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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67화 (67/162)
  • 67화

    줄리안과 다른 교인의 대화가 계속 들려왔다.

    “어, 그러게요. 이게 언제부터 열려 있었대.”

    “오래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딜런을 처단할 때, 이쪽으로 도망치려 해서 제가 다시 닫았으니까요.”

    “한번 들어가 볼까요?”

    “아니,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뒤쪽에서 무언가가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그게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굳이 묘사하자면 이랬다.

    투쾅투쾅투쾅투쾅!

    왜 저렇게 빨라? 전생에 바퀴벌레였어? 인간의 몸으로 저게 돼?

    나는 다른 의미로 공포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놀렸다.

    무릎 연골의 일부를 제물로 바쳐, 마침내 통로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음…….”

    막다른 길이었다.

    통로가 아니라 덫이었군.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하긴.

    막 들어간 집무실에서 우연히 초상화 각도가 다른 걸 발견했더니, 그게 공교롭게도 가보트가 갇혀 있는 곳과 연결되어 있을 리가 없지.

    운이 좋은 줄 알았는데 망한 거였다.

    실소하는 와중에도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나는 체념하며 좁은 공간에서 꾸역꾸역 몸을 돌렸다.

    손에 낀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보고, 괜히 주머니에도 손을 넣어 봤다.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최후의 한 수쯤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가보트를 살려 데려갈 수 있을까.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벽에서 튀어나온 손이 대뜸 나를 잡아끌었다.

    “헉?”

    내 몸이 벽으로 빨려들었다.

    유체이탈? 물론 아니었다.

    “쉿.”

    나를 끌어당긴 이가 내 입을 틀어막은 채 속삭였다.

    처음에는 크루엘로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캄캄함 어둠에 묻혀 바로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어렴풋한 형체를 더듬어 그려 보니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번에 만났던 비밀 조사관이다.

    딜런은 처단당했다던데 용케 살아 있었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게서 손을 떼었다.

    나는 그러고야 내가 들어온 공간을 확인했다.

    환영으로 숨겨 놓았을 뿐, 그냥 막다른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은 통로였다.

    내가 조금 전까지 주저앉아 있던 곳도 이쪽에서 훤히 보였다.

    그래서 나를 쫓아오던 소리의 실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

    넝쿨을 뭉쳐 만든 듯한 동그란 몸체에, 도마뱀처럼 생긴 네 개의 발.

    가운데에는 커다란 장미가 피어 있고 그 안쪽으로 동그란 눈이 하나 박혀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며 막다른 곳을 살폈다.

    줄리안이 재빠르게 기어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뭔지 모를 그 마나 덩어리를 관찰했다.

    세상에 별게 다 있네.

    뒤쪽에서 줄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짚었나.”

    “뭐가 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초상화는 아까 소란이 일 때 떨어졌나 보네요.”

    “하기야 보통 요란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눈알이 달린 동그라미가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줄리안 미네르바도 집무실을 나갔는지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저번에는 초면에 하대를 들어서 말을 놨지만, 도움을 받았으니 존대해 주기로 했다.

    “그보다 여기엔 어쩌다 다시 들어오게 되신 겁니까?”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기껏 감옥에서 나와 놓고……. 아, 감옥 나오는 거 딜런이 도와준 건가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저를 도와준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사람, 죽었습니다.”

    조사관의 목소리가 담담히 울렸다.

    음, 역시 그렇구나.

    안 그래도 교단을 청소하고 싶어 하던 나이젤리아가 적과 내통한 사람을 살려 둘 리 없단 것쯤은 짐작했다.

    더군다나 딜런은 대놓고 대원로 쪽 연줄을 탄 불신자기도 했고.

    아까 줄리안의 말대로라면 그가 처리했겠지.

    “어쩔 수 없네요.”

    그냥 쉬운 패를 하나 잃은 것뿐이다.

    조금 찜찜했지만, 할 수 없지.

    나중에 기도나 해 주자.

    “그래서 조사관님은 안 나가고 여기서 뭐 하세요? 아직도 조사 중?”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나갈 수 없는 겁니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박은 그 ‘딜런’이라는 교인이 풀어 줬습니다. 감옥에 내버려 둔 채 살려 둘 명분이 없으니 차라리 도망친 척하라고요.”

    “말만 그렇게 하고 출구를 막아 버린 거예요?”

    “아니요. 제가 막 비밀감옥을 빠져나간 즉시 제이란 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러곤 제 도주가 발각됐는지 바깥문에 새로운 마법이 걸렸죠.”

    “음, 그 엄청 큰 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그리로 들어왔는데요.”

    “나갈 때는 특정한 마법을 써야만 문이 열릴 겁니다.”

    “아무나 잡아서 협박하면─!”

    “신호 마법입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사방으로 붉은 빛이 퍼지는데, 그러고도 3분이 지나야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걸로 압니다.”

    지독한 놈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절망한 건 아니었다.

    내게는 바깥으로 날 데려다줄 반지가 두 개나 있었으니까.

    “비밀 조사관이라면서 이동 마법이 걸린 마도구도 안 들고 다녀요?”

    “보급된 물건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는요.”

    “아하.”

    “어쩔 수 없으니 신호 마법의 소리라도 가리려고 폭탄 몇 개를 설치했습니다만.”

    “어……. 아까 절묘한 상황에 터진 게 그럼?”

    “제가 터뜨린 게 맞습니다. 천장 쪽 비밀 통로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인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10초에 한 번씩 가면을 확인하시기에.”

    “…….”

    내 완벽주의가 발목을 잡았군.

    쳇.

    “제가 빚을 졌네요.”

    “아닙니다. 폭탄이 터져도 자리를 지키는 교인들이 있더군요. 애당초 불가능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빚은 없네요.”

    “……신관님께서도 여기에 도로 들어오시면 안 됐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고요. 조사관님은 여기를 싹 털어 보셨으니까 건물 구조에도 익숙하시죠?”

    “그야…….”

    “그러면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나는 냉큼 통신구를 꺼내 그 앞에 들이밀었다.

    이 이상 잡담을 늘어놓기에는, 내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는 구슬에 비친 사람을 보고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질문에만 집중했다.

    “심문실이군요. 지하 감옥으로 이송되기 직전 잠깐 가 봤습니다.”

    “오! 위치도 아세요? 안내해 주실 수 있어요?”

    “마침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공간이니 어렵지 않습니다.”

    이어 그는 무언가 초 치는 소리를 하려는 듯 입을 몇 번 달싹였으나, 잠자코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누가 악당의 비밀기지가 아니라고 할까 봐, 통로의 구조는 괴이했다.

    벽인 듯한 곳이 뚫려 있지를 않나, 지나갈 수 있을 듯한 공간이 막혀 있지를 않나.

    신전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만이 알 법한 개미굴이었다.

    안내인이 없었으면 분명히 가보트를 찾기 전에 시간이 다 가 버렸을 것이다.

    “저쪽입니다.”

    조사관이 무릎걸음을 멈추었다.

    “이 통로의 끄트머리로 쭉 가시면 됩니다. 통로는 3m쯤 높은 곳에 있으니 떨어질 때 주의하십시오.”

    “같이 갈 생각은 없으시고요?”

    “몸이 못 버틸 겁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조사관이 앞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기에 뚝뚝 떨어지는 피를 모를 수가 없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부상 정도를 추정할 수 있었다.

    저번 일 이후로 아흐레가 지났던가.

    응급처치라면 몰라도 제대로 치료할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상처를 봐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폭발 덕에 도망치긴 했지만, 고위급 흑마법사들도 안쪽에서 잔뜩 튀어나왔다.

    같은 공간에 예민해진 적들을 두고 약간의 위험이라도 감수할 수 없었다.

    음.

    나는 산양 가면의 주둥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번에 주셨던 암호요, 혹시 힌트를 더 주실 수는 없겠죠?”

    “……저번엔 실례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발설 금지 저주에 걸렸던 것도 잊었습니다.”

    그가 멋쩍은 듯이 웃어서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결심이 선다.

    “조사관님은 모두 살 수 있지만 가능성이 낮은 방식과, 누군가는 반드시 죽지만 가능성이 높은 방식 중 어느 쪽이 좋으세요?”

    “예?”

    “아니야, 대답하지 말아요. 어차피 전 전자를 고를 거예요. 기적을 믿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신의 말씀을 따르란 소리를 뇌에 박히도록 들어서, 착하게 굴란 말은 진절머리가 났지만 할 수 없지.

    내 천성이 이토록 아름다운 걸 어쩔까.

    나는 손에 낀 반지 두 개를 모두 빼서 그에게 건넸다.

    조사관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보라색 보석을 문지르면 어느 캄캄한 건물 내부로 이동할 거예요. 당황하지 마시고요.”

    “그게…….”

    “거기서 있는 힘껏 소란을 피워요. 내부의 물건을 다 때려 부숴도 좋고, 불을 질러도 좋고.”

    “신관님.”

    “그러면 누가 나타날 텐데, 그 사람에게 이 뱀 모양의 반지를 내주세요.”

    조사관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같이 나가시지요.”

    “방금 인질이 있는 걸 보셨잖아요. 반지가 세 명까지는 못 옮겨 줄걸요.”

    실은 가보트와 나, 둘뿐이라도 반지의 게이트를 쓸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나이젤리아는 내게 게이트 마법이 걸린 반지가 있다는 걸 아니까 가보트 측에 무언가 조치해 뒀을 가능성이 컸다.

    지난번, 이 조사관을 데리고 나가려 했을 때는 겨우 벽에 붙은 사슬 때문에 실패했었다.

    가보트도 자유로운 상태라고 보기는 힘들겠지.

    그러니 실질적인 선택지는 반지를 하나만 줄지, 둘 다 줄지였고 개중 나는 크루엘로를 불러오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반지를 내드리려면 맹세하셔야 해요.”

    유효 기간은 일주일뿐이었지만, 그 정도의 안전장치라도 걸어 놔야 한다.

    상대는 유효 기간의 존재를 모를 테니 더 오랫동안 침묵할 가능성도 높았고.

    ─5주문. 맹세pledge.

    순백의 사슬이 내 주위로 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 해요.”

    “나는 오늘 일을 1년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나는 눈앞의 사람과 협의한 내용을 지키겠노라 맹세한다.”

    조사관은 곧바로 내 말을 따르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하겠습니다.”

    딜런에 비하면 장엄하기까지 한 맹세 끝에 사슬이 그의 혀를 휘감고 들어갔다.

    결정한 이상,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잘 숨어 계십시오,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러고는 조사관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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