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동굴치곤 넓은 편이었으나 그래 봐야 동굴이었고 아레스의 검은 너무 컸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대검을 버리고 단검을 꺼냈는데 투척용으로 쓰던 도구였기에 사정거리가 너무 짧았다.
반면 바람의 정령에게는 공간의 제약이 없었다.
우아한 녹빛의 몸체는 얄밉도록 재빨랐고, 유령처럼 동굴의 벽면을 들락거렸다.
격하게 움직이면서 산소조차 마실 수 없는 아레스에게는 터무니없이 불리한 조건이었다.
“으득!”
그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정령사만 죽으면 끝날 문제였지만, 아레스가 거리를 좁히려고 할 때마다 거센 풍압이 그를 밀어냈다.
사내의 속도가 느려지면 새는 또 공격을 가했고 아레스는 뒤로 물러나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의 반복.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단칼에 끝낼 수 있는데, 그 조금이 어렵다.
더군다나 정령의 성장도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분명히 저 정도 급은 아니었다.’
위협이 될 거리는 진작 조사를 마쳤기에 아레스는 잘 알았다.
미뉴엣 보네티의 솜씨는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정도.
제 아비를 넘어서는 훌륭한 재능이었으나 아레스에 미치기에는 부족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휘슬의 시험장에서 뭘 얻어 오기라도 했나.
아니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다.
‘이대로는 바보짓밖에 안 돼.’
한 번이라도 산소를 마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소란 게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슬슬 숨이 막히나 보네.”
제 정령을 지켜볼 뿐 내내 침묵하던 미뉴엣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유리병, 아레스가 그 정체를 알아볼 새도 없이 병은 떨어져 산산조각 났고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
사내의 눈에 보이지 않던 산소는 독 연기를 통해 시각화된다.
제게서 1m씩 떨어져 있는 보랏빛을 보며 아레스가 실소했다.
미뉴엣 보네티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숨을 들이켜고 싶으면 독을 함께 마셔라.
이쯤 되면 아레스의 머리에도 후퇴란 단어가 떠올랐다.
동굴의 끝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예언은 시간을 말했을 뿐 날짜를 이야기하진 않았으니까 지금은 일단…….
“도망칠 생각이야?”
“…….”
“힘 빼지 말라고 하고 싶네. 이쪽은 동굴을 다 무너뜨려서라도 붙잡을 생각이거든.”
‘젠장.’
아레스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건 제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었으나 알면서도 일그러진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끝에 그분의 계시가 있다.
동굴을 무너뜨리더라도 그걸 얻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인 동시에 아레스는 의문을 느꼈다.
미뉴엣 보네티는 어떻게 제 약점을 아는 듯이 이야기할까.
아니, 애당초 어떻게 여기서 숨어서 저를 기다린 걸까.
“내가, 여기에 올 건, 어떻게, 알았지?”
“미행당하는지도 몰랐나 봐. 이 동굴을 검은 뱀이 은신처로 쓰던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
“미행, 이라고?”
“그래, 이 애한테.”
미뉴엣의 품에서 동그란 새가 머리를 내밀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게 존재감이 흐리다.
아레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령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제 행선지를 말하지 않는데도 따라온 이가 있다는 건 그런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사내는 차마 계시를 의심하지는 못했다.
산소가 부족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제 나이의 절반만 한 어린애한테 속았을 리 없다는 아집도 강했다.
미욱한 이는 결국 어리석은 판단에 이르렀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진전은 없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레스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계속 이대로 버티거나, 독을 삼키면서라도 산소를 들이마시거나, 그도 아니면 다 포기하고 동굴에서 도망치거나.
선택지는 셋이었으나 일평생을 세뇌당하며 살아온 이에게 고를 수 있는 건 하나뿐.
‘조금 정도는!’
아레스는 공격을 피하며 독연기로 달려들었다. 산소와 독을 흠뻑 들이마셨다.
그 판단이 실수란 걸 알아차린 건, 하필이면 그 연기가 폐의 기능을 둔화시키는 독이란 걸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한다.
그는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나를 끌어 올리고 움직였다.
그에게 있는 단검은 총 세 개.
아레스는 첫 번째를 미뉴엣 보네티에게 던지며 도약했다.
공격을 빗나가게 한 정령이 그에게 견제성 마법을 퍼부어 댔다.
제 몸을 보호할 생각도 없이 아레스는 칼날 같은 바람에 마구 베이며 천장에 두 번째 단검을 집어 던졌다.
이어 거대한 낫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덮쳐든다.
사내는 위로 뛰어오르며 피하고는, 천장에 박아 넣은 두 번째 단검을 붙들어 매달렸다.
빙글, 반 바퀴를 돌아 동굴 천장을 박차고 단검을 빼내며 미뉴엣에게 달려들었다.
아레스가 예상한 대로 정령은 다시금 그에게 압력이 센 바람을 퍼부었다.
버티지 않고 위로 뛰어오르며 그는 두 번째 단검을 다시 동굴의 천장에 박았다.
제법 가까워진 거리, 어린 정령사는 그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사내는 두 번째 단검에 매달린 채 세 번째를 꺼냈다.
검날에 금이 가도록 마나를 불어넣고 그걸 미뉴엣 보네티의 위쪽으로 던져 버리자.
“무슨……!”
콰과광, 동굴 천장의 일부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동굴은 비좁았고 정령은 위에서 내리찍는 바위 더미를 막아 내지 못했다.
정령사에게 타격이 가자 독수리는 그대로 역소환됐다.
주위로 독이 섞인 산소가 돌아온다.
승리의 전리품치고는 참 가혹한 보상이었다.
“헉, 헉.”
아레스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동굴 바닥에 착지했다.
잔뜩 들어 마신 독 기운에 머리가 어지럽고, 무리하게 마나를 끌어 쓴 탓에 전신의 근육이 당겼다.
두 발로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울 정도였다.
그러나 아레스에게 쉴 여유는 없었다.
천장 일부분이 뜯겨 나간 충격 때문일까, 동굴 전체에서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잘못하면 그대로 무너질지도 모른다.
사내는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어차피 동굴을 나가더라도 이 상태로는 살아남지 못할 테니 기댈 곳은 하나뿐.
그러나 이제 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동굴에서 한 제 판단은 다 어리석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동이 트는 새벽, 뱀의 독샘이 흐르는 동굴로 향하라. 그곳에 바라는 결과가 있을지어다.]
모든 걸 알고 계시는 분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계시를 내렸다면, 이 끝에서 저는 죽지 않으리라.
평소답지 않게 사내의 걸음은 위태로웠고 이따금 비틀거리고 몇 번씩 쓰러졌다.
나중에는 다리 아래로 감각이 아예 사라져서 아레스는 엎어진 채 기었다.
이 끝에 뭐가 있을지, 어떤 결실이 있어야 제 평생의 불안을 일시에 잠재울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기대감은 이루 말할 것 없이 거대했다.
몸은 고통스러웠으나 들뜬 심장은 점차 박동을 더해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굴의 끄트머리에 새어 나오는 빛을 목도했다.
[바라는 결과가 있을지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고통도 잊었다.
머리는 기대로 물들고 마음은 환희로 차오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침내 그가 원하던 곳에 다다랐을 때.
“바라는, 결, 과가…….”
아레스의 눈앞을 가득 채운 건 동굴의 호수.
빛은, 천장에 뚫린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구멍에서 쏟아졌다.
호숫물은 아름답고 너무도 맑았으며.
그래서 죽어 가는 아레스의 모습을 여지없이 비추었다.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초라한 사내.
“아.”
그의 입에서 허망한 숨이 떨어졌다.
“속, 았…….”
말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아레스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본인의 죽음이었다.
사내의 머리가 툭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은신을 풀고 걸어 나왔다.
비참한 꼴로 죽은 이는 눈도 감지 못해, 죽기 직전의 절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자업자득이지.”
이자가 죽인 이가 어디 한둘인가.
보네티 백작은 악인이었으나 무고한 피해자도 많았다.
나는 약간의 연민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옆에 쭈그려 앉은 건 가져갈 게 있어서였다.
성력을 끌어 올린 채 나는 아레스의 몸 전체를 유심히 살폈다.
머잖아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위치는 왼쪽 가슴.
나는 아레스의 셔츠를 젖히고 성력을 그 안으로 흘려보냈다.
천천히 박동을 잃어 가는 사내의 심장에서 녹색 열쇠가 밀려 나온다.
손끝으로 그 끄트머리를 쥐고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입천장에 이어 심장이라니.
“으, 진짜 취향하고는.”
열쇠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기분상 나는 손을 탈탈 털었다.
아무리 들키기 싫어도 그렇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지,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그 처참한 꼴을 다시 내려다보니 불쑥 의문이 머리를 들었다.
“……그깟 계시가 뭐길래.”
아레스를 속인 건 나였으나 그가 이토록 맹신할 줄은 몰랐다.
그저 꾀어내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 남자는 뭐가 그리 간절했길래 그토록 추상적인 말에 붙들려 여기까지 온 걸까.
도대체 뭘 바라고?
에휴.
산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데 죽은 사람을 어떻게 알아.
나는 잡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열쇠를 넣으니, 새삼 실감이 났다.
“이제 두 번째.”
겨울이 저물어 가는 시점에 두 번째면 꽤 빠른 거겠지.
아레스의 열쇠까지는 퍽 순조롭다.
나이젤리아도 순순히 열쇠를 내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나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뒤쪽에서 난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여자.
“고생했어, 미뉴엣.”
미뉴엣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으나 그녀가 몸을 물렸다.
“됐어.”
“음. 그럼 바로 치료해 줄까?”
“다 차려 준 식사를 제대로 받아먹지도 못한 판에 치료는 무슨.”
스스로한테도 가차 없군.
“네가 다 해 놓고 뭘?”
“마지막에 방심했잖아. 아니, 경험 부족이라고 해야겠네. 까딱했으면 그대로 도망쳤을 거야.”
“음. 만일을 떠올리며 불필요하게 가책하는 건 너답지는 않네.”
“뭐?”
“즐겨! 다 끝났잖아.”
“너…….”
미뉴엣이 당황한 틈을 타, 나는 잽싸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성력을 밀어 넣었다.
주인을 닮아 유능한 힘은 미뉴엣의 몸을 한 바퀴 돌더니 상처를 깨끗이 지워 냈다.
음,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