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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68화 (68/162)
  • 68화

    희미하게 남은 마나의 파장을 바라보다가 나는 몸을 돌렸다.

    지금 감상에나 젖어 있을 때는 아니지.

    그러나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은 나도 모르게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하나. 도움을 청하는 이를 외면하지 말지어다. 그로 인해 목에 악마의 사슬이 드리운다면, 페불라께서 그대의 두 번째 머리를 마련할지니.」

    그게 페불라의 8계명의 세 번째.

    아무튼, 신관들은 손해 보며 살아야 한다니까.

    읽을 때마다 불평을 내뱉던 계명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후련했다.

    나도 미쳐가나 보지.

    금세 통로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이번에도 막다른 곳이었으나 나는 조사관의 말을 믿고 벽으로 달려들었다.

    약간의 체공 끝에 발바닥에 딱딱한 바닥의 감촉이 전해졌다.

    발목이 조금 저릿하다.

    고개를 들자 웬 창고 같은 공간이 보였다.

    불빛이라고는 벽에 걸린 마석 램프가 다였는데 그 바로 앞에 그토록 찾아다니던 이가 있었다.

    “가보트!”

    커다란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청년.

    실제로 보니 가슴이 선뜩해져서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나는 일단 가보트의 눈가리개부터 풀었다.

    그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얼빠진 목소리로 따질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정신계 마법에라도 당한 건가?

    “아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알아봐도 된다.

    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그의 손목부터 풀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 매듭에 손을 댄 순간, 밧줄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어……?”

    가보트의 손이 사라졌다.

    당황해 밧줄을 더듬는데 내 허벅지로 무언가가 툭 떨어진다.

    “지푸…… 라기?”

    이게 대체 왜.

    당황해 고개를 들었으나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은발의 청년은 없었다.

    대신하여 의자에 놓여 있는 것은 짚 인형이었다.

    전에 내가 본 적 있는 형태의.

    새하얗게 질린 머리에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가보트, 네 귀 왜 그래.”

    “새로 들어온 하인이 머리를 만져 줬는데 솜씨가 미숙해서 실수한 거지.”

    머리카락, 그리고 피.

    몇 시간 동안 주인과 똑같이 행동하는 더미의 재료였다.

    “하.”

    나는 품에서 통신구와 모래시계를 모두 꺼냈다.

    통신구에는 내 뒷모습이 비치고 있다.

    그리고 모래시계에서는 방금 막 마지막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이제야 알겠다.

    애당초 이건 유예용으로 준 시계가 아니다.

    더미 마법이 풀리는 시간을 말해 줄 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탈력감에 젖어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알아차린 즉시, 의자의 뒤에 걸려 있던 램프에 마나가 몰려들었다.

    위이잉, 요란하게 울리는 굉음과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붉은 빛.

    온갖 교인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에 나는 또 종전의 일을 떠올리고 만다.

    “신호 마법입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사방으로 붉은 빛이 퍼지는데…….”

    그래, 이런 거란 말이지.

    애당초 나를 잡기 위해 깐 덫이었고, 가보트를 손쉽게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니 달라진 건 인질이 애당초 가짜였다는 것뿐.

    가보트가 안전하다는 확신은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런데 왜…….”

    심장에 새까만 진흙이 낀 것 같다.

    음, 아니야.

    침착하자. 화내지 말자.

    이 상황에 흥분해 봐야 머리만 둔해질 뿐이다.

    그러니 일단은 어떻게든 머리를 식히고 차분하게 대응을…….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한쪽 벽면 전체가 열렸다.

    그리고 그 바깥으로는 한 무더기의 검은색이 있었다.

    까만 로브에 사제복과 상앗빛의 산양 가면.

    징그러울 정도로 똑같은 복장이 찍어 낸 듯이 빼곡하다.

    “요즘 쥐새끼들은 당돌한 맛이 있어. 알아서 쥐덫에 걸려든다니까.”

    비죽, 나를 비웃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으나 누가 말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기야 누구든 같은 생각이겠지.

    평소라면 듣고도 웃을 법한 삼류 도발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지금은.

    아.

    “나 진짜, 이렇게 화가 나긴 처음이야.”

    짜증이 치솟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사제복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허허, 우리 깜찍한 쥐새끼가─.”

    “광휘brilliance.”

    새하얀 빛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그걸 보며 나는 무심코, 그 빛만큼이나 머리가 하얗던 선배를 떠올렸다.

    “막내야, 너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해?”

    “그야…… 분노를 유발한 상대방을 때려 주면 시원해지지 않을까요?”

    “너는 신을 모신다는 게 뭘 보고 그렇게 폭력적이야?”

    “또 신을 모시는 몸은 호구처럼 다 용서해야 한다고 하려고!”

    “용서하란 게 아니야. 마음을 늘 중도에 두란 거지. 응? 늘 웃거나 아니면 유쾌하게 넘어가거나.”

    “그쪽이 더 재수 없지 않나.”

    “어허! 이게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감정에 휩쓸릴수록 더 괴로워진다니까?”

    “에베베, 안 들려요, 에베!”

    “지금은 괜찮더라도 괴로울 때 말이야. 네 곁에 너를 달래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듣지도 않네.”

    그땐 정말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선배 신도들이 모조리 죽은 이후로는 그런 류의 대화를 여러 번 떠올렸었다.

    그 말대로 따르니까 정말로 좋아지는 부분도 있었다.

    마음을 더 가볍게 비우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그건 옳은 조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있을 경우에는!

    “용서는 얼어 죽을 용서.”

    세상엔 상대방을 처단해야 풀리는 분노도 있다.

    항변하고 싶거든 지옥에서 살아 돌아와서 말해라, 선배!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듣고도 연민은 요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공격하려고 검은 마법을 쏘아 대는 통에 분노만 쌓였다.

    “죽어라, 이 신관의 끄나풀!”

    이게 누구한테 끄나풀이래!

    ─6주문. 가호protection.

    허공에 거대한 방패 세 개가 떠올랐다.

    방패는 번갈아 움직이며 내게로 날아드는 흑마법을 막아 냈다.

    하나 막기만 해서는 저 벌레들을 다 박멸할 수 없는 법.

    “젠장, 저 방패는 뭐야!”

    “본체를 공격해, 본체를!”

    ─4주문. 속박restriction.

    순백색 사슬이 한데 모여 아나콘다처럼 길어졌다.

    그 형체는 허공을 헤엄치듯 이리저리 뻗어 나가며 교인을 한 무더기씩 휘감아 묶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악! 숨, 숨이!”

    ─6주문. 광휘brilliance.

    호쾌한 성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페불라시여, 여러 놈 갑니다.

    대단한 고위 주문들은 아니었으나 성력을 한껏 밀어 넣은 덕에 위력은 평소의 배 이상이었다.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주문을 퍼부어 대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마침 보조 용품도 있는 터라.

    약간의 도덕성을 내려놔야 했지만 아무렴 세계만 구하면 됐지.

    “대체 뭐야? 대신관이라도 온 거야!”

    “얼빠진 소리 마! 대신관이 여길 왜 와?”

    “젠장, 그게 아니면 고위급이 왜 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고위급은 개뿔.

    아까는 올려치기를 해 줬지만, 지금 상황에선 원로가 떼거리로 나와도 자신 있다.

    받아라, 업보의 맛!

    “원로님들, 아니면 J 공이라도 불러와!”

    그리고 그 마지막 외침대로 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쏘아 낸 넝쿨이 내 사슬을 조여 끊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다른 데서 일을 보고 있었는지 등장이 제법 늦었다.

    나는 줄리안 미네르바를 똑바로 바라봤다.

    다만 이전과 같은 시선은 아니었다.

    “제가 막 비밀감옥을 빠져나간 즉시 제이란 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가 딜런을 죽였다고 했었지.

    딜런이 죽든 말든 알 바는 아니다.

    내게 협조한 것도 비겁한 이유 때문이었고, 교단의 고위직이라는 것만으로도 그가 저지른 죄악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건, 딜런을 죽인 게 하필 줄리안이라서 그랬다.

    “어린애라고 봐줬더니.”

    가보트와 아카데미 동기라기에 유독 어려 보였고, 하는 일이라곤 잡일뿐이라 별생각이 없던 것도 사실이다.

    하나 벌써 악에 물들어 사람을 죽일 정도라면, 나이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지.

    눈가를 찡그린 줄리안이 교인들을 도우려 수많은 넝쿨을 흩뿌렸다.

    그걸 보며 나는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7주문. 처단punishment.

    무엇이든 태울 수 있는 새하얀 불꽃이 점점이 피어난다.

    삽시간에 주위의 온도가 훅 올라갔고, 줄리안의 식물은 힘도 써 보지 못한 채 타들어 갔다.

    그러나 불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많은 악인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진심이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권력에 눈이 먼 불신자들을 지워 버리고 싶거든.”

    “그래, 지워 버려야지. 아주 깨끗이 청소해야지.”

    그러나 아랫사람만 치워 버려서는 의미가 없다.

    예로부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하지 않았나.

    교단이 마음에 안 드는 꼴이 되었다면, 그건 나이젤리아의 탓도 있다.

    그러니 2원로까지 포함해서 깨끗하게 정리해 준다.

    청소는 내 이전 생에서의 특기였으니까.

    나는 주머니에 넣은 손을 움직였다.

    비닐 너머로 덩어리진 알갱이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 본다.

    그건 딜런의 집무실에서 주웠던 베아티투도였다.

    베아티투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는 이상, 이걸 쓰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되돌릴 수 없는 생명에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무언지는 명백했고, 선택한 이상 최선의 결과를 내야 했으니까.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줄리안 미네르바는 앙다문 입술 새로 신음했다.

    ‘어떻게 저런 출력이 나오는 거지?’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신관이란 본디 기적을 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스스로 키워 낸 힘을 다루는 게 아니기에, 사제들은 신성 주문을 다루면서도 버거워했다.

    저렇게 끝도 없이 퍼부어 댈 수 있는 게 아니란 소리다.

    설사 대신관이라도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고민하며 한 줄의 정보라도 캐내려던 줄리안은 문득 상대에게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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