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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3화 (73/162)

73화

“너 편견이 생기면 옆을 잘 못 보는구나.”

그간의 어설픈 수작질들만 들여다봐도 줄리안이 나를 얕봤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그의 입에서는 좀 더 명확한 말이 나왔다.

크루엘로의 장난감.

그 칭호를 떠올려 보니 줄리안의 내면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네가 저평가하고 얕보던 상대가 실은 너보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거야.”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넘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스스로를 과신하는 타입이다.

그저 머리가 덜 자라 그럴 수도 있었지만.

줄리안의 뺨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 편협한 머리로 무슨 마법을 하겠다고.”

으득!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그의 목에 핏대가 단단히 섰다.

물론 무서울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혀가 계속 길어지는 건, 줄리안의 얼굴이 여전히 어려 보이기 때문이었고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여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음, 아닌가.

어제 그 소란에서 몇몇은 확실히 죽었을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을 다잡기가 조금 수월했다.

어차피 나를 여기로 인도한 것 또한 어느 정도는 페불라의 뜻이겠지.

“다음 생엔 좀 착하게 살아라.”

페불라시여, 어린놈 갑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슬에 더 힘을 불어넣으려던 때.

“……래도 놀랐어요, 굉장히 오래간만에 찾아 주셨잖아요.”

문 바깥에서 메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그녀를 포함하여 두 명의 사람이 다락방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깐만, 그러면 지금 줄리안을 죽이기 곤란해지는데. 왜 굳이 이쪽으로?

당황하여 몸을 굳힌 것이 줄리안에겐 기회가 되었다.

그가 눈을 번뜩 빛내더니 돌연 문 쪽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신관이란 것들이 그렇지.”

양손으로도 겨우 버티던 사슬을 한 손으로 당해 낼 리가 없다.

줄리안의 왼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식간에 기다란 장미 덩굴을 피워 내고는 다락의 문 쪽으로 날려 보냈다.

사슬로 붙잡기엔 이미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인질을 잡으면 옴짝달싹도 못 하는 머저리 같으니.”

그건 인질을 잡고 나서 할 말이지.

나는 그 줄기를 막는 걸 포기하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어차피 마법사가 죽으면 마법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의지가 실린 사슬이 줄리안을 향해 포악스럽게 달려들었다.

그의 넝쿨이 다락문을 꿰뚫기 직전, 그리고 내 사슬이 줄리안의 목에 닿기 직전.

“혹 내가 떠나보낸 하녀 아이가 아닌가 싶어서. 사과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의 마법도 내 주문도 허공에 멈추었다.

이 목소리는…….

“데이디어 크림슨?”

혼잣말로 중얼거린 소리에 줄리안이 움칠 떨었다.

착각이 아니라는 듯이 데이디어의 목소리는 점차 선명해졌다.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메리엔.”

“안 들어드리면 남작님이 가만 계시지 않을걸요. 그게 아니었어도 경의 부탁은 당연히 들어드렸겠지만요. 아, 저기가 다락방이에요. 사다리로 올라가시면 돼요.”

“데려다줘서 고맙다. 미안하지만 이야기는 둘이 하고 싶어서 자리를 비워 주면 좋겠는데.”

“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게 맞는 것 같지만요. 알았어요, 경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게요.”

“고맙다.”

대화 끝에 누군가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황상 데이디어 크림슨이 틀림없다.

우와, 어떡해?

나는 문을 쳐다봤다가 줄리안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 또한 나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나 이상으로 당황했는지 얼굴이 희게 굳어 있었다.

인질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제 친구한테는 진심인 건가.

어렴풋이 그의 인적사항 정보가 떠올랐다.

「데이디어 크림슨과 소꿉친구,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각별한 관계니 데이디어를 언급할 때 주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더니, 크림슨 공작가의 권력 때문에 꾸며 낸 모습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 인질 걱정은 없다 쳐도.

“끄응.”

이 상황에서 줄리안을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뒤처리는 다른 문제다.

데이디어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 그 시체까지 깔끔히 처리할 방법은 전무.

하는 수 없이 나는 임시방편만 해 두기로 했다.

“윽!”

사슬 조각 하나를 그의 목에 밀어 넣고 나는 작게 속삭였다.

“꺼져.”

네 친구 때문에 살아남은 줄 알아라.

줄리안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잠금쇠를 풀지 않고 창문을 열려던 것만 빼면.

저봐, 저. 분명히 저놈 발목을 잡을 줄 알았다니까.

어쨌거나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줄리안은 잽싸게 사라졌고 그러자마자 다락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나는 침착하게 말하며 내 목소리가 퍽 태연하게 들린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데이디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걸 본 순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하!

그러고 보니 나도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군!

망했다.

나는 들어오세‘요’라고 말한 입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며 굳어 버렸다.

데이디어가 무슨 말을 할까.

긴장하며 그녀의 입술만 쳐다보는데 의외로 데이디어는 별말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할 말을 고르듯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다락방 안을 느리게 훑어보았다.

열린 창문, ─피 묻은─카펫, 침대 매트리스와 로브가 걸린 행거.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다.

어라, 잠깐만.

생각한 것이 입 밖으로 그대로 흘러 나갔다.

“혹시 데이디어가 직속 선배예요?”

데이디어 크림슨이 한층 짙어진 시선으로 나를 봤다.

그러더니 곧 옅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저 로브가 조사관에게 받은 물건이 맞습니까?”

“어…….”

“보네티 백작저에도 찾아가 봤으나 그 로브에는 아무런 처리도 되어 있지 않더군요.”

달리 해석의 여지도 없는 완벽한 시인이다.

와우, 요 근래 중 제일 놀랐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 자리에 아무도 나오지 않을 거란 말을 들었는데 말이에요.”

“그러려고 했습니다. 윈터벨 남작가에 정말로 새 사용인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요.”

데이디어가 로브 쪽으로 한 걸음 걸어가기에 나는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눈가를 좁혔다.

“레이디 시오라.”

“아, 물론 저건 황실에 넘기려고 가져온 게 맞아요. 난데없이 수배가 걸린 걸 보복한답시고 안 드리겠다는, 그런 결정은 아니고요.”

나는 뼈 섞인 말을 내뱉으며 한 박자 쉬었다.

하지만.

“제보하는 입장으로서, 저도 안에 든 내용물을 알아야겠어요.”

“황제폐하께서만 아실 일입니다.”

“제가 없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단서라도요?”

“그렇다면 차라리 불태우십시오. 받지 못한 셈 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이디어는 돌아섰다.

어쭈.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대단한 원칙주의자시네요. 방금 줄리안 미네르바는 모르는 척하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데이디어의 걸음이 멈추었다.

잠깐 숨을 들이켜는 모습도 분명히 보였다.

“상식적으로 그렇죠? 비밀 조사관이면 마나 감지 연습은 지겨울 만큼 하셨을 것 같은데, 바로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실 리 없잖아요.”

“저는…….”

“줄리안도 경의 목소리가 들리니 당황해서 도망치더라고요. 비밀 조사관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데이디어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으나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로브를 쥐고 물었다.

“여기 적힌 거, 알려 주실 거죠?”

“…….”

“제가 교단의 끄나풀을 고발하는 게 싫으시다면요.”

“……알겠습니다. 대단한 정보가 적혀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믿을게요. 경의 그 애틋한 우정을요.”

데이디어는 한숨을 내쉬며 로브를 받아 들었다.

좋아, 내가 기세를 잡은 것 같으니까 좀 더 털어 보자.

“그리고 저 애당초 접선 때문에 온 거라 슬슬 이 집을 나가 봐야 하거든요.”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단 말이에요.”

“받으십시오.”

데이디어가 제 돈주머니를 풀어 던져 주었다.

내용물은 꽤 묵직한 듯했지만 음, 순순히 주니까 괜히 아쉽네.

아, 맞다.

“그리고 그 검도 멋있어 보이네요.”

“……다 가져가십시오.”

나는 데이디어의 검까지 손에 쥐고야 만족할 수 있었다.

크루엘로, 네 생일 선물 생겼어!

***

위치를 들킨 이상 나가야 했으나, 밤중에 머무를 곳 없이 돌아다니는 건 너무 체력 소모가 컸다.

대비차 나는 데이디어를 붙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윈터벨 남작저를 나섰다.

로브는 데이디어에게 줘 버렸고 사제복을 입고 다닐 순 없었기에, 메리엔에게 옷을 얻어 입었다.

물론 값은 치렀다, 데이디어가.

“겨우 하루 만에 나가다니 아쉽구나. 크림슨 공작가로 간다니 네겐 잘된 일이겠지만.”

메리엔의 두 눈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에게 둘러댄 핑계는 이랬다.

나는 원래 크림슨 공작가에서 일하던 하녀인데 사소한 오해로 쫓겨나 새 일터를 찾았다.

그런데 뒤늦게 오해를 푼 데이디어가 나를 달래서 제자리로 돌아갈 예정이다.

과거, 윈터벨 남작이 데이디어에게 신세 진 것이 있대서 일은 원활히 풀렸다.

“양해해 줘서 고맙다. 남작께도 안부 전해 주길 부탁한다.”

“아무렴요.”

정이 많은 사람인지, 메리엔은 마지막 인사차 나를 포옹했다.

“혹시 나올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렴.”

정이 많은 게 아니라 스카우트였군.

귓속으로 들어온 속삭임에 나는 웃고 말았다.

역시 인재는 굶어 죽을 일이 없다니까.

골목 밖에는 크림슨 공작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디어가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원하는 곳까지 태워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아직 황궁에 가고 싶진 않다.

내가 약점을 잡았다고 한들 황실 소속을 어떻게 믿는담.

데이디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정말 표정에 훤히 드러나시는군요.”

진짜?

흠칫하여 후드를 깊이 눌렀다.

“농담입니다.”

“저기요.”

“제 몫이 아닌 업무를 즐겨 하는 취미는 없으니까요.”

또 뵙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데이디어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멀어져 가는 차체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성격이 은근히 재수 없네.”

차라리 눈치 없는 척할 때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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