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교단의 옷을 훔쳐 입은 여자는, 사제복 주머니에서 도통 손을 빼지 않았다.
‘저기에 뭐가 있는 거지.’
다가가 확인하고 싶었으나 바닥에 피어난 백화와 줄리안의 능력은 상극이었다.
그는 짧은 호기심을 밟아 뭉갰다.
‘내가 감당할 상황은 아니군.’
줄리안은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애당초 얻어먹을 게 있어 붙어 있는 만큼, 여기서 목숨을 불태울 이유는 없다.
그는 곧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뛰어들기 직전.
‘눈이…….’
상대와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히 여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그늘 때문에 눈 색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 눈빛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맹수의 타깃이 된 것처럼 사지가 얽매였다.
제 심장 소리가 귓가를 빠듯하게 채운다.
줄리안은 온몸을 뻣뻣이 긴장시킨 채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옆에 열려 있는 게이트가 있는데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청년이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던 건, 순전히 그녀의 시선이 비켜 갔기 때문이었다.
‘봐주는 건가, 건방지게.’
자존심이 상한 줄리안은 이를 악물었으나 어느 게 현명한 태도인지는 잘 알았다.
그는 주저 없이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공간과 공간을 잇는 문은 줄리안만을 삼킨 채 온전히 녹아내렸다.
줄리안이 도망친 자리를 보고 나는 입술을 핥았다.
진짜 상대할 여력이 안 돼서 봐주는 줄 알아라.
다음에 보면 저거 진짜 가만 안 둬.
“죽어라!”
“에휴.”
내가 지금 몬스터 웨이브를 혼자 틀어막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인간인 이상 적당히 하면 알아서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망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중간부터는 눈빛도 영 이상한 게 세뇌라도 발동했나 싶다.
고위 마법사는 진작 날려 버려서 거의 남지 않았지만, 슬슬 베아티투도도 바닥을 보였다.
방패는 진작 사라졌고 속박의 사슬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다.
퍼부어 대니 속은 시원했으나 이쯤 되면 탈출로를 알아봐야겠는데.
“아주 불바다를 만들어 놓으셨군.”
또 왔네, 또 왔어.
두 명의 남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차림새는 다른 이들과 똑같으나 이번에는 어중이떠중이도 아니다.
느껴지는 마나가 큐딜쯤은 되었다.
“쯧쯧, 2원로님께서는 어찌 교단으로 저 종자를 불러들이셨는지.”
“정보 노출을 최소화하도록 해라, 10원로.”
10원로?
아레스와는 덩치가 너무 다른데.
흠, 하기야 대체제로 갈아 끼울 시간은 충분히 지났지.
“새로 승진한 원로들이야?”
“미안하네만 이 와중에 정보까지 털리면 윗선에 할 말이 없어서 말일세.”
“넌 어디서 왔지? 대신관 중 우리가 행적을 놓친 이는 없는데.”
“뭐, 더 귀한 곳에서 왔지.”
“귀한 곳? 교황이라 주장할 셈은 아니겠지. 허허, 하기야 성력을 그만큼 펑펑 써 대는 걸 보면 그쯤은 돼야 납득이 되네만.”
도발 좀 해 볼까.
“좀 빌렸어.”
나는 내내 파묻고 있던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들어 올렸다.
물론 꼭 쥐고 있던 베아티투도 봉투 또한 같이 보여 주었다.
“그건……!”
물건을 알아본 이들의 기세가 변했다.
어떻게 나오려나.
“거의 다 써서 슬슬 지치는데 누구, 베아티투도 남는 사람?”
“감히 교단의 신물을!”
“용서할 수 없다!”
두 명이 모두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나는 베아티투도를 양껏 움켜쥐었다.
아, 다혈질. 좋지, 좋아.
남은 양은 많지 않으니, 큰 거 한 번 쓰면 개운하게 끝이었다.
그러니 통째로 마무리를…… 이라고 생각하던 때,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났다.
“어라.”
방금 얼굴 쪽에서 뭐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는데.
통증이 없으니 얼굴뼈가 부서진 건 아니고, 지금 내 얼굴에 걸려 있는 건 산양 가면이던가?
그러니까 지금…… 가면에 금이 간 건가?
“죽어라!”
“으앗!”
나는 가면을 움켜쥐고 데굴 굴러, 검은 전기 마법을 피했다.
비상! 비상!
교인들을 거의 처리했다고 했지, 전멸시켰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이러다가는 내 얼굴을 보고 도망치는 놈이 나오게 생겼다.
“음, 괜찮으려나?”
어차피 여기에 날 보낸 사람이 나이젤리아니 시간이 지나면 알려질 문젠가?
성력을 펑펑 써 댄 게 문제였는지, 계속 데굴데굴 굴러서 공격을 피하고 있어선지 머리가 영 매끄럽게 돌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용케 가면을 붙들고 잘 피해 대긴 했다.
하지만 최선의 방어는 역시 공격이었기에, 나는 사슬을 움직여 원로 하나를 쳐 냈다.
수명이 다한 사슬은 저세상으로 사라졌다.
“오.”
그리고 눈앞에 달려들고 있는 남은 원로가 하나.
그녀의 손에서는 검보랏빛의 마나가 악마의 장갑처럼 불타고 있었다.
그 손이 내 얼굴로 닥쳐 온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 베아티투도를 짜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주문을 입에 담으려던 때.
“크허억!”
너른 등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교인들이 입은 옷과 비슷한 검은색 천이었으나 느낌은 영 다르다.
역시 남자는 등짝이지.
원로를 손쉽게 튕겨 내고는 사내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예쁘게 반짝였다.
“늦었어요?”
늦기는.
노린 것처럼 딱 좋은 타이밍에 와 놓고는.
그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봐주는 줄 알아요.”
크루엘로는 몸을 수그려 내 허리를 끌어안고 훌쩍 뛰어올랐다.
한 박자 늦게 그 자리로 공격이 내리꽂혔다.
더 상대할 생각은 없는지 크루엘로는 나를 끌어안은 채 공격을 막으며 곧장 게이트를 열었다.
“아, 잠깐만요!”
“음?”
어차피 여기엔 열쇠를 가진 원로도─대체품이니─ 없지만, 그래도 후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남은 베아티투도를 거세게 움켜쥐고 가능한 성력을 죄 끌어모았다.
3g이 정량이라고 했던가, 그건 비전문가 기준이다.
“낙원heaven.”
그것은 최고위 공격 주문의 이름이었다.
양껏 그러모은 성력은 새하얗고 거대한 빛기둥을 이루며 폭발적으로 치솟아 모든 이들을 집어삼켰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튼튼하게 지어졌던 건물 기둥에도 쩌저적 금이 가고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천국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깨끗한 빛.
그 여파가 이쪽에 닥쳐오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게이트를 넘었다.
그 너머는 내 침실이었다.
“후우!”
속이 다 시원하네.
내 성력은 거의 건드리지 않아서 몸이 아프진 않겠지만, 기력은 쭉 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걸 크루엘로가 부축해 주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비밀 조사관이 길드 인테리어를 다시 해 주고 있더라고요.”
역시 내 선택이 옳았다.
결과적으로는 교인도 상당수 처리했고 교단의 본거지도 깨부술 수 있었으며 내 정체도 들키지 않은 채 탈출했으니까.
사실 베아티투도를 쓸지 말지는 끝까지 고민했지만, 그게 맞는 거였겠지.
“혼자서 교단을 다 뒤집어 놨던데. 여태까지는 힘을 숨긴 거였나요? 서운해라.”
“턱도 없는 소리 마세요.”
시오라의 몸으로 그게 가능했으면, 애당초 원로를 하나씩 살살 꾀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베아티투도를 쓰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음, 배부른 고민일까.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굳이 그걸 쓰고 싶지는 않았다.
“……베아티투도 썼어요. 집무실에서 찾은 거요.”
나는 지레 찔린 사람처럼 묻기도 전에 변명했다.
“나쁘단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거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제 성력만으로 감당하려고 했으면 반도 못 버티고 죽었을 거예요.”
“잘했어요.”
“다시는 쓸 생각도 없어요. 정상적인 루트로 들어오는 성력이 아니라, 기존 성력에도 해가 되는 것 같고요.”
“잘했다니까요, 진심으로.”
“음.”
“죄 없이 죽는 것보단 죄를 짓고라도 사는 게 나아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가볍진 않았다.
신관은 못 될 사람이로군.
나는 눈동자만 굴렸다.
어쨌거나, 좋아. 화도 풀렸고 위기도 벗어났다.
다시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그 수단은 별로 관심도 없어요. 관심 있는 건…….”
크루엘로는 말끝을 흐리며 제 턱을 툭툭 두드려 댔다.
그러며 그의 시선이 내 몸의 곳곳을 오갔다.
“뭐 해요?”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허, 참. 둘이 있을 때는 흉내 안 내도 되잖…….”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나는 그 끝을 흐렸다.
침실로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한 무더기 느껴졌다.
사용인이나 보네티 남매의 기척은 아니었다.
숨길 생각도 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는 보폭이 크고 규칙적이었다.
듣기론 군인 같은데, 설마 교단에서 벌써 추적자를 보낸 건 아니겠지?
크루엘로와 눈을 마주치는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황실 기사단?”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내 침실에 들이닥친 건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고, 그 정 가운데에는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얘네가 왜 여기서 나와?
공로금이라도 주려는 건…….
“시오라 보네티. 그대가 검은 뱀 교단의 일원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뭐가 어쩌고 저째?
난데없는 모욕에 발끈해 입을 벌린 순간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머리를 꿰뚫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내 차림새를 살폈다.
사제복과 로브, 깨진 산양 가면.
손에는 베아티투도가 있던 봉투까지 쥐어져 있었으며 로브의 주머니에서 툭 떨어진 패에는 뱀 문양이 그려져 있다.
헤헤.
변명의 여지가 없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싸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이의 있나?”
“아니요.”
“황궁까지 함께 가 줘야겠군.”
하하, 오늘 운수 한번 대단하네.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예에, 그럽시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조사관한테는 맹세 주문을 걸어 놨으니 이것도 나이젤리아겠지.
내가 살아나올 것까지 대비해서 다음 공격을 준비해 뒀나 보다.
친절하게 옷 챙겨 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여기서 도망칠 기력도 없고 일단은 상대가 황실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나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도 있었다.
“음, 크루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