 줬는데.”

“힘들 거예요.”

“그렇구나. 사실 성력을 쓰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긴 한데 그래서 수상하네요.”

줄리안 같은 바보는 연결 짓지 못했지만, 나이젤리아는 분명 성력을 퍼부어 대던 게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알면서 구태여 이런 판을 짰다는 건, 내 대책을 파훼할 방법이 있다는 거 아닐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나이젤리아와 엘린이 다른 편이라, 정보 공유가 덜 된 걸 수도 있지만.

직감이 굉장히 좋지 않았기에 그 방법은 최후로 미루기로 했다.

“달링의 의견을 존중할게요. 그런데.”

크루엘로는 드물게도 무언가 망설이듯 말하다 말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시선을 바닥에 내려 둔 채로 느리게 말을 꺼냈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말해 봐요.”

“본거지에는 왜 혼자 들어갔어요.”

“아, 그건……. 인질이 잡혀 있어서.”

정확히는 인질이 잡혀 있는 줄 알아서였다.

돌아보니 조금, 아주 조금 창피한데.

그 입에서 독설이 나오기 전에 나는 선수 쳐 말했다.

“알아요, 멍청했죠. 눈이 뒤집혀서 더미에 속다니.”

“아니요, 속은 걸 탓하는 게 아니라요. 왜 가보트 보네티를 위해 거기까지 들어갔냐는 거예요?”

“네?”

“설사 진짜가 잡혀 있었더라도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사람인가요?”

음, 그건 나도 모르는 문제다.

실제로 신전으로 가면서도 같은 고민을 했었다.

이성적으로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은 멋대로 움직였고.

아무리 이 몸이 내 몸이 아니라고 한들, 아직 반년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목숨을 거는 건 확실히 이상하다.

이 몸에 걸린 생명의 무게가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역시 내가 이상한가?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자, 크루엘로는 눈동자만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유독 그 눈에 음영이 져 있었다.

“가보트 보네티를 좋아해요?”

“네?”

얼떨떨하게 반문했다가 뒤늦게 질문의 뜻을 알아들었다.

진짜? 이 상황에 그딴 질문을 했다고?

“잠깐, 그러니까, 내가 가보트를, 그 이성적인 의미로?”

“네.”

“미쳤어요? 아니, 이건 진작 자백을 들었지.”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질 수밖에 없는 질문을 지웠다.

“저는 금단의 영역에 관심 없어요. 제 이름 뒤가 ‘보네티’인 거 기억하죠?”

“피도 안 섞였고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런 게 중요한가요.”

“그건 가족한테 실례되는 말이니까 기억해 둬요.”

“그러면요.”

크루엘로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질문을 이어 갔다.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까요?”

“다른 사람. 누구요? 미뉴엣?”

상상도 안 된다.

잡히는 것도, 내가 미뉴엣을 구하러 가는 것도.

천년 묵은 악당쯤은 나와 줘야 그림이 그려지겠는데.

그러나 크루엘로는 미뉴엣이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고, 입매를 늘였다.

그리고.

“나라면요?”

“어…….”

그 자리에 있는 게 크루엘로였다면 어땠겠냐고?

당황해 혀가 굳은 나를 향해, 그가 재차 물었다.

“나라면 왔겠어?”

“갔을…… 걸.”

대답은 모호하게 했지만, 그 반대다.

오히려 머릿속에 그 그림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상상 안에 그려진 그는 다 자란 채였다.

로이면 모르겠는데, 성인판 크루엘로면 빈말로도 약하다는 소리는 안 나온다.

구하러 가는 모습이 미뉴엣보다 상상이 안 가야 정상 아닌가?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분명 거짓말인데 거짓말 같지가 않네.”

“…….”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물론 달링의 가족들도 그럴 거예요. 성인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한결 개운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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