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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59화 (59/162)

59화

어쨌든.

나는 차례로 세 개의 문장을 읊었다.

“나는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나는 감옥에 갇힌 비밀 조사관이 죽지 않도록 보살피겠노라 맹세한다.”

“나는 언제나 눈앞의 사람에게 협조하겠노라 맹세한다.”

딜런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순순히 응했다.

맹세를 마친 즉시, 허공에 떠올랐던 사슬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 혀뿌리에 자리 잡았다.

퍽 아파 보이는 모양새에 그가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읍, 우읍!”

“엄살 부리지 마. 뭐가 들어온 느낌도 안 들면서.”

“아, 그렇군요.”

맹세는 상당히 쓸모 있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큰 주문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효 기간이 일주일도 안 된다.

사람에 따라선 한 시간 만에 풀려 버리기도 해서 웬만하면 쓰지 않지만, 이 남자를 보라.

마법을 익힌 흔적은 한 톨도 없는 데다가 젊고 무능력하고 경솔하다.

그런 주제에 지위는 높다니, 누가 봐도 낙하산! 인 건 중요하지 않지만 아무튼.

주문이 평생 갈 거라 속여 넘기기엔 좋은 상대였다.

“저, 그런데 제가 맹세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궁금하면 해 봐.”

나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고 딜런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만하면 대충 일단락된 것 같고.

예상치 못한 일로 허비한 시간이 꽤 크다.

일단 돌아갔다가 다시 올까 고민하던 때.

“저기, 어차피 이제는 한 배를 탔다고 말해도 되는 마당이니 말입니다만.”

“뭐, 결박 풀어 달라고?”

“아, 아니요! 그냥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불안해하는 딜런의 얼굴에서 나는 좋은 예감을 읽었다.

말해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보를 유출했다는 원로님이 혹시 아레스 님입니까?”

이런 상황이면 보통 큐딜을 의심할 만한데 난데없이 아레스?

눈을 가늘게 뜨자 딜런은 더 초조해진 듯이 채근했다.

“아니지요? 다른 분이 그런 거지요?”

“10원로와 친분이 있나?”

“…….”

“입 다물면 이쪽에도 대답해 줄 의리는 없는데.”

“안 믿기시겠지만, 실은…… 제가 교단에서 좀 겉도는 편입니다.”

안 믿기기는.

지금까지 한 말 중에 제일 믿음직스럽다.

“돌아가신 제 할아버님이 대원로님의 친구분이셔서 대원로님께서 좀 챙겨 주신 걸 그렇게 질투를 하더라고요.”

“잡설은 됐고. 10원로랑은 뭔 상관인데.”

“아레스 님은 겉도는 저를 유일하게 챙겨 주신 분입니다.”

그냥 들어서는 ‘악당에게도 좋은 구석이 있었어!’라는 감상이 나올 법한 말이나,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뭐랄까, 잘못 엮일까 봐 제 안위를 걱정하는 것 같은데.

“아레스가 도망자가 되고 나서 그 친분이 독이 됐나 봐?”

“그런 감이 없잖아 있죠.”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왜 그렇게 걱정해. 그 이후로 더 지은 죄가 있는 게 아니면.”

움찔 떨리는 딜런의 어깨를 보니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지시받은 게 아니라 교단이 원하는 바를 알아서 수행한 걸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 득이 되면 받아주거든요.”

어떻게 알고 신전으로 향했나 했더니.

“설마 아레스한테 교단의 정보를 퍼 준 게 너야?”

“그, 그럴 리가요! 터무니없습니다!”

“그러면 뭔데.”

“……교단으로 들어오는 문을 살짝 열어 드린 정도죠. 그냥 공기를 좀 환기할 겸? 기도만 드리고 가신다고 하기에, 헤헤.”

우와, 돌았나 봐.

나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팔짱을 낀 채 대화를 듣던 크루엘로도 가볍게 웃었다.

“10원로가 복권할 줄 알고 빚을 지워 둔 거로군.”

“우리한테 그런 거 말해도 돼?”

“헤헤, 신관님들이시니까 원로분들 귀에 이 일이 들어갈 리는 없잖습니까.”

“흠.”

“그래서 말인데 제보한 게 아레스 님은 아니겠지요?”

“모를 일이네. 우리는 익명의 제보를 받아 움직였거든.”

크루엘로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딜런의 낯빛은 단번에 사색이 되었다.

“호호혹시 정말 그런 거라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 제대로 도와드리지도 못할 겁니다! 살려 주십시오!”

“다음에 안 열어 주면 되잖아. 문 한 번 열어 준 걸 설마 들키겠어?”

“한 번이 아닌데…….”

“심지어 여러 번이야?”

이 사람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짱 있는 미치광이였군!

“실은…… 조금 뒤에도 10원로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문을 슬쩍 열어 놓으러 가야 하는데.”

딜런이 눈동자를 살살 굴리며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그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제 목이 덜렁덜렁해졌으니까 불편할 일 없이 아레스를 좀 치워 달라는 말이지?

나는 크루엘로와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해가 뜨려면 시간이 조금은 남았으니까.

“도움받은 입장이니 그 정돈 봐줄게. 안내해 줄래?”

우리는 아레스의 살인 청부에 응해 주기로 했다.

공짜 열쇠 감사합니다.

***

교단의 본거지에 잠입해 들어온 첫날인데 우리는 사방팔방을 누볐다.

이번에 향한 곳은 스테인드글라스의 뒤쪽에 숨겨진 공간.

대원로의 허락을 받아야만 올 수 있다는 특별한 기도실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거대한 여성체 석상과 앞에 놓인 제단이었다.

석상을 중심으로 공간은 두 개의 층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기도를 올리는 곳은 1층 같았고, 2층에서는 밑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와 안쪽에 숨었다.

오래된 신전─여긴 유사 신전이지만─들이 다 그렇지만, 페불라 신전과도 구조가 흡사해서 괜히 찝찝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석상을 노려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해 놓고도 딜런은 초조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말로 주의하셔야 합니다. 원래는 대원로님의 저택을 통해서만 올 수 있고, 저는 숨겨진 길을 통해 온 거거든요? 제가 이 길을 안다는 것도 모르시니 각별하게 신경─.”

“아, 조용히 좀 해 봐. 이러다 아레스 오는 소리도 못 듣겠어.”

“정시에 딱 맞춰 오시니 괜찮습니다. 제가 괜히 이러는 줄 아십니까, 허가받지 않은 신도가 들어오면 즉시 감옥에 처박히는 곳이니 그러죠.”

“그렇게 중요한 곳 같아 보이진 않는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여기서만 계시를 들을 수 있다니까요?”

“신도 아니고 실존하지도 않는 악마를 섬기면서 계시는 무슨.”

보나마나 선조가 적당히 조작해서 계시인 척한 걸 믿은 거겠지.

모욕감을 느꼈는지 딜런이 부들부들 떨었다.

항변하고 싶은데 참는다는 느낌이다.

음.

“계시를 받은 사람이 살아 있어?”

“그건 정말 때려죽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바본가, 그게 있단 말이랑 뭐가 다르지.”

“…….”

“대원로?”

“…….”

“2원로?”

딜런의 어깨가 움칠했다.

흠, 나이젤리아가 계시를 받았군.

그래서 교단 내 영향력이 대원로보다 큰 건가?

딜런은 더는 아무것도 들키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귀까지 틀어막았다.

크루엘로가 강제로 그 손을 떼어 내 버렸지만.

나는 다정히 말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2원로도 어차피 사기 친 걸 테니까.”

“사기가 아닙니다! 사기를 칠 거면 다른 교인들도 다 듣게 치지, 뭐 하러 2원로님만 들을 수 있답니까?”

“2원로도 속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럴 리 없어요. 머릿속으로 계시가 바로 들리는데, 이쪽 기도실에는 마나의 흐름도 둔화하여서 텔레파시 마법 같은 섬세한 건 못 쓴단 말입니다!”

“진짜예요?”

크루엘로를 보며 묻자, 그는 마나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조금 뒤 그가 눈가를 찡그렸다.

“마법 저항력이 더 세긴 하네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성력을 움직여 보았다. 잘 나오는데?

시험해 볼까? 텔레파시 마법은 아니지만 비슷한 건 있다.

─3주문, 전음signal.

하얀 나비 모양으로 형상화된 내 성력이 크루엘로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오른손 들어요.]

[왼손 들어요.]

[왼손 내리지 말고 오른손 내려요.]

[오른손 올리지 말고…….]

“언제까지 할 거예요?”

“어쨌거나 잘 들리나 보네요.”

“……실례지만, 지금 두 분이 뭘 하신 건지?”

“성력 테스트. 잘 돼. 오히려 평소보다 수월한 것 같은데.”

내 성력도 청개구리인가?

딜런이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럴…… 리가? 성력을 제일 먼저 막았다고 들었는데요. 거짓말이었나? 그분께서 악마가 아니라 신이셨나? 악신, 악, 또 왜 때립니까!”

“기분 나쁜 말을 들어서.”

“제가─.”

“입 다물어.”

크루엘로가 딜런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한 걸음을 더 물러나 1층에선 보이지 않도록 숨고, 숨을 죽였다.

그러는 동안 크루엘로가 딜런을 재웠다.

아까는 금방 깨어났지만, 이번엔 잘 조절했겠지.

자칫 그가 변덕을 부리면 우리만 곤란하다.

곧, 우리가 들어온 비밀 통로 쪽에서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2m를 넘을 듯한 키와 거대한 체격의 사내.

덩치를 보면서도 놀랍도록 기척이 희미했다.

그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는데, 선이 굵었고 기이할 정도로 이목구비의 대칭이 잘 맞았다.

추적을 피해 다니느라 지쳤는지 눈 밑은 거뭇했으나 눈빛은 말도 안 되게 형형했다.

누가 봐도 10원로, 아레스였다.

그를 시험해 볼 겸, 나는 아래층으로 손톱보다 작은 돌 부스러기를 던져 보았다.

그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휙, 아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검을 뽑아 들진 않았지만 한껏 예민해진 맹수가 주위를 살폈다.

희번덕거리는 눈은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꽤 먼 거리에 있는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도 안 되게 예민하네.

나는 숨을 죽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도주 중이라 더 민감한 듯했다.

그런 인간이 교단에는 왜 기어들어 오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골치 아픈 조건이다.

“……착각이었나.”

주위 경계를 마치고 아레스는 제단 앞에 섰다.

사내는 꿇어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눈을 감았다.

겉모습만 봐서는 몹시도 신실해 보이는 기도였다.

뭐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한동안 기도를 하다가 들어왔던 자리로 돌아가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급하게 굴었다가는 아예 놓쳐 버릴 게 뻔했다.

아레스는 격일마다 찾아온다고 들었으니 다음 기회도 금방 오겠지.

그가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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