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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2화 (72/162)
  • 72화

    메리엔은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해 주었다.

    “지하실? 창고로 쓰는 게 있다만 거기까지 치울 필요는 없단다. 그쪽은 필립스 담당이거든. 그마저도 한 달에 두어 번 치울까 말까고.”

    “그냥 궁금해서요. 집이 다 멋있더라고요.”

    “딱히 별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네가 궁금하다면야 열쇠를 주마.”

    “저,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혹시 수도에 ‘겨울’이라는 성을 쓰는 가문이 더 있나요?”

    쪽지에 적힌 ‘겨울’이 귀족 가문을 가리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가설이 생긴 이상 검증해 보고 싶었다.

    메리엔이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니, 겨울이란 성을 쓰는 건 이곳이 유일하단다. 예전에는 몇 군데 더 있었다지만 모두 영지로 내려가 버려서 우리가 하나뿐인 겨울이 되었지.”

    “아하.”

    “그래서 몇 사람들은 윈터벨을 수도의 겨울이라고 부른단다.”

    오!

    방금 정답이라고 말하는 종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면 여기, 지하실의 열쇠란다. 뒤쪽의 창고 방에 아래로 내려가는 철문이 있을 거야.”

    “네.”

    “남작님 내외가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마음껏 구경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메리엔에게 허락을 받고 나는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들어가는 과정까지는 퍽 그럴싸했다.

    하지만.

    “음.”

    도무지 접선 장소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청소를 안 했는지 먼지가 뿌옇게 일어 발자국이 다 찍혔고, 유사시 몸을 숨길 곳도 마땅치 않았다.

    드나들 수 있는 문도 하나뿐이었고 결정적으로는 지하실과 연결된 창고에 커다란 통창이 있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걸 누구나 엿볼 수 있는 공간을 접선 장소로 삼진 않겠지.

    “여긴 아닌가 보네.”

    그러면 지하실보다 더 낮은 곳이 어디일까.

    무덤이라도 파헤쳐 들어가는 건 아닐 테고.

    찜찜해진 마음으로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혹시 상징적인 의미인가?”

    그렇게 내뱉으니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위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낮은 곳.

    달리 해석하면 역설적으로 그곳은 제일 높은 곳이었다.

    사용인들이 거주하는 다락방 말이다.

    신분이 제일 낮은 이들이 머무는 곳이었으니까.

    굉장히 재수 없는 해석이 되겠지만, 상대가 궁에서 일하는 황실 조사관이었으니 그편이 더 그럴듯했다.

    “그러면 아리스타타는 뭘까.”

    저택을 청소하면서도 화분을 살폈지만, 사전에서 본 꽃은 비슷한 것도 없었다.

    혹시 이 저택의 식물도감이라도 뒤져 봐야 하나.

    그때 뎅뎅뎅, 요란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괘종시계가 5시를 알리고 있었다.

    여긴 다 좋은데 시계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탈이야.

    청소하는 동안에도 귀가 괴로워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어, 잠깐만. 5시?”

    아리스타타는 5월 19일의 탄생화였다.

    날짜로 해석할 때는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냥 숫자만 가져온다면?

    나는 멀뚱히 시계를 바라봤다.

    막 분침이 움직여 지금 시각은 5시 1분.

    “다른 해석법은 없으니까.”

    나는 서둘러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침에 나올 때와 달라진 것도 없었지만 새삼스럽게 그 구조가 달리 보였다.

    창 앞을 가린 큰 나무라든가 각도에 따라 훤히 보이는 바깥 광경이라든가.

    그러고 보면 저 창문을 마냥 들여다본 것도 내 직감이 무언가 알려 주려 그랬나 보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크루엘로를 기다리던 게 아니란 말이야!

    설레는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서성거리며 카펫 위를 돌아다녔다.

    그 순간, 창문에 사람 그림자가 비치었다.

    아직 5시 29분이 안 됐을 텐데 벌써?

    의아해하던 차에.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시오라.”

    길쭉한 다리가 창문을 타 넘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크루엘로는 아니다.

    정수리의 연분홍빛을 보고 나는 질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렇게 초를 쳐도 되나. 식었다.

    “그렇게 도망치시면 어떡해요. 공작과 어울리더니 덩달아 범법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어떻게 알긴.”

    줄리안이 웃으며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저도 봤거든요. 황실 비밀 조사관이 가지고 있던 메모.”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놈이 접선 상대는 아니로군.

    “검은 뱀에 대한 정보가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서 그토록 은밀하게 오가는 정보라니. 저라도 궁금해서 접선 장소에 나와 봤을 거예요.”

    “이젠 원로회의 사람인 걸 숨기지도 않으시네요.”

    “저더러 뱀을 조심하라고 말해 놓고 이제 와서?”

    “…….”

    “그런데 어쩌죠, 상대는 안 나올 텐데.”

    안 나온다고? 설마 죽였나?

    “황실 측도 정보가 제법 빨라요. 그쪽 조사관이 잡혀 들어간 걸 진작에 알았을 텐데 접선 장소에 나올 리가 있나.”

    생각보다 평화로운 이유였다.

    “메모는 일부러 회수하지 않고 남겨 둔 거네요.”

    “그럼요. 누가 미끼를 물고 나올 것 같아서. 2원로님께서 공작전하와 거래하신 걸 알고는 내내 기대하고 있었지요.”

    그러면 내가 여기에 안 왔으면 줄리안은 그냥 다락방을 들여다보다가 머쓱해져서 돌아갔으려나.

    생각하니 그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워졌다.

    그건 그렇고.

    “줄리안, 생각보다 용감하네요. 이 자리에 크루엘로가 나왔으면 어쩌려고 그냥 들어와요?”

    간단한 도발에 줄리안의 표정이 변했다.

    크루엘로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군.

    나는 더 가열하게 이죽거렸다.

    절반쯤은 진짜로 궁금하기도 했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공작이 직접 올 리는 없지.”

    “오, 반말?”

    “모르나 본데 그치는 늘 그렇거든. 위험한 자리에 직접 나서는 법이 없단 말이야.”

    어두운 목소리로 내뱉고, 줄리안이 탁, 창문을 잠갔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꽃잎이 허공을 날아 다락방의 문고리에 달라붙었다.

    출구를 봉쇄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막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저게 누구의 발목을 잡을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실제로도 접선 장소에 나온 건 공작이 아니라 너잖아. 실은 놀랐어, 나는 네가 일방적으로 공작의 장난감 노릇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니 말이야.”

    “말 참 예쁘게 하네.”

    “그래 봐야 쓰고 버릴 부하 취급이겠지만.”

    “긴말은 됐고. 그래서 공작의 ‘부하’를 잡아가려고 몸소 행차한 거야?”

    “네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 내 심문 솜씨가 그렇게 나쁘진 않아서 어지간한 사람한테서는 정보를 뽑아낼 자신이 있거든.”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건 채 줄리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락방이 그리 넓지는 않았기에 그의 그림자가 내게 닿는 데까지는 불과 몇 걸음이 걸렸을 뿐이다.

    크루엘로만큼은 아니어도 장신인 터라 높은 곳에서 내리 찍히는 눈빛이 제법 살벌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말투가 이전처럼 정중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저도 남의 비명을 즐기는 건 아니에요. 그럭저럭 친분을 쌓은 사이면 더더욱.”

    “왜 그렇게 말을 빙빙 돌려. 그래서 뭐.”

    “하나 물을게요. 어제 교단을 들쑤신 여자, 레이디와 관련이 있나요?”

    엥?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까지 비장하게 등장해 놓고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다고?

    “흠, 흐흠.”

    데이디어 크림슨과 친구인 이유가 있었네.

    아무리 가면을 썼다지만, 내가 체구를 어떻게 감춘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변조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봐 놓고 그게 나라는 걸 못 알아봐?

    원로회의 끄나풀 노릇이나 하는 머리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 모양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없이 줄리안을 응시했더니 그게 그의 눈에는 긍정으로 보였나 보다.

    “역시 그런가 보네요.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요즘 쓰는 주문도 아니더라고요. 아직 그만큼 성세가 남은 고대 신이 있던가 고민해 봐도 잘 모르겠어서.”

    “음.”

    “그 여자의 정체가 뭔지 말해 줄래요? 그러면 시오라는 무사히 보내 줄게요.”

    과연 그게 나라고 고백해도 순순히 보내 줄 것인가.

    웃음이 치밀어서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줄리안은 혼자만 진지했다.

    “솔직히 원로회에서도 시오라에게 그렇게 악감정이 큰 건 아니에요. 파혼만 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버려 두겠죠.”

    “그렇구나.”

    “시오라도 젊은 나이에 죽고 싶은 건 아니죠? 뇌가 있다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반걸음을 더 걸어 들어왔다.

    목소리에 살살 살기가 섞여 들어서 나는 천천히 웃음기를 지웠다.

    줄리안 미네르바.

    이 어린애를 어떻게 대할지는 이미 정해 둔 바가 있었다.

    다만 어제는 힘이 빠듯해서 보내 줬을 뿐.

    굳이 코앞에 머리를 들이민 적을 돌려보내 줄 이유는 없다.

    나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줄리안은 이미 필요한 만큼 가까운 상태였다.

    “미안한데 어차피 요절할 운명이야.”

    ‘시오라 보네티’는 그랬다.

    아무리 몸을 곱게 쓰더라도, 남의 몸살이로 3년은 못 채우더라고.

    내 말이 거절로 들렸는지 줄리안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차차.

    “어제 교단을 습격한 여자의 정체를 아느냐고 했지? 알아.”

    “그러면─.”

    “그거 나거든.”

    ─4주문. 속박restriction.

    성력을 두 배쯤 집어삼킨 사슬이 줄리안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상을 눈치채자마자 그 또한 네 개의 넝쿨을 뽑아내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저번에 눈앞에서 목격했기에 안다.

    줄리안 미네르바가 마법을 시전하는 속도는 크루엘로에 비해 확연히 느렸다.

    그리고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속도의 차이는 승패를 가른다.

    “큭!”

    내 등을 겨누던 식물 줄기는 내게 닿지 못한 채 시들었고, 줄리안은 제 목으로 찔러 드는 사슬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힘이 조금이라도 빠지면 그대로 목숨이 끊어질 만큼 아슬아슬한 힘 싸움.

    나는 사슬을 그대로 둔 채, 여유롭게 두어 걸음을 물러나 팔짱을 꼈다.

    “솔직히 이해는 잘 안 돼. 눈앞에서 나를 보고도 어떻게 헷갈릴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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