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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62화 (62/162)
  • 62화

    “시오라!”

    “네 몸이 혼자만의 것도 아닌데 좀 챙기세요, 보네티 백작님.”

    “허, 너 진짜. ……결국, 이번에도 빚을 졌네.”

    “네가 도와준 거지. 심지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덕분에 잡을 수 있었어.”

    “공작전하께서 나서셨으면 바로 도망쳤을 테니까?”

    “…….”

    “이럴 때 입 다물지 마. 짜증 나니까.”

    미뉴엣은 답답한 듯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난 의심 없이 당하는 것도 싫지만 구질구질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것도 질색이야.”

    “으응?”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물을게, 시오라.”

    미뉴엣의 초록빛 눈동자가 뚫을 듯 나를 직시했다.

    “너, 시오라 벨벳이 맞아?”

    음.

    처음 들을 때만큼 동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답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딱히 농담처럼 말을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미뉴엣의 눈을 보고 웃었다.

    그게 내 대답이었다.

    한동안 오가는 말 없이 정적이 이어졌다.

    곧, 미뉴엣은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응, 언니.”

    “…….”

    나는 시오라 벨벳이 아니라 시오라 보네티지.

    음, 아무렴.

    ***

    “처리했어?”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백작저, 미뉴엣의 방으로 은밀하게 돌아왔다.

    괜히 일이 시끄러워지는 건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가보트가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은신 능력밖에 없는 애를 데려갈 수가 없어서 피아니시모만 빌렸다고 어지간히도 애가 달았나 보다.

    보기도 전에 입부터 열더니, 곧이어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미뉴엣, 너 다쳤어?”

    “조용히 좀 해, 바티. 피만 묻었지,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그게 말이 되냐?”

    성력이 있으면 가능하지.

    나는 남매의 정다운 대화를 흐뭇하게 구경하다가 시선을 멈췄다.

    응?

    “가보트, 네 귀 왜 그래.”

    “아, 별거 아니야.”

    “붕대까지 감아 놓고?”

    가보트의 왼쪽 귀 끄트머리에 상처를 입은 흔적이 있었다.

    저길 다칠 일이 뭐가 있담.

    가보트가 멋쩍게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진짜야. 새로 들어온 하인이 머리를 만져 줬는데 솜씨가 미숙해서 실수한 거지.”

    “우와. 머리카락을 자르다가 귀를……. 듣기만 해도 섬뜩하다.”

    “하도 유난을 떨어서 꽁꽁 싸매 놓은 거고 별로 다치지도 않았어.”

    “다음부턴 그 사람한테 맡기지 마.”

    “당연히.”

    미뉴엣에게 답하고 그는 다시 내 쪽을 바라봤다.

    “시오라, 너도 고생했어.”

    “응? 오.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뭐? 내가 그런 말을 왜 하냐? 가족끼린데.”

    가보트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내가 가보트를 놀려 먹을 때 주로 쓰던 말이 이렇게 돌아오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보트도 성장하는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뭐야, 가족끼리는 사과만 되는 거야?”

    “음, 이건……. 몰라, 가족이니까 더 해야 하는 말이지.”

    아직 제 아버지가 날 죽이려던 걸 신경 쓰고 있나 보다.

    실제로 시도도 못 하고 외려 암살당했는데 생각이 과다하게 많은 유형이군.

    그냥 가보트 마음이나 편해지라고 고개를 끄덕여 줬다.

    “맞다, 응접실에서 공작이 기다리고 있을걸.”

    “엥? 내가 아는 그 공작?”

    “한 두 시간 전쯤에 왔나. 올 때까지 기다린대서 내버려 뒀어.”

    가보트가 크루엘로를 안 좋아한다는 거야 지나가던 개도 알 정도지만…….

    이렇게 박대할 수 있을 만큼 가보트의 간이 컸던가?

    나도 모르게 미뉴엣을 쳐다봤으나, 그녀 또한 무감한 얼굴이었다.

    “두 시간이면 별로 길지도 않았네. 잘했어.”

    잘했다고?

    얘네, 알게 모르게 크루엘로한테 원한 쌓고 있었나 봐.

    이 또한 자업자득이노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장난을 조금만 순화하기로 결심했다.

    ***

    응접실로 내려와 문을 열었다.

    어차피 내 기척은 훤히 느껴질 게 뻔해서 노크는 생략했다.

    그러나 뜻밖에 크루엘로는 나를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크루……. 엥?”

    크루엘로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수그린 채였다.

    미동 없는 몸에서 가슴팍만 느리게 오르내린다.

    설마 싶은 마음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봤다.

    “우와, 남의 응접실에서 자네?”

    크루엘로가 자는 걸 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이람.

    보네티 백작저가 많이 편해졌나?

    어릴 적에도 잠자리는 가렸던 것 같은데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아닌가.”

    계속 보고 있으니 눈 밑이 좀 검어진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아레스는 미뉴엣이 죽였고 열쇠는 내가 챙겼는데 왜 크루엘로가 피로한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그리움을 느끼며 나는 잠든 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곱게 닫힌 눈꺼풀에 초승달 모양의 속눈썹도 조용히 늘어져 있다.

    모양새 좋은 입술은 조금도 열리지 않게 다물렸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자는 얼굴은 참 얌전하네.

    나는 픽 웃었다가 아랫입술을 짓누르듯 입을 다물었다.

    아, 기분 이상해. 진짜 이상해.

    뭐라고 할까, 맥락도 없이 마음이 울컥했다.

    이름도 모르겠는 감정에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언제나처럼 감정을 잘 눌러 추스른 직후, 곧바로 그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얼른 깨워 버려야지.

    “일어나요, 크루─.”

    그의 어깨에 닿기 직전, 내 손이 붙들렸다.

    크루엘로의 눈꺼풀이 번쩍 올라갔다.

    동공이 한순간 확대되었다가 느리게 수축하는 모습이 새겨질 듯 선명히 보였다.

    붉은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온다.

    시끄럽게 떠들어 댈 땐 잘만 자더니 깨우려고 하자마자 일어나네.

    말 잘 들어서 좋다.

    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요, 크루엘로?”

    “아.”

    드물게 당황했는지, 그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잠깐…… 졸았네요.”

    크루엘로는 팔을 놔주며 멋쩍은 듯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달링.”

    “아침은 다 갔어요.”

    “그러면 점심? 여기서 식사하고 가야겠네요.”

    “그래요, 드세요.”

    어차피 내 돈이 들어가는 식사도 아닌데 그쯤이야.

    나는 크루엘로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긴장하며 돌아다녀서 그런지, 시오라의 몸이라 그런지 온몸이 저리다.

    으, 피곤해.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등받이에 파묻혔다.

    “일은 잘 해결됐나 보네요.”

    “보시다시피.”

    “솔직히 의외였어요. 나는 달링이 백작에게 끝까지 침묵할 줄 알았거든요.”

    “이해해요. 실은 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거든요.”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미뉴엣의 추궁을 듣고도 처음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캐묻는다고 알려 줄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도 아니었거니와 듣는 것만으로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죽음에 화이트데저트의 원로회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소몬 후작에게 시험을 받는 것도 새벽에 몰래 나다니는 것도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확신하고 있어.”

    “내 말이 틀리다면 입을 다물어도 좋아.”

    “하지만 맞는데도 거짓말을 할 거라면…… 영영 들키지 마.”

    입을 다물고 있는 내게 미뉴엣은 일방적으로 퍼부어 댔다.

    마지막 말을 듣고 나는 입을 열어 물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고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거짓말을 들키면 어떻게 할 건데? 나를 보네티에서 추방할 거야?”

    “…….”

    “미뉴엣?”

    “……아무것도 못 하겠지.”

    “뭐?”

    “그러니까 이렇게 말로만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는 미뉴엣의 얼굴엔 자조가 가득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협박을 했다면 얼굴을 두껍게 하고 모르는 척했겠으나 그 표정에 마음이 약해졌다.

    가보트라면 몰라도 미뉴엣은 친분을 다질 시간도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정이 쌓인 걸까.

    지나치게 물러졌지.

    인지하면서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다 말해 줄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단편적인 정보만 듣고도 납득할 수 있다면.”

    “…….”

    “그러면 복수할 기회 정도는 줄 수 있어, 미뉴엣.”

    미뉴엣은 그러마, 답했고 나는 무대를 마련했다.

    아레스가 교단에 잠입해 들어올 때에 맞춰 기도실에 숨어들었고 예언을 가장하여 전음 주문을 썼다.

    그리고 두 번째 열쇠를 손에 얻었지!

    그래, 난 잘못 없어!

    나는 회상을 끝내고 자신감 있게 고개를 들었다.

    “어쨌거나 결과는 좋았잖아요? 미뉴엣에게 유리한 장소를 고르고 독을 준비하고 미끼로 도망도 못 치게 했는데 날뛴 거 봐요.”

    그 와중에도 미친 짐승처럼 미뉴엣을 공격한 걸 보면, 나 혼자 나섰을 땐 훨씬 위험해졌을 것이다.

    미뉴엣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크루엘로가 함께했을 거란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아무튼.

    “덕분에 내 성력을 들킬 위험도 없었고요. 손도 안 대고─.”

    “말이 길어질수록 변명 같네요.”

    “크루엘로가 꼬여서 그래요.”

    “그러면 휘슬에서는요? 아무런 이득도 없었는데 도와줬잖아요.”

    “뭐야, 이번엔 크루엘로의 세 가지 시험이에요? 나 시험 결과 채점받는 중이에요?”

    “따지려는 건 아니고 그냥.”

    크루엘로는 다리를 꼬며 웃었다.

    “달링은 한 번씩 물러지잖아요. 나한테만 빼고.”

    “아니!”

    뭔 소리야!

    내가 살면서 제일 많이 봐준 게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다.

    말하라고 하면 그 리스트를 A부터 Z까지 말해 줄 수 있지만, 하필이면 상세 내역을 기록한 게 옛날 몸이다.

    억울해!

    나는 뚱하니 그를 노려봤다.

    “어쨌든 남매와 거리를 벌릴 필요가 없어졌으니 잘됐네요.”

    “네?”

    “아레스는 죽었고 이제 원로회에 그만한 암살자는 없으니까요. 평범한 자객은 알아서 호신할 수 있을 거고? 달링이 안심하고 아껴 줘도 되겠어요.”

    웃고는 있는데 비꼬는 말로 들리면 이건 크루엘로가 꼬인 걸까, 내가 꼬인 걸까.

    “그렇죠, 크루엘로도 미뉴엣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세요. 덕분에 열쇠를 받아 왔잖아요.”

    “…….”

    “아, 말 나온 김에 말인데요.”

    나는 주머니에서 두 개의 열쇠를 꺼내 들고 말했다.

    “열쇠는 크루엘로가 보관하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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