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크림슨 산 방패를 잃었기에, 나는 일단 무작정 걸었다.
최소한 윈터벨 남작가 부근은 벗어나야 했다.
날은 최근 중에는 가장 따뜻했고 갈색 로브엔 털이 복슬복슬 달렸으며, 돈도 검도 있어 속이 두둑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목적지는 없었다.
“으으음.”
숨겨 달라고 찾아갈 친구 하나 없다니 울적하군.
따뜻한 집이 그립다.
보네티의 내 침대가 정말정말 보고 싶었다.
곁다리로 보네티 남매가 어떻게 지낼지도 궁금했다.
설마 내가 검은 뱀이라는 그 얼토당토않은 헛소릴 믿고 있진 않겠지?
나는 휘휘 고개를 젓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나보다 몇 걸음 앞에는 도톰한 털옷을 입은 여자가 걷고 있었는데 두 명의 병사가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
어라, 무언가 느낌이…….
“정지. 얼굴을 보이시오.”
“예?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수배 중인 죄인이 있소. 모자만 벗으면 되오.”
어우, 진짜. 생각할 시간은 좀 줘라!
속으로 아우성치면서도 나는 슬금슬금 게걸음을 걸어 옆쪽에 난 골목으로 빠졌다.
커다란 상자 더미가 있길래 그 뒤에 숨어 쭈그리고 앉았다.
안이 비어 보여서 기대진 못했다.
“후우.”
수배 중인 죄인이라는 거 누가 봐도 나지?
내 앞에 걷던 사람이 딱 나만 한 체구의 여자라 더 확신이 들었다.
황실에서 손 놓고 기다리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직접 보니 울적하네.
“어쩔까.”
성력을 쓰면 도망 다니는 게 어렵진 않다.
다만 최근 꽤 빠듯하게 살아왔다.
슬슬 체력도 아슬아슬했고 감기에 걸릴락 말락 한 모호한 한기도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면 최악이지.
일단은 조금만 더 맨몸으로 버텨 보자.
그렇게 생각하던 때, 툭 튀어나온 외벽을 걷던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조그만 털짐승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어.
“……야옹아?”
그리고 시작된, 작지만 힘찬 도약!
야망 넘치는 어린 짐승은 대번에 상자 더미의 꼭대기를 노렸다.
조그맣고 날쌘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지났다.
그리고 예고된 불행이 덮쳐 온다.
냐아아앙!
고양이의 높다란 비명에 이어 상자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가림막은 사라지고 보란 듯 주의가 끌렸다.
돌처럼 굳은 채 그냥 못 들었기를 바라 봤지만.
“어이, 거기!”
역시 그럴 리는 없었다.
나, 혹시 운이 나쁜가?
갑자기 고양이가 튀어나와서 이목을 끄는 게 말이나 돼?
차라리 저 고양이가 마법에 걸려 일을 벌였다면 이해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동물이었다.
신수가 아닌 그냥 고양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얻었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페불라밖에는.
페불라시여, 혹시 저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골목에서 뭘 하고 있지? 검문 중이다, 당장 나와서 얼굴을 보여!”
선배 신도들이 지옥 옆자리에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 놨을 것입니다!
병사가 골목으로 들어온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휘이익, 신호음이 높다랗게 터지더니 추격자가 삽시간에 대여섯 명으로 불어났다.
“서라!”
“미치겠네, 진짜!”
실수했다.
그냥 데이디어를 인질 삼아 윈터벨에서 죽자고 버텨야 했어!
나오자마자 이게 뭐야, 최소한 아침이라도 먹고 나올걸!
나는 성력을 쓸까 말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며 달렸다.
그러나 번뜩 떠오른 것이 있어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빛나는 반지가 두 개.
“운이 나쁜 게 아니라 머리가 나쁜 건가?”
여태껏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자부해 온 건 순전히 내 착각?
아, 아니다.
이게 내 몸이 아니라서 그래.
남의 몸살이를 오래 해서 후유증이 생겼을 뿐이다.
나는 휙휙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 버리고 반지를 쓸 적당한 타이밍을 노렸다.
마침 골목을 꺾어 돌아갈 길이 생겼다.
코너를 돌면 잠깐이나마 병사들에게 보이지 않을 테니 그 틈에 써 버리자.
금방이라도 잡힐 듯 간격이 좁아졌고 나는 다리가 터지도록 내달려 코너를 꺾었다.
“도망칠 수 없다, 멈춰!”
그 순간 바로 앞에 길쭉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반지를 문지르려 했다.
하나 그 순간, 그자가 내 손가락을 얽어매며 붙잡고는.
“그 근방에 사람 깔렸어요.”
“어…….”
짧은 속삭임 끝에 그가 내 허리를 낚아채어 훌쩍 뛰어올랐다.
눈 깜짝할 새 나는 옆에 있던 집의 지붕에 올라와 있었다.
“흐하하, 그쪽은 막다른……. 뭐야! 어디로 사라진 거지?”
한 번에 그치지도 않았다.
사내는 지붕과 지붕 사이를 손쉽게 뛰어넘었고 마침내는 시야를 가릴 만한 큼직한 굴뚝 뒤로 숨었다.
굴뚝에 기대듯이 앉아 나를 바로 앞에 내려 두고, 그는 아래쪽의 동태를 살폈다.
병사들은 내가 사라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놓쳤어? 젠장, 기사님들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됐는데.”
“게이트 연 거 아니에요? 수배 전단에 마법사일 확률이 높다고 적혀 있던데.”
“게이트 탐지기엔 걸린 게 없습니다. 일단 근방부터 뒤져 보죠.”
수군거리며 대책을 논하더니 그들이 다시 사방으로 갈라졌다.
음, 이 와중에 나는 게이트 탐지기가 뭔지 참 궁금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비싼 거예요. 게이트가 열렸는지 여부와 출구 좌표를 추산해 주거든요.”
“웬일로 게이트를 안 연다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건 아니에요. 솜씨가 어중간한 마법사나 흔적을 남기는 법이라서.”
“그러면요?”
“제가 외워 두는 공간 좌표를 다 들켜서 전부 감시받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삭막한 정보 교류보다 우리 안부부터 묻는 게 어떨까요?”
사내는 제가 쓰고 있던 후드를 시원스럽게 벗었다.
하늘색 머리칼이 산들바람에 가볍게 흩날리고 햇빛을 직접 받은 얼굴이 과하게 반짝인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였다.
진짜, 정말, 왠지 올 것 같다는 기대감에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라 본체 크루엘로.
이어 그는 내 후드도 제 것처럼 벗겨 냈다.
“이틀 만이에요, 달링. 잘 지냈, 음, 고생이 많았나 보네요.”
크루엘로가 맑게 웃었다.
마침 부는 바람 때문인지 그 표정이 퍽 청량해 보였다.
보네티도 아니면서.
이유 없이 잠깐 동안 숨이 멈췄다.
가슴이 이상하게 뭉클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입을 삐죽였다.
“내 꼴이 그렇게 너절해요?”
“달리는 걸 보니 힘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윈터벨에서 대접한 식사가 변변찮았는지.”
“메리엔은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내가 거기 간 건 또 어떻게 알았대.”
“길드에 가 봤더니 쪽지가 사라져 있더라고.”
어디에 뭘 뒀는지 훤히 꿰고 있는 건가.
하기야 담요와 마시멜로 등을 꺼내는 손길에도 머뭇거림은 전혀 없었지.
크루엘로의 기억력은 인정할 법했다.
“실은 윈터벨에 꽤 머무를 줄 알았어요. 그래서 급하게 찾아가지 않고 다른 조사를 좀 했는데, 음.”
“됐어요, 내가 애도 아닌데 알아서 잘 있었거든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침에 윈터벨 남작가에 나왔다길래 부근에서 가만히 기다렸죠. 아니나 다를까, 곧 소란이 일더라고.”
난데없이 고양이가 방해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무어라 뾰족한 말을 뱉어 내려고 했으나.
“미안해요, 수고했어요.”
입이 그대로 다물렸다.
에휴.
말 대신 나온 건 기다란 한숨이다.
동시에 내내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쭉 풀렸다.
애써 펴고 있던 허리가 무너졌고, 나는 기대듯 크루엘로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가 움찔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몰라.
“……달링?”
“잠깐만.”
포근하진 않다.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품이 넓긴 하지만, 딱딱하고.
이 겨울에 옷은 또 왜 이리 얇게 입은 건지, 체온도 별로 따뜻하진 않다.
그리고 향이 난다. 크루엘로의 체향.
어느 하나, 크게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가슴을 채우는 건 그리움이다.
아니라고 말은 해도 내가 이 애를 많이 기다렸나 보다.
필요할 때마다 불쑥불쑥 나타나 대서 그런지, 아니면 일부나마 중요한 이야기를 공유한 파트너라 그런지.
물론 크루엘로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관계였다.
에이미 때의 크루엘로는 무조건 보듬고 사랑을 퍼부어야 할 아이였고, 비가 때는 옳은 걸 가르쳐야 하는 10대 중반의 사춘기 소년이었다.
에이미로 빙의할 때 나는 이미 성인이었기에, 도무지 크루엘로가 동등한 상대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성인이 된 지금은 기분이 다른 거겠지.
나쁘진 않다.
크루엘로가 모든 걸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 무거운 짐의 일부나마 나눠 질 사람이 있다는 게 퍽…… 괜찮았다.
나는 감정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쪽지에 적힌 암호, 다 해석했었어요?”
“윈터벨 남작가의 다락방, 맞나요?”
“……아리스타타는.”
“전전대 윈터벨 남작이 즐겨 기르던 꽃이라 그 남작과 관련 있지 않을까 했는데, 웃는 거 보면 아닌가 보네요.”
줄리안이 태연하게 찾아온 걸 보고, 누구나 아는 걸 나만 힘들게 알아냈나 불안했는데 역시 그게 아니었군.
내가 이겼다.
승리감에 만족하며, 나는 그간 있던 일을 간단히 요약했다.
줄리안 미네르바가 찾아왔다.
비밀 조사관이 접선 장소에 나왔다.
그게 데이디어 크림슨이었다.
“그건 좀 놀랍네요.”
“하나도 안 놀란 목소린데. 음, 그리고…….”
정리하니까 별거 없네.
뿌듯한 성취감을 느낀 건 청소 때가 마지막이었던 듯싶다.
머쓱해하며 허리를 펴는데 허리춤에 덜그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제일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나는 퍼뜩 소리쳤다.
“선물!”
로브를 젖히고 안쪽 허리춤의 혁대에 묶어 둔 검집을 당당히 꺼내 들었다.
크루엘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새거는 아닌데 좋은 검이에요.”
내가 이래 봬도 검 보는 눈이 좋다.
지금은 하나도 없지만 내 신전에는 명검도 여럿 걸려 있었고 그 소유주는 다 나였으니까.
비록 질 나쁜 검을 접해 본 경험이 없다는 귀여운 단점이 있었지만, 아무렴 크림슨 공작가의 차녀가 허접한 걸 들고 다니겠어?
“데이디어 경을 협박, 아니 협조해서 얻었어요.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음, 그러니까 나한테?”
왜?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이다.
바본가.
나는 한심해하는 기색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다.
“생일 축하한다고요, 크루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