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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57화 (57/162)
  • 57화

    베아티투도를 만들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더니 이런 용도였군.

    모리온을 다룰 수 있는 그릇이라면 베아티투도 또한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검은 뱀의 목적은 죽음을 정복하는 것.

    불사이든, 부활이든 간에 교인들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양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뭐.

    “바라는 결과는 안 나올 테지만.”

    결과는 영생이 아니라 폐허다.

    그 사실을 나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기록을 덮었다가 아차 싶었다.

    이거 나만 읽고 있는 게 아니었지?

    “크루……?”

    고개를 들었으나 크루엘로는 옆에 없었다.

    그는 이미 다른 데를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저놈이?

    읽어 달라고 했으면서 재미없다고 가 버린 거야?

    하기야,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와 누구보다 안 어울리긴 하지만.

    나는 기록을 책장에 던지듯 꽂아 넣고 다시 그를 불렀다.

    “한가해 보이는데 서랍이나 열어 줘요, 크루엘로.”

    “잠겨 있어요?”

    “응, 저기 마지막 서랍.”

    정말로 한가했는지 크루엘로는 곧장 책상으로 다가갔다.

    마디가 도드라지는 길고 흰 손가락이 서랍을 느리게 더듬는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손톱을 보다가 나는 멋쩍어 고개를 들었다.

    음, 서랍을 만지는 게 왜 야해 보인담. 잠깐 미쳤나 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크루엘로가 서랍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더니.

    “못 열어요.”

    “요즘 무능을 고백하는 일이 잦아지지 않았나요?”

    “한 번만 실수해도 파괴되는 구조예요. 그래도 괜찮다면 노력해 볼게요.”

    나는 일단 크루엘로를 서랍과 격리했다.

    서랍 주제에 그렇게 보안이 철저하단 말이지.

    어떻게든 열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 안에 뭐가 있을까. 이걸 열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좋은 생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직감상 그건 아닐 것 같다.

    크루엘로가 움직이려는 듯해서 나는 그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내 의도를 이해하고 그가 선반 뒤로 숨었다.

    나 또한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숨겼다.

    인기척은 어느새 문 앞까지 다다랐다.

    “뭐야, 켄트 이 자식 어디 갔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보아 역시 이 방의 주인 같았다.

    붙잡으러 가려 했는데 몸소 와 주다니 감사.

    “얼씨구, 문도 안 잠그고. 야, 술 퍼마시고 자냐? 집무실 지키랬더니 뭐 하는 거야!”

    “…….”

    “완전히 뻗었네. 쥐새끼 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하여간에. 쯧쯧.”

    30, 40대쯤으로 추정되는 사내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는 책상으로 오고 있었다.

    “아무튼, 요즘 젊은 놈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빠져 가지고 윗사람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마침내 얼굴이 보일 만큼이나 가까워졌다.

    젊은 놈들 운운한 것치고 사내는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진 않았다.

    다갈색 곱슬머리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미간에 주름이 져 있고 행색이 지저분하다.

    밖에서 보면 분명 말단인 줄 알았을 거야.

    그는 설렁설렁 의자를 빼내고는 앉으려다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잊어버리고 닫지 않은 두 번째 서랍이 있었다.

    씁, 실수했네.

    “내가 서랍을…… 열고 나갔던가?”

    “아니.”

    “우읍?”

    나는 곧바로 움직였다.

    일단 그 입부터 틀어막고, 팔을 뒤로 꺾어서는 책상에 그대로 박아 버렸다.

    꺾인 팔에 체중을 실어 누르면 제압 완료.

    “읍! 으읍!”

    사내가 발버둥 치는 동안 크루엘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몸놀림이 좋네요.”

    “그게 다 성……. 음, 아무튼 그것 때문이에요.”

    교인 앞에서 성력이란 정보를 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빈손을 돌리듯 흔들었다.

    반짝반짝, 알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이어서 생선처럼 펄떡거리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좀 묶어 봐요.”

    “읍읍, 읍!”

    손, 발목을 다 묶이고 밧줄까지 입에 문 사내가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크루엘로가 직접 결박한 건 아니었다.

    그가 손짓하니까 허공에 생겨난 밧줄이 춤추듯 움직였을 뿐.

    마법의 한계란 도대체.

    소리가 집무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한 뒤에, 크루엘로가 그의 입을 풀어 줬다.

    퉤, 침이 늘어졌다.

    으으으, 비위 상해.

    눈이 벌게진 사내가 소리쳤다.

    “네놈들, 황실 비밀 조사단에서 나왔으아아, 아파, 아파, 아파!”

    수염을 쭉 잡아당기자 얼굴이 내 쪽으로 딸려 온다.

    고통에 취약하군.

    손을 놓아주자 금세 입이 살아났다.

    “비겁한 것들. 보자마자 고문이라니! 그래 봐야 원하는 건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황실 비밀 조사단이라고 말했지, 왜 그렇게 생각해?”

    “흥,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며칠 전에 붙들린 쥐새끼를 구하러 온 게 뻔하지.”

    오호라,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사람처럼 표정을 미묘하게 바꾸었다.

    말하자면 비밀 조사관 같은 얼굴이었다.

    “내 동료를 어떻게 했지?”

    “내가 말할 것 같으아파파파, 지하 감옥! 감옥에!”

    이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을 윗자리에 앉혀 놔도 이 교단은 멀쩡한 건가?

    갑자기 나이젤리아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라도 갈아엎고 싶었을 거야.

    “조, 좋아! 내게 듣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러면 제안 하나를 하지.”

    “일단 말해 봐.”

    “나도 궁금한 게 있으니 번갈아 한 질문씩 교환하기로 하자.”

    수염만 잡아당기면 대답이 나오는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해 보기로 했다.

    “내가 제안했으니 나부터 질문하지. 요즘 교단에 누군가 침입하는 빈도가 늘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너네 원로가 알려 줬어.”

    “그런 허접한 이간질에 속아 넘어갈 줄 알고!”

    “짠, 이거 봐라.”

    나는 손에 낀 뱀 모양의 반지를 번갈아 보여 주었다.

    게이트 마법이 걸린 마도구가 일반적인 물건일 리는 없으니까.

    과연 사내의 입이 떡 벌어졌다.

    교단이 원로회랑 연결된 걸 알면서 이 반지의 존재도 알고 있다?

    역시 평범한 하수인은 아니란 말이야.

    그의 말투가 급격히 공손해졌다.

    “혹시 어느 원로님께서 저희를 배신하셨는지?”

    “각각 하나씩이라며. 이제 내가 물어봐야지. 저 서랍, 어떻게 열어?”

    “흥, 내가 그걸 진짜로 말해 줄 줄 알았냐? 너희는 평생 열 수 없을 거다!”

    “어휴, 대사라도 참신하게 해 봐라.”

    “말로 해 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대화를 관망하던 크루엘로가 끼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짚 인형이 들려 있었는데 다른 서랍에서 본 물건이었다.

    크루엘로가 더미를 만들 때도 봤었지만.

    “배려해 주면 오히려 얕보는 족속들이라. 고통을 주는 편이 훨씬 수월할걸요.”

    “아, 아무리 수염을 고문해도 내 입을 열 수는 없다!”

    “수염 좀 잡아당긴 게 고문?”

    나지막하게 되묻고는 그가 장난을 치듯 짚 인형의 팔을 잡아 뽑았다.

    우수수, 지푸라기가 쏟아졌다.

    크루엘로는 뽑아낸 팔을 툭, 사내에게로 던졌다.

    “이런 데 있는 사람치곤 순진한 구석이 있어. 지하 감옥은 있다면서 그런 경험은 없나 보지?”

    이어 반대쪽 팔, 왼다리, 오른다리가 차례로 내던져졌다.

    다른 것도 아닌 지푸라기 인형이다 보니까 그 모양새가 퍽 섬뜩했다.

    “뭐. 이 김에 배워 두면 그쪽에게도 좋을 거야. 내가 배워 본 적이 없어 미숙할 수는 있지만.”

    머리와 몸통만 남은 인형.

    크루엘로는 그 머리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허공에 가볍게 던져 올렸다.

    화르륵, 인형이 통째로 불탔다.

    타고 남은 재가 묶여 있는 사내의 위로 떨어지자,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죽어도 상관없잖나? 어차피 불사를 믿는 검은 뱀 교단이니.”

    “그, 그건 그분이 강림하셔야 가능한─.”

    “에이, 왜 그래. 때 되면 ‘그분’이 알아서 부활시켜 주겠지. 안 그래요? 크……. 코드네임 R.”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상황이라 적당히 지어서 불렀다.

    대충 비밀 조사관이면 이런 식의 암호명을 쓰지 않을까?

    크루엘로는 한쪽 눈썹을 까딱였으나 내 의도를 알아들은 듯 반문하지 않았다.

    흠흠, 신난다.

    “자, 그러면 어디부터 해 볼까.”

    크루엘로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칼이 칼집을 지나는 소리가 매끄럽게 울려 퍼졌고, 묶여 있는 교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크루엘로가 한 걸음 다가오자마자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역, 역오망성!”

    “음?”

    “서랍에 역오망성을 세 번 중첩해 그리면 됩니다. 그러니까 원을 그리고 그 안에 거꾸로 된 별을 그린 다음, 가운데 오각형에 내접하는 원을…….”

    “네가 해.”

    한 번만 실수해도 내용물이 파괴된다는데 그걸 왜 우리가 해야 하죠?

    손목을 앞으로 묶은 터라 결박을 풀 필요도 없었다.

    사내는 벌벌 떨며 서랍에 예의 그 문양을 그렸다.

    그러자마자 딸깍,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보자, 뭐가 들어 있나.”

    그를 밀쳐 내고 서랍을 당겼다.

    요즘 접한 것이 다 종잇장이다 보니 이번에도 글씨가 잔뜩 적힌 무언가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건 새하얀 알갱이들을 밀봉한 봉투였다.

    “이건…….”

    “조, 조미료입니다. 헤헤, 교단에서 미각 수행 중인지라 서랍에 몰래 숨겨 두고 써먹었는데.”

    “넌 수프에 베아티투도 넣어 먹어?”

    이거 미친놈 아니야. 말이 되는 변명을 해야지.

    크루엘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베아티투도를 사제복의 주머니에 넣었다.

    물건의 정체를 들킨 사내는 잠깐 낭패한 듯했으나 곧 표정을 바꾸었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이 거만해졌다.

    무슨 맥락으로?

    “후,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그 베아티투도, 얌전히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얼씨구?”

    “가져가셔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증거물을 제출하면 뭐 합니까, 위에서 반려할 게 뻔한데.”

    “확신하는 말투네?”

    “흐흐, 조사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황실에서 이쪽과 부딪치기 싫어한다는 거. 제출하시면 오히려 조사관님들만 슥삭 될 겁니다.”

    “…….”

    “알아들었으면 당장, 이 밧줄부터 풀어! 순순히 내 말을 들으면 살길을 열어 줄지─.”

    “위에다 보고 안 하면 되잖아.”

    “뭐? 그, 그러면 내가 익명의 제보를 해 버릴 수도…….”

    “그럼 널 죽여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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