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갑자기?”
“저번에 숨겨 둔 교단의 옷이요, 미뉴엣이 간단히 찾아냈다고 하더라고요. 그 애가 열쇠를 가져갈 이유는 없지만,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요.”
내가 뭘 감출 곳이라고 해 봐야 보네티 백작저밖에 없으니 위험했다.
기껏 열쇠를 다 모아 놓고 도둑맞으면 되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
크루엘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쥔 열쇠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달링, 열쇠를 놔줘야 가져가죠.”
“…….”
“내가 힘으로 뺏어 가길 바라는 걸 아니죠?”
열쇠를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을 뺄 수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정말 맞나? 진짜인가?
페불라시여,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제발 방관 좀 그만하시고!
옆집은 악마도 계시를 내려 준다던데 하나뿐인 신도한테 정말 이렇게 구실 거예요?
속으로 아무리 애걸해도 답은 없다. 이번에도 내가 판단해야 했다.
역시 마법교로 개종해야 해.
“크루엘로, 내가 믿어도 되죠? 지금 후회할 짓 하는 거 아니죠?”
“그럼요.”
“혹시 미래의 내가 어딘가에서, ‘그날, 나는 크루엘로를 믿지 말아야 했다.’ 같은 내레이션을 하는 것도 아니겠죠?”
“아닐걸요.”
“내가─.”
“나를 믿어요.”
크루엘로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운 듯하면서 진지했다.
나는 그제야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좋아.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믿을게요. 후회하지 않게 해 줘요.”
***
크루엘로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소년은 제 방을 박차고 나와서는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다.
검을 배우며 몸을 단련했음에도 그 잠깐 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아이는 예의도 잊은 채,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이쪽을 쳐다본다.
크루엘로가 눌린 목소리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이미.”
“문 부서지겠다, 로이. 살살 좀 열고 다녀.”
에이미는 곧 놀란 기색을 지우고 웃어 보였다.
콧잔등에 작게 주름이 잡힐 만큼이나 환한 웃음이었으나 크루엘로는 따라 웃지 못했다.
종이처럼 희고 생기 없는 얼굴에 입술은 마르고 갈라졌다.
또, 감기에 걸렸구나.
크루엘로는 입술을 꽉 말아 물었다가 천천히 에이미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며 나온 첫 마디는 그조차 의외롭게도 염려가 아니었다.
“꿈을 꿨어.”
“어?”
“에이미, 네가 쓰러졌는데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어. 내 생일날…… 그랬는데, 장례, 식이 열렸어. 비가 엄, 청 왔는데, 네가…… 없어서 아무도 우산을 씌워 주지 않아서…….”
무서웠다.
에이미가 죽은 게 슬프기보다는 이 애를 평생 볼 수 없다는 게 끔찍하게 무서웠다.
그 감정이 너무도 지독한 탓에 악몽에서 깨고도 크루엘로는 한참 울었다.
이 애의 고통보다도 제 아픔이 훨씬 컸다.
그저 꿈이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려 해도 아이는 알고 있었다.
만약에 그게 현실이었더라도, 에이미가 정말로 죽었더라도 크루엘로는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라고.
저는 죽은 여자아이보다도 스스로를 더 가여워할 거라고.
그게 못 견디게 미안했으나 그마저도 에이미가 멀쩡한 모습을 보고서야 든 감정이었다.
“미안해, 에이미.”
“뭐가?”
“……말 못 해.”
제 추악한 마음을 도저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걸 알게 되면 아무리 에이미라도 제게 질려 버릴 테니까.
여자아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우뚱거렸으나 다정하게도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사춘기 아이의 비밀은 지켜 줘야 한다고 하더라.”
평소라면 또 육아 책을 봤냐고 타박할 상황인데도 남자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코끝이 맵다.
크루엘로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고개를 수그린 채 눈물을 참았다.
에휴, 한숨을 내쉰 에이미가 크게 양팔을 벌렸다.
“안겨.”
놀리냐고 화를 내야 할 타이밍인데, 크루엘로는 속절없이 그 품에 이끌렸다.
훌쩍,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라 에이미는 익숙하게 아이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러며 한참을 있어도 크루엘로는 도무지 진정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에이미가 아이를 떼어 냈다.
“에이,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이거 한번 봐봐.”
크루엘로는 얼떨결에 에이미가 건넨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빼곡한 설명과 함께 웬 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지?
“끝내 주지?”
자부심 넘치는 물음에 크루엘로는 뭔지도 모르고 고개부터 끄덕였다.
“네 생일 전날에 완성될 거야.”
“완성…… 되다니?”
“부실한 로열샌드 경의 인맥과 돈 반, 공기 반인 로열샌드 경의 지갑을 탈탈 털었어. 너한테 잘 보여야 하지 않냐고 물어보니까 저항을 못 하더라.”
상대가 제 아버지인데도 에이미는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진검을 가지고 싶댔지? 숙부님이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안 사 준다고.”
“아.”
“내가 선물로 주면 그걸 설마 뺏기라도 하시겠어? 휘두르는 건 허락을 안 해 주시겠지만.”
에이미는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폈다.
“내가 들인 돈과 정성이 아까워서라도 그전까진 못 죽는다. 기다려 봐, 생일날 짠하고, 선물해 줄 테니까.”
“에이미…….”
“그러니까 넌 내 걱정하지 말고, 그냥 기대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평범한 어린애들처럼 말이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크루엘로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기도 했고 이유 없이 서럽기도 했으며 또 마음이 벅차오르게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 자란 소년은, 그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꺼내놓는 데 부끄럼을 느꼈다.
“생일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뭐? 지금 주문 넣었는데도 늦을 뻔했거든! 귀중품은 원래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는 법이야, 바보!”
“……에이미.”
“어, 어. 바보라고 해서 우는 거 아니지? 바보 아니야, 보배야, 내 보배. 착하다, 로이. 응?”
“애, 취급…… 하지…….”
안 되겠어.
더 참지 못하고 크루엘로는 매달리듯 에이미를 끌어안았다.
조금 전 떼어 내진 것이 서러웠기에 아이의 손끝엔 절박한 기색이 묻어났다.
에이미는 당황한 듯하면서도 다시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미안해, 에이미.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못돼서 미안해.”
“그건 또 무슨 소리람. 그 단어들은 네가 차지하기엔 너무 수준이 높아, 좀 더 사회의 찌든 때를 묻히고 오도록 해.”
“너는 아픈 와중에도 내 선물을 준비해 줬는데, 난, 꿈에서 난…….”
“장례식에서 내 욕이라도 했어? 에휴, 했으면 어때. 괜찮아, 착한 사람도 실수를 하거든.”
“나, 안 착해. 하나도 안 착해. 그래서 벌을 받으며 살아온 거야.”
“뭐야, 또 어떤 강아지가 너한테 헛바람을 넣었어?”
에이미는 에휴, 꼭 어른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크루엘로의 손을 꼭 잡은 채 포옹을 풀고는 소파로 향해 걸었다.
나란히 앉아서 여자아이는 일단 남자아이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내 말을 믿어, 로이.”
다정한 목소리에 재차 울음이 차오르려던 찰나.
“적어도 내가 너보다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성숙하잖아. 저택의 다른 사람들보다도 그래, 내가 제일이라고.”
“어, 어……?”
“생각해 봐, 아카데미 교수랑 아카데미 1학년생이 있으면 누구 말이 정확할 것 같아?”
“교…… 수?”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이 더 신빙성 있지!”
그게 옳은 논리인가?
크루엘로가 눈을 깜박였다.
“네가 얼마나 착하고 다정한지 내가 알아. 내가 그렇게 믿어. 그러니까 그건 진짜야.”
“하지만…….”
“설령 못됐으면 어때. 앞으로 너는 점점 더 좋은 사람으로 자랄 텐데.”
“…….”
“착하고 멋진 어른이 될 거야. 그렇게 믿어, 크루엘로.”
“아.”
“그러니 너도 너를 믿어 줘.”
햇살 같은 미소에 목이 메여, 크루엘로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에이미는 일부러 유쾌한 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에이, 분위기 이상해졌네. 우리 차나 마시자, 다 식었겠다.”
그렇게 말하며 소녀가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크루엘로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찻잔을 확인했다.
붉은 액체. 다른 홍차보다 유독 짙은 색의…….
‘베이더스?’
그걸 알아차린 즉시, 이상하게 가슴이 조여 왔다.
쿵쿵, 진정된 줄 알았던 심장 박동이 거세게 요동친다.
크루엘로는 제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에이미의 손끝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잔으로 향해 가던 에이미의 손가락이 돌연 방향을 틀었다.
“로이, 네 차가 더 맛있어 보이는데 나 그걸로 마실래.”
“어?”
여자아이가 맞은편의 잔을 쥐었다.
그 순간, 수천 장의 유리가 박살 나는 것처럼 크루엘로의 머릿속에 요란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독한 두통, 불안, 두려움, 공포.
“안 돼!”
“로이?”
성인의 기억과 아이의 기억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다.
크루엘로는 에이미의 손을 붙든 채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걸 마시면 안 돼. 먹지 마, 안 돼! 에이미, 안 돼.”
마시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음에도 자꾸만 불길함이 치솟았다.
‘저 차를 없애 버려야 해!’
비이성적인 강박에 사로잡혀, 소년은 에이미를 대신해 잔을 쥐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 액체를 입가에 흘려 넣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에이미의 손이 아이를 가로막았다.
“이거 놔, 에이미! 나는…….”
마음이 급해진 크루엘로가 화를 내려던 때, 여자아이가 슬프게 웃었다.
아.
새삼스럽게 크루엘로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에이미의 몸이 너무 작았다.
두 사람의 몸집 차이가 원래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성인이 아이를 내려다보듯 그랬다.
아, 이거 꿈이었구나.
알아차린 순간, 크루엘로는 제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랄 수 없는 에이미를 두고, 저만 혼자 자라 버렸다는 걸 알았다.
에이미의 작은 손은 성인이 된 크루엘로의 손가락만을 겨우 덮고 있을 뿐이다.
그 차이에 목이 막혀 온다.
“네 잘못이 아니야.”
다정한 아이는 이번에도 크루엘로를 달랬다.
“너 때문에 죽은 게 아니니까 원망도 안 해. 나는 여전히 널 믿고 있어, 로이.”
맑고 동그란 눈동자에 크루엘로의 모습이 비추었다.
에이미의 말대로, 그 안에는 단 한 점의 원망도 없었다.
미안함과 자책감과 후회, 그리고 깊은 애정.
기억이라 미화된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온전했다.
“생일 선물, 결국 못 줬네. 미안.”
왜.
“먼저 죽은 것도 미안해. 네가 나 때문에 자책한다는 걸 알았는데 일부러 꿈에 나오진 않았어. 그러면 더 쉽게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왜 너는…….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응, 나도 덜 자라서 한 번씩 그런 실수를 해.”
“…….”
“네가 믿으라고 했으니까, 나도 믿기로 했어. 그리고 실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단 말이야.”
에이미는 크루엘로의 손을 놓아주고는 그의 앞에 섰다.
사내는 앉아 있고 아이는 서 있었기에, 막대한 신장 차이에도 얼추 시선이 맞았다.
“이걸 늦었다고 해야 할지, 이르다고 해야 할지.”
고민하듯 중얼거리다가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크루엘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당겨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열한 번째 생일 축하해, 크루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