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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58화 (58/162)

58화

남자의 기세가 급격히 온순해졌다.

“헤헤. 농담이었습니다, 아시죠?”

“네 농담 재미없다.”

“예에, 다음엔 연습해 놓겠습니다.”

“다음이 있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해?”

크루엘로가 슬쩍 책상을 단검으로 그으며 분위기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에이, 다음, 다음이 왜 없습니까! 우리 이러지 맙시다. 제가 아는 게 많거든요, 저기, 그러니까 일단 그 검은 집어넣으시고─.”

비로소 인질의 자세가 되었군.

직급이 위쪽인 듯하니 용도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나는 당장 급한 사정부터 처리했다.

“내 동료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비밀 조사관이 갇혀 있다는 감옥은 본거지의 커다란 문을 나와 더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다른 교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지 딜런─사내의 이름─은 일부러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크루엘로의 마법은 구조 요청 신호를 자기만족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등 뒤에 단검을 대고 있던 것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뒤늦게 주제를 파악한 딜런은 입을 다물고 한층 더 공손해졌다.

마침내 지하 계단을 다 내려가자, 그 끄트머리에서 사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벽에 달린 사슬 때문에 양팔을 벌린 사내가 축 늘어져 있었다.

고문의 흔적은 없었지만, 싸우다가 다쳤는지 부상의 정도가 상당했다.

“그나마 숨은 쉬고 있네.”

크루엘로에게 눈짓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딜런을 기절시켜 한곳에 구겨 두었다.

우리는 집무실에서 챙겨 온 열쇠로 잠금을 풀고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 조사관의 상태를 살피려던 순간, 툭 하고 그 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연미색 돈주머니.

그리고 그 안에서 금화가 와르르.

나는 홀린 듯이 그 모양새를 바라보았다.

“…….”

아차.

고개를 퍼뜩 들었을 때, 크루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아주 묘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아, 그냥 본 거예요!”

“음.”

“아무렴, 이 상황에 저게 갖고 싶어서 쳐다봤을─.”

“으으윽.”

그 순간, 의식을 잃었던 비밀 조사관이 깨어났다.

하필 이 타이밍에 정신을 차리냐.

원망스러웠지만 따질 수도 없다.

나는 조사관을 쳐다보고 한숨을 삼켰다.

“여긴…….”

중얼거린 사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곧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는 우리를 노려봤다.

“죽, 여라. 교단 놈들. 날 살려 둬도 아무것도 얻어 갈 게 없을 것이다!”

음. 아까 딜런이 내뱉은 대사와 대충은 비슷한데도 느낌이 전혀 다르군.

“돈은 얻어 갈 수 있겠던데.”

말해 두는데 내가 한 말 아니다. 크루엘로가 말했다.

“돈……?”

“자, 자, 일단 오해부터 풀자고.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야.”

“개소리! 그 더러운 옷을 입고 하는 말을 믿을 것 같은가!”

“그 더러운 옷 그쪽도 입고 있어.”

같은 방식으로 잠입했는지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그는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도록 거세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맞지는 않았다.

내가 물러나기도 했고 크루엘로가 소매로 막아 주기도 했고.

“귀가 썩는다. 헛소리로 현혹하려 들어도 소용없으니 죽여라.”

한 음절 한 음절을 씹어 말하고는 그가 눈을 감았다.

흠.

살면서 남의 침을 맞을 뻔한 경험은 처음이야.

약간 짜증이 나니까 사내의 열린 품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뒤져 보지도 않았다.

뭐, 목숨을 포기한 사람이니 이쯤은 해도 되겠지.

“뭐, 뭐 하는!”

“죽이라며. 일단 유품 좀 챙길게.”

“하!”

그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많은 게 들어 있지는 않았다.

아까 본 돈주머니와 교단의 패.

그리고 조그만 패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백옥에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비밀 조사관이란 증거인가 보네.”

사내는 눈을 도로 뜨고는 나를 거세게 노려보고 있었다.

으득, 이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다.

치아는 평생 쓰는 건데, 낭비가 심하네.

“어차피 그것만으로 알 수 있는 건 없어.”

“안주머니에 쪽지도 있어요.”

“아, 놓칠 뻔했는데 감사. 응? 아무것도 안 써져 있는데요?”

“비밀 조사단은 정보를 교환할 때 레몬즙을 사용한다고 하더라고요.”

크루엘로가 허공에 불을 띄워 주었다.

빈 종이를 가져다 대자 신기하게도 글자가 나타났다.

읽을 수 있게 됐어! 하지만 말 그대로 읽을 수만 있었다.

「겨울. 가장 낮은 곳. 아리스타타.」

이게 뭔 개소리람.

인간적으로 암호를 이중으로 걸어 놔도 되는 거야?

“푸흐흐, 진짜로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힘들어서 숨도 고르지 못하면서 조사단은 나를 열심히도 비웃었다.

어쨌거나 이쯤 되면 악당으로서 할 만한 일을 다 했으니, 나도 역할을 바꿔야 한다.

혹시 가면이 틀어지지 않았나 확인하고 나는 박수해 시선을 끌었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성력을 모았다.

이게 뭐게.

“그, 건!”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렇지, 네크로맨서 집단에서 성력을 쓰는 것보다 더한 신분증이 어디 있어.

상대의 말투가 바뀌었다.

“신전에서 나오셨습니까?”

“비슷해.”

“하지만 신전에서 어떻게 아시고……?”

“제보를 좀 받았거든. 이 옷이랑 패도 같이 받은 거고.”

“그렇군요. 신전에도 제보가 들어갔군요. 실은 저희도 익명의 제보를 받고 움직였습니다.”

나이젤리아가 그쪽에도 씨를 뿌렸나.

정말 교단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우리가 아군이란 걸 확인하고 사내의 눈빛이 빠르게 선량해졌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두 분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치료해 달라고?”

“아니요, 여기서 성력을 쓰시는 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조심하셔도 눈치채는 사람이 나올 테니까요.”

고위 주문을 남발하지만 않으면 안 들킬 텐데.

“저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 직속 선배께 제 로브를 꼭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건 왜?

의아해 쳐다보자 크루엘로가 일단 그의 겉옷을 벗겼다.

꼭 내 보좌관 같아서 잠깐 기분이 좋아졌다.

“안쪽에 교단에서 얻은 정보를 적어 두었습니다. 특수 처리한 용액으로 적어 지금은 보이지 않겠지만요.”

“레몬즙?”

“아니요, 그건 접선 장소를 알릴 때만 씁니다.”

오, 뭔가 본격적인 냄새가 났다.

꼭 전해야 한다는 걸 보면 교단에 대한 중요한 정보겠지.

이번 일을 도와주면 나도 같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선배가 누군데?”

“그건 모릅니다. 단원의 신원은 단체 내에서도 극비인 터라 단장님만 알고 계십니다.”

“모르면 어떻게 전해 주라고.”

“10일 뒤가 접선일입니다. 쪽지에 적힌 장소로 가시면 선배가 나올 겁니다. 그 장소는…….”

그리고 중요한 대목에서 말이 끊겼다.

의식을 잃은 상대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슬에 매달려 있는 통에 바닥에 엎어지지는 않았지만, 음.

“저기?”

“…….”

“저기요? 아직 장소 못 들었는데요? 저기? 정신 좀? 아쉬운 건 내가 아닌데?”

잡고 흔들어도 사내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왜 내가 아쉬운 것처럼 상황이 이렇게 된 건데? 때리면 일어나려나?

나는 일단 주먹을 움켜쥐었다.

휘두르기 직전, 크루엘로가 입을 열었다.

“발설 금지 저주가 걸려 있네요.”

“네?”

“비밀 조사단에게 걸어 두는 마법이에요. 잠깐 잊어버린 모양인데 접선 장소를 말하려고 하니 발동해서 기절한 거고요.”

아니, 애당초 듣지 못할 말이었어?

그럼 나더러 어떡하라고.

날짜와 알아먹지도 못하는 쪽지만으로 접선 상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크루엘로의 말대로라면 다시 깨어나도 이야기를 못 듣는다는 건데…….

“살려 놔야 접선 장소에 가서 이야기를 훔쳐 듣든 어쩌든 할 수 있겠네요. 이 사람을 데리고 교단을 나갈 수 있을까요?”

“사슬을 감옥 벽에서 뜯어내면요.”

“오!”

“근데 사슬을 뜯어내면 폭발물이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네요.”

“……내 반지는 못 써요?”

“쓸 수 있어요, 사슬을 뜯어내면.”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상황이 참 엉망으로 맞물렸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당장 사건을 수습하진 못하겠고. 하는 수 없네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요?”

“네. 저기 기어가고 있네요.”

나는 슥슥 소리가 나는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열심히 기어서 도망치는 중인 딜런이 있었다.

언제 깨어난 거람, 꽁꽁 묶인 채로 잘도 움직인다.

“저, 전 도망가려던 게……. 으아악!”

크루엘로의 손짓에 허공으로 들린 딜런이 코앞까지 날아와 엎어졌다.

역시 마법은 멋져.

이쯤 되면 슬슬 마법교로 종교를 개종하고 싶……. 앗, 물론 농담입니다.

아시죠, 페불라 님?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신전이니 로브니 하는 건 하나도!”

“이 사람, 네가 지켜 줘야겠어.”

“예, 예?”

“괜찮겠어요?”

“그래도 지위는 높아 보이잖아요. 더군다나…….”

나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감옥은 퍽 그럴싸한 모양새였지만, 중요한 게 빠졌다.

“경비병 하나 없이 방치된 꼴을 봐요. 소지품을 빼앗아 가지도 않은 걸 보면 제대로 심문할 의지도 없는 거죠. 맞지?”

“그야…… 조사관이 처음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관심은 없죠. 헤, 헤헤. 하도 많이 기어들어 오다 보니까 굶겨 죽인 다음 시체만 치우는 게 깔끔하달지…….”

“그럼 살려 두는 것도 어렵지 않겠네.”

딜런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댔다.

“이 생쥐를 믿을 수 있나요? 차라리 이자를 죽인 다음에, 저 옆에는 식량이나 좀 가져다 두는 게…….”

“미, 믿어 주십시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괜찮아요, 믿음이란 만들어 내는 거니까.”

의아한 듯 크루엘로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말이 더 필요하진 않다.

나는 애벌레처럼 엎드린 딜런의 앞에 쭈그려 앉으며 성력을 끌어모았다.

─5주문. 맹세pledge.

순백의 사슬이 내 주위로 원을 그리며 떠올랐다.

그 기세에 딜런이 쭈그러들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 하는 거야.”

“지, 지금부터 내 말을 따라 하는 거야.”

“……이 말까지 따라 하라는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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