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내려오며 열어 둔 감각에 정보가 선명히 잡힌다.
안쪽으로 깊숙한 곳에서는 수준 높은 흑마법사도 상당히 많았다.
“……아주 작정했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품에서 통신구를 꺼내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보트가 있는 장소를 특정할 수 없었다.
전에 왔을 때, 어지간한 곳은 다 둘러봤음에도 말이다.
하기야 30분간 아무도 가보트가 거기에 있는 걸 모를 거라고 단언했으니, 드러난 공간은 아니겠지.
신전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
딜런을 만날 수 있으면 편하겠지만, 과연 나이젤리아가 그를 내버려 뒀을까?
“…….”
나는 후드를 더 눌러쓰며 고민하다가 철문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향한 곳은 더 아래쪽, 지하 감옥이었다.
교단에 잠입했던 비밀 조사단원이라면 나보단 비밀 공간을 많이 알 것 같아서.
그러나.
“아씨, 비었어.”
철창 안에 남은 건 핏자국뿐이다.
이미 죽었는지 도망친 건지 누가 빼돌린 건지, 답은 알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시간 낭비였다.
이렇게 되면 지름길은 없다.
초조한 마음을 붙들고 나는 철문으로 되돌아와 문을 열었다.
“…….”
이미 감지했던 대로 문 안쪽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각오했던 것처럼 당장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를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가늘게 숨을 뱉어 냈다.
피아니시모라도 빌리고 싶다.
아니, 가보트는 인질로 잡혀 들어갈 거면 볍씨는 두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구해 달라는 입장이면서, 뭐 그리 성의도 없담.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긴장감을 덜어내고, 건물 내부를 은근하게 살폈다.
건축 도서 열심히 읽을걸.
비밀 공간이 어디쯤 있을지 짐작조차 안 된다.
결국, 나는 딜런이 있던 방으로 움찔움찔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노예,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맹세를 걸어 놨으니 살아만 있으면 얼마든 부려먹을 수 있다.
다른 방법도 없으니 확인해서 나쁠 건 없지.
“오.”
다행히 오늘은 문 앞에 경비도 없었다.
물론 딜런이 죽어서 없는 걸 수도 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딜런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맞은편에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죄다 사제복에 로브, 산양 가면까지 꼼꼼히 썼다.
가장 앞줄에 선 이가 고위 직급인지 다른 이들이 그를 중심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납치해서 정보를 캐 볼까 고민하다가 휙 고개를 숙였다.
절로 헛웃음이 난다.
“그래서 J 공께서도 좀 자주자주 찾아와 주시면…….”
J라니, 암호명 한번 성의 없군.
산양 가면 옆으로 삐죽 나온 분홍색 머리칼이나 감춰라.
줄리안 미네르바였다.
저 장신에 분홍색 머리, 하늘색 눈동자에 교단에 있을 법한 사람이 둘이라면 이야긴 다르겠지만.
하나 검은 뱀 교단의 본거지에 줄리안이 있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긴 처음이라고 하더라도.
“원로님들도 서운해하십니다. 알게 모르게 J 공을 얼마나 아끼시는데요.”
나는 그저 지나가던 길인 척, 자연스럽게 걸었다.
어차피 죄다 같은 차림이니 나를 수상히 여길 요소는 없다.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라, 모르고 가 버려.
속으로 중얼거리며 줄리안 무리와 엇갈려 걸었다.
역시 못 알아봤군, 쾌재를 부르던 순간.
“거기, 잠깐.”
명백히 나를 향한 말이었다.
못 들은 척, 자연스럽게 걸었으나 다리 길이에서 패배했다.
줄리안은 두어 걸음을 걷는 것만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 들고 가면 벗어.”
“그……. J 공? 저희 신도들은 신원에 좀 예민한데 갑자기 그러시면…….”
“요즘 해바라기가 그렇게 쥐새끼를 들여보낸다면서요. 확인해서 나쁠 거 있습니까?”
해바라기는 뭐야?
내가 모르던 제삼의 세력인가 하는데, 섬광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황실을 조롱하는 멸칭이군!
태양 문양을 상징으로 쓰니 그렇게 부르나 보다.
끄나풀 주제에 간도 커라.
“하지만 달리 수상한 정황도 없었는데…….”
“방금 저를 보고 휙 고개를 숙이던걸요. 이봐, 안 벗고 뭐 하지?”
별 볼 일 없는 주제에 눈치만 빨라선.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면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핑핑 돌아갔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줄리안 미네르바를 인질로 잡고 움직이자.
나는 가면을 벗는 시늉을 하며 성력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 순간 펑, 문 하나가 터져 나갔다.
사방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우악!”
“뭐야, 대체!”
“저기 연구실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사.
연기에 몸을 숨겨 일단 외곽으로 빠졌다.
여기서 그냥 도망치는 건 하수다.
나는 목소리를 바꾸고 소리쳤다.
“J 공,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 주십시오! 뛰어난 마법사시지 않습니까!”
목소리에 약간의 성력을 섞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장 이 부근에는 수준 높은 흑마법사─대부분 기도실 쪽에 모여 있었으며 줄리안은 흑마법사가 아니었다.─가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조금은 조마조마했지만.
“고위 마법사십니까?”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원로님들도 안 계신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또 터질 수도 있잖아요!”
“서, 설마 신전에서 쳐들어온 건 아니죠?”
선동 완료.
사람들이 줄리안을 둘러싸는 걸 확인하고 딜런의 집무실로 몸을 피했다.
드러난 공간은 구조가 단순한 터라, 어딜 들어가지 않고는 일신이 훤히 보였으니까.
물론 살아 있는 딜런이 나를 반겨 주길 기대하기도 했지만.
“여기도 비었네.”
얼마간 사람이 드나들었던 흔적조차 없었다.
하기야 딜런이 정말 살아 있었다면, 그 소란이 있을 때 나와 봤겠지.
한숨을 내쉬며 일단 책상 밑으로 기어들려던 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저거 원래 저랬던가?”
벽면에 걸린 초상화가 신경 쓰였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도 봤지만, 걸린 각도가 미묘하게 다르다.
착각이라면 착각이겠으나 확인해서 나쁠 거 있나.
나는 다가가 초상화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찾았다.”
그 형태대로 뚫려 있는 네모난 공간.
비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
고아한 잔. 담황빛 액체에서 연한 증기를 타고 꽃향기가 올라온다.
노인은 느긋이 찻잔을 기울이며 그 시간을 즐겼다.
제 앞에 놓인 차를 진작 밀어낸 크루엘로는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대었다.
그래서.
“슬슬 그 긴급한 용무가 뭔지 들을 때가 되지 않았나요?”
노인이 침잠한 눈을 들어 크루엘로를 바라보았다.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가주.”
“꼭 대원로님께서 저를 붙잡아 두시려는 것 같아서요.”
크루엘로의 손끝이 찻잔의 손잡이를 툭툭 두드려 댔다.
“요즘 이것저것 일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난데없이 보네티에서 전 백작의 죄를 고발하려는 움직임이 일지 않나, 제 약혼녀의 친부모랍시고 되지도 않는 가짜를 내세우려 들지 않나.”
“…….”
“수습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아. 벨벳가 방화 사건의 범인도 살아 있더군요. 진작 형 집행이 돼야 했을 텐데 말이에요.”
“다 가주께서 하시던 일이 아니신가. 그런 걸 즐기시는 줄 알았소만.”
“귀여운 반항이었죠. 원치 않는 혼담을 강요받았으니 그 정돈 해도 될 것 같아서.”
사내는 눈을 휘어 웃었다.
그냥 보기엔 참 예쁜 웃음이었으나, 희한하게도 뒤틀린 심기가 고스란히 녹아났다.
“그때는 점잖은 말 몇 마디로 꾸짖고 넘어가시더니, 이번엔 왜 이리 민감하게 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아오.”
“아니면?”
“어설픈 반발심이겠지.”
반발심?
크루엘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걸 참았다.
겨우 그 정도 단어로 일을 축소시키고 싶거든, 대원로야말로 얌전히 대처했어야 마땅했다.
“어차피 한때의 충동질, 파담한 내력도 여럿 있으니 혼인 전까진 눈감아 드리리다.”
“결혼까지 가겠다면.”
“모든 일은 결국 바로 가게 되어 있소.”
“재미없는 결론이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루엘로는 미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말에 영 알맹이가 없었을뿐더러 노인이 차분한 것도 이상했다.
대원로는 현자 같은 외관과 달리 퍽 다혈질이었다.
2원로 때문에 단단히 독이 올랐을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일까.
꼭 시간을 끌고 있는 것처럼.
그는 보네티 백작저에 잠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루엘로가 막 문고리에 손을 올린 순간.
“가주께서는 내가 왜 가주의 방만한 행동을 눈감아 드리는지 아시오?”
“모리온을 다룰 대체제가 없어서 그렇겠지요.”
“이젠 아는 걸 숨기지도 않으시는구려.”
노인은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래, 솔직해지신 김에 하나만 묻겠소. 모리온에 다다르는 방법 또한 아시오?”
“달리 특별한 방법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크루엘로는 대원로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2원로와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는 건가.’
대원로는 아직도 크루엘로가 열쇠를 모으는 중이란 걸 모른다.
2원로는 확신하는 사실이 대원로에게는 확인해야 할 정보였다.
크루엘로는 잠시 그걸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노인은 그와 시선을 맞추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모든 걸 손에 쥘 몸이시오. 기나긴 인생에서 겨우 20년 남짓을 고생했을 뿐이지.”
“그래서 운이 좋다고 감사해야 합니까?”
“지나고 나면 이 철없던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허.”
“이 늙은이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리다.”
그 목소리에는 질척질척한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
크루엘로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을 나서기 직전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참. 아레스가 죽은 채 발견됐다고 하던데.”
대원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사내가 유쾌하게 웃었다.
“대원로님께서도 몸조심하십시오.”
쾅, 문이 닫혔다.
노인의 노여운 목소리가 그 아래로 가라앉았다.
“……고얀지고.”
***
수확제 때의 비밀 통로가 최악인 줄 알았는데 이쪽이 더하다.
통로는 도무지 허리를 펼 수 없게 좁았다.
별수 없이 나는 양손과 무릎으로 기었다.
이래서 교단의 복장이 검은 옷이었군.
그러나 불평할 여유는 없었다.
“초상화가 열려 있네요.”
잔뜩 끌어올린 감각 덕에 통로 뒤쪽의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줄리안 미네르바의 목소리였다.
뭐야, 폭발 사고가 났는데 교인들한테 붙잡혀 있어야지!
그게 아니라도 한 번 놓치면 좀 시간 간격을 두고 급습하는 게 예의 아닌가?
나는 줄리안의 무례한 태도를 비난하며 기는 속도를 높였다.
으아아, 무릎 나간다, 무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