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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1화 (71/162)
  • 71화

    “이게 뭘까.”

    일단은 크루엘로의 필체인데 이 장소를 왜 적어 놓은 거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추측해 볼 후보는 셋이었다.

    1. 적이 중요한 걸 숨겨 놓은 본거지.

    2. 크루엘로가 중요한 걸 숨겨 놓은 아지트.

    3. 그 외.

    기껏 짜낸 후보란 게 참으로 조악했지만, 어느 쪽이든 매력 있게 느껴졌다.

    어차피 돈 없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뿐이니 생산성 있게 살자.

    나는 메모를 잘 챙겨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동화 한 냥 없는 길거리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실물은 보네티 백작저에 있고, 계좌에 든 돈은 내 이름을 대야 찾아올 수 있으니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다.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나는 로브를 여몄다.

    가면은 길드에 버리고 왔지만, 안쪽의 사제복이 보이면 곤란했으니까.

    옷도 안 갈아입고 도망치다니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나마 검은 로브는 흔해서 다행이었다.

    메모에 적힌 장소까지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이라 추웠고 해도 이미 저물어서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턱은 달달 떨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페불라시여, 세계를 구할 용사한테 정말 이 대접이 최선입니까?

    이 와중에 뭐라도 해 보겠다고 메모만 보고 그 장소를 찾아가는 내가 불쌍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평범한 이층집이었다.

    “여긴가?”

    달리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데, 크루엘로는 여기서 뭘 하려던 걸까.

    위치상 귀족가인 것 같긴 한데.

    나는 정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명패를 발견했다.

    “윈터…… 벨?”

    “응? 벌써 왔니?”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다.

    우와, 깜짝이야!

    하마터면 계단에서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문을 열고 나온 건 다갈색 머리칼의 중년 여성이었다.

    복장으로 보아 이 집의 하녀인 듯했다.

    “미안, 미안, 괜찮니? 마침 문단속을 하려던 참인데 소리가 나서 그만 벌컥 열어 버렸구나.”

    “아, 음, 네.”

    “네가 일하기로 한 아이지? 밤중에 올 줄은 몰라서 놀랐구나.”

    “네?”

    “그런데…… 남자아이를 보내 준다는 줄 알았는데 여자아이니?”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얼이 빠져 멍하니 있던 내 머리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크루엘로의 쪽지.

    남자아이가 일하러 오기로 했다.

    설마, 크루엘로가 여기서 위장 취업을 하려던 건! 아니겠지.

    머리가 다른 의미로 돌았다.

    “저기? 혹시 내가 잘못 짚은 거니?”

    아차, 고민할 때가 아니다.

    그 답은 저 집에 있을 테니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뢰감이 들도록 말투를 바꾸었다.

    “사정이 생겨서요. 어떤 일이든 제일 잘 해내는 제가 대신 왔습니다.”

    “참 자신만만하구나. 모든 걸 잘 해낼 필요는 없어, 해야 할 건 청소뿐이니.”

    오케이, 하녀 일!

    나중에 진짜 근로자가 찾아오더라도 내 능력으로 쫓아낼 수 있는 분야다.

    한층 더 어깨가 펴졌다.

    “청소라면 더 말할 것도 없죠. 저 경력직이에요, 저를 한번 써 보시면 다른 사람은 생각도 안 날 거예요.”

    믿으라고 목소리에 성력까지 실어 어필했다.

    저 집에 뭐가 있을지 참으로 궁금했고 더군다나…… 밖이 너무 춥다.

    잠깐 머무를 곳을 찾아 더 걷기도 싫다.

    독사, 과로사에 이어 동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행히 상대방은 꼭 남자아이가 필요하던 건 아닌 듯했다.

    “안으로 들어오렴.”

    감사합니다, 페불라시여.

    아니지, 감사할 대상이 잘못됐다.

    감사합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상사님.

    페불라는 안 감사합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며 나는 일단 후드부터 벗었다.

    얼굴을 숨기고 일할 수는 없을 거고, 혹시 상대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면 일찌감치 도망치는 게 나을 테니까.

    “어머.”

    다행히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뜰지언정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평민 중에도 귀족에 제법 빠삭한 사람이 많아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하기야 난 사교 활동을 많이 하지도 않았지.

    아, 그래서 나이젤리아가 나한테 면박을 준 건가.

    아무튼, 그 할머니 가만 안 둔다, 두고 봐.

    “얼굴이 정말 곱네. 음…… 귀족은 아니지?”

    “귀족은 아닙니다. 음, 뻔한 이야기예요. 한때는 잘 살았지만, 사람 사는 환경이란 게 한순간에 바뀌기도 하는 법이잖아요?”

    “저런……. 안된 일이구나. 그런데 미안하지만, 사정이 있다고 다 봐줄 수는 없어. 어느 정도는 솜씨가 있는 아이가 필요한데.”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는 온몸을 자신감으로 채우고 당당히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불안해 보였지만, 목소리는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역시 인간이란 아름다움에 약하다니까.

    “참, 소개가 늦었네. 나는 윈터벨 남작 가문의 하녀장인 메리엔이라고 한다. 넌 이름이 뭐니?”

    “……베티입니다!”

    베티, 미안.

    내게는 수많은 재주가 있었지만, 작명 센스는 별로다.

    그렇다고 본명을 댈 수도 없고, 하녀랍시고 ‘비가’라고 소개했다간 크루엘로에게 어떤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

    그 애가 그리 상상력이 풍부한 타입은 아니라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

    “그래, 베티. 시간이 늦었으니 자세한 얘긴 내일 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짐은 다락에 풀면 되는데…… 짐이 없니?”

    “내일이 없단 각오로 왔습니다.”

    “음, 그래.”

    사정이 있다고 했으니까.

    메리엔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사정이 그녀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거창하다는 건 모르겠지.

    그녀는 나를 다락으로 안내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일찌감치 자 두렴. 다른 아이들도 휴가를 보냈는데 주인어른들께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시게 되었거든. 그래서 내일은 네가 이 집을 거의 치워야 할 거야.”

    “네.”

    “물론 나도 거들겠지만 고된 하루가 될 거란다. 그래도 보수는 다른 집보다 넉넉하니 위안 삼으렴.”

    겨우 2층짜리 집 청소를 맡기면서 왜 이리 서론이 길담.

    나는 짐짓 오연하게 허리를 펴며 말했다.

    “메리엔은 감탄할 준비나 해 두면 돼요.”

    과로사 경력을 아무나 갖는 게 아니란 걸 보여 주겠다.

    ***

    메리엔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락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낭만적인 공간이었다.

    두텁게 깔린 카펫에 하얀 이불보가 덮인 침대 넷, 다소 낡은 쿠션이 들어 있는 나무 의자와 메이드복과 파자마가 걸린 길쭉한 행거가 하나.

    꾸밈새라고 할 건 그게 전부였으나 구조 자체의 특별함이 있었다.

    삼각형 모양의 천장─지붕─ 아래에 생각보다 너른 창으로 쏟아질 듯 많은 별이 보인다.

    꽤 동화적인 분위기였다.

    지금이 겨울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으으, 추워.”

    나는 으슬으슬한 팔을 쓸며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사제복은 침대 밑에 잘 구겨 넣었고 로브는 행거에 걸어 두었으며, 그쪽에 걸려 있던 파자마를 하나 주워 입었다.

    다 똑같은 디자인이니까 공용 물건이겠지, 뭐.

    그러고는 사용감이 제일 적어 보이는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래도 춥지만, 킁.”

    밖을 싸돌아다닐 때보다는 낫지, 아무렴.

    추위가 조금 해결되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기를 모른 척하기 위해 나는 애써서 다른 생각에 전념했다.

    “음.”

    윈터벨 남작가라.

    들어 본 적도 없는 가문이다.

    여기에 뭐가 있길래 크루엘로는 이 장소를 구태여 적어 둔 걸까.

    사실 가문명을 들었을 때 조금 짐작 가는 게 있긴 했었다.

    “윈터벨……. 겨울…….”

    비밀 조사관에게 얻어 냈던 쪽지에 다름 아닌 ‘겨울’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은데, 공교롭게도 내일이 접선일이라 생각이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겨울, 가장 낮은 곳, 아리스타타.

    직관적으로 보면 가장 낮은 곳은 지하실이려나?

    내일 청소하는 김에 내려가 봐야겠다.

    “크루엘로의 생일 선물은 결국 못 샀네.”

    도저히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왠지 잠이 깨 버려서 이불을 들추고 나와 매트릭스 위에 앉았다.

    양 무릎을 끌어안고 커다란 창문을 바라봤다.

    촘촘하게 박힌 별들과 날카롭게 빠진 초승달.

    바로 앞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 묘하게 안쪽을 가려 주긴 했지만, 각도만 잘 맞추면 바깥이 훤히 보였다.

    예쁘긴 해도 이 상황에 정신없이 구경할 만큼 아름다운 야경은 아니다.

    다만.

    “안 오네.”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왠지 누군가가 창을 열고 넘어올 것 같았는데 말이야.

    하기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찾아오겠어.

    나는 끌어안은 무릎에 뺨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 리도 없을뿐더러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이상했다.

    그야 크루엘로가 오면 상황은 한결 좋아지겠으나 너무 의존해서 좋을 건 없다.

    그래도 내가 검은 뱀 교단이라는 의혹은 그가 알아서 처리해 줘야겠지만.

    “춥다.”

    내 성력이 아니라 베아티투도만 써 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불로 꽁꽁 몸을 싸매며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

    이튿날, 나는 경력직의 솜씨를 아낌없이 뽐냈다.

    그 큰 화이트데저트 공작저도 거의 혼자서 쓸고 닦던 몸이다.

    겨우 이층집 정도는, 운동 신경이 없는 시오라의 몸으로도 완벽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과연, 청소를 마쳤다는 내 말에 미심쩍어하던 메리엔은 집을 다 둘러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세상에.

    “왜 이제야 나타난 거니.”

    어젯밤 다락에서 본 하늘보다 메리엔의 눈에 더 많은 별이 반짝였다.

    그녀는 감격하며 내 양손을 붙들었다.

    “너 같은 사람을 내내 기다려 왔단다.”

    “모두가 그렇게 말하죠.”

    “어딜 만져도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는 세상에, 방금 봤니? 파리가 계단에 앉으려다가 미끄러졌어!”

    후후, 이 정도 가지고 뭘.

    나는 간만에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역시 사람은 잘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해.

    물론 내가 잘하는 일은 세상에 한둘이 아니었지만, 단순 노동을 한 덕분인지 마음도 좀 개운해졌다.

    “이렇게 일찌감치 완벽하게 일을 끝낼 줄은 몰랐단다. 아, 뭐라도 따뜻한 걸 마셔야겠구나. 손이 어쩜 이렇게 얼음장 같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기.”

    마침 호감을 산 김에 나는 메리엔에게서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필요한 거 있니? 뭐든 말해 보렴, 베티.”

    “여기 혹시 지하실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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