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유를 모르겠네.
진짜 이 할머니, 왜 이렇게까지 부지런한 거야?
화이트데저트의 피에는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하라는 가훈이라도 새겨져 있나.
나는 떨떠름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나이젤리아가 귀신같이 말했다.
“이해하거라, 나는 흥미 있는 일이 있으면 끝낼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니까.”
“아, 예.”
“그래서 교단에서도 연구 일을 도맡았지.”
앗, 그거 정말 안 궁금한 이야기.
아니다, 중요한가? 혹시 교단 이야기를 더 해 주지 않으려나.
가만히 경청했으나 나이젤리아의 입은 그대로 다물렸다.
적의 입은 좀 가벼워야 하는 거 아닌가, 매력 없어.
“그러면 이번 시험은 뭔가요. 고대 교단별 성력 구분하기?”
“전보다 훨씬 간단할 거란다. 너도 크루엘로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으니.”
앉으란 듯한 턱짓에,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냉큼 소파에 앉았다.
나이젤리아는 나 못지않게 냉큼 말했다.
“내가 왜 신전에 기부금을 내라고 했는지 알겠니.”
“그야……. 잠깐, 이게 시험이에요?”
그녀는 여상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 간단할 거라고 말하더니 성의조차 없어졌다.
어쨌거나 쉬운 문제가 나와서 나쁠 건 없지.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말했다.
나이젤리아가 나를 신전에 보낸 이유라면.
“로 블루를 빼내려고 그랬겠죠.”
“오호?”
“제가 가 있는 동안 생긴 일이라고는 그것뿐이니까요.”
한동안 되짚지 않았지만, 내 신의 성력은 몹시도 은밀하고 자연스럽다.
내 기운은 잘 숨기고 다른 기운은 잘 알아차린다.
시오라의 몸에서는 주문이라도 쓰지 않는 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훤히 느껴질 만큼 로 블루는 천재였다.
어려서 그런지 실전 경험은 부족한 듯 보였으나 능히 중책을 맡길 만하다.
아까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조금 전까지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만, 성녀님께서 혼자 손님을 상대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방금, 신문 중이던 폭도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폭도 감시를 맡고 있던 로 블루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폭도들이 처리되었다.
의도한 거라고 봐야겠지.
내가 마믹을 방문하고, 로 블루가 마믹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실패하더라도 교단은 잃을 게 없었다.
“하수인들을 처리할 빈틈이 필요하셨던 거 아닌가.”
“음. 이걸 맞다고 해야 할지.”
“네?”
아냐? 틀렸어? 진짜?
이거라고 확신했는데?
잠깐, 지금 당황할 때가 아니다.
“아, 무효예요. 저는 그냥 혼잣말한 거라서요. ‘정답!’이라고 외치지 않았잖아요.”
나이젤리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지만, 진실은 진실이다.
“절반은 맞혔다. 하지만 로 블루의 솜씨가 껄끄러워 유도한 건 아니야.”
“으음?”
“교황의 조카를 잘못 건드렸다고 귀찮아지기 싫었을 뿐이란다.”
“교황의…… 조카라고요? 그 성기사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우와. 그 정도 거물이었어?
놀라웠다.
그 배경보다는, 그런 혈연을 가지고도 존재감이 그 정도라는 사실이.
“저번엔 건드렸잖아요?”
“가볍게 핥아 준 정도지.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없잖니?”
이 정도는 뻔뻔해야 악당이 되는 건가.
본인이 ‘가볍게 핥아져’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무튼 정답이란다.”
“……정말? 이렇게 쉽게요?”
“어려운 걸로 바꿔 주랴?”
“감사하다고요.”
나는 냉큼 말했다.
첫 번째 시험의 통과자가 열둘에 두 번째 통과자가 열이라 그랬나.
아직까지는 통과율이 높으니 의심할 거리도 아니다.
나이젤리아는 보상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도 검은 상자였는데 크기는 꽤나 달랐다.
“네가 손에 낀 것과 같은 종류란다.”
“반지겠네요.”
“당분간은 좀 바쁠 예정이야. 마지막 시험은 천천히 기다리고 있으렴.”
전과 마찬가지로 노인은 조금도 미적거리지 않고 나가 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깔끔했다.
나는 곧바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예상했던 대로 안에 든 건 반지였다.
은제 뱀이 손가락을 휘감아 오르는 디자인으로, 뱀의 눈에 박힌 보석에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 반지와 같은 종류라고 했으니.
“……게이트려나?”
대체 어떻게 안 건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큐딜에게도 반지가 마도구란 건 들킬 정도니 더 수준 높은 마법사라면 어떻게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반지에 걸린 마법이 정말 게이트라면, 연결되어 있을 법한 공간도 뻔했다.
검은 뱀 교단의 본거지.
끽해야 지도나 던져 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편리한 길을 내주었다.
“음.”
나는 잠시 고민하며 반지를 노려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가기엔 이 몸이 과하게 믿음직스럽다.
이건 시험도 아니니까 크루엘로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겠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응접실에 배치된 종을 들어 올렸다.
베티를 불러서 화이트데저트에 서신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때.
“누구 부르게요?”
“와, 진짜…….”
뒤에서 들린 목소리가 내 행동을 가로막았다.
휙 고개를 돌리자, 응접실 소파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말해 뭐 해, 크루엘로다.
“안녕, 자기.”
“솔직히 이쯤 되면 스토커 같아요.”
“인정할게요.”
“인정 말고 반성을 하세요.”
“그러기엔 아레스가 시끄럽던걸.”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양, 크루엘로가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이 걸렸다.
“누구요?”
“교단의 하수인들을 직접 처리한 게 아레스예요.”
“실패를 만회하기 바쁘다면서 신전엔 왜? 검은 뱀 교단은 도망자한테도 일을 주나요?”
“지시받은 게 아니라 교단이 원하는 바를 알아서 수행한 걸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 득이 되면 받아주거든요. 이번엔 또 세 번을 성공해야겠지만요.”
“잘 보이려고 신전까지 들어갔다고요?”
“은밀하기론 따라올 이가 없는 암살자니까요.”
따라올 이가 없기는.
아레스는 가보트의 볍씨한테 졌다.
세계 최고의 암살자는 피아니시모다.
“그래서 준비물이 갖춰진 것 같은데.”
크루엘로가 꼰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뱀 모양의 반지에 향해 있었다.
“동행해도 괜찮겠죠?”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에요.”
결심은 바로 섰지만, 행동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휙 사라져 버릴 순 없었으니까.
이미 해가 저물었고 신전에 다녀온 터라, 핑곗거리를 만들긴 어렵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일찍 잘 테니까 자는 중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
“예, 시오라 아가씨.”
불이 꺼지고 침실 문이 닫혔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불을 번데기 모양으로 뭉쳐 놨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꼭 이런 형태가 됐으니까 얼핏 보는 걸론 의심받지 않겠지.
곧이어 침실에 숨겨 놓은 검은 사제복과 로브를 주워 입고 창가로 향했다.
통, 통, 통.
세 번을 두드리자 창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빨리 준비했네요. 너무 일찍 잔다고 의아해하던 사람은 없던가요?”
“내 체력이 허약한 걸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시간이 날 때마다 연무장을 뛰었는데 참 슬픈 일이다.
“검 더 가르쳐 줄까요?”
“쓸 만하게 되려면 몇 년은 걸릴걸요. 됐으니까 출발이나 해요.”
어깨를 으쓱한 크루엘로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반지를 문지르라는 듯이 쳐다봤지만, 음.
“접촉한 상태면 같이 움직이는 거 맞겠죠?”
“그럼요.”
“……크루엘로가 만들어 준 반지랑 작용 범위가 다르면 어떡해요?”
원래 이렇게까지 신중한 타입은 아니지만,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가는지라 영 찝찝하다.
한 줌의 껄끄러움을 지우기 위해, 나는 반지를 낀 손으로 크루엘로의 손을 붙들었다.
손가락을 얽어 단단히 손깍지를 끼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설마 크루엘로의 손만 이동되진 않겠지.
“아…….”
“갑시다.”
반지를 문지르자 곧바로 시야가 뒤집혔다.
잠깐 어지러웠으나 눈을 깜박이자 곧바로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이동하자마자 교도들이 소리치며 달려오는 일은 없었지만, 다른 의미로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음.”
외진 골목이다.
건물 양식을 보면 수도가 맞긴 한데 뭘까.
나이젤리아가 단순히 나를 놀렸을 리는 없으니 그러면.
“거지가 됐나?”
“네?”
“전 재산을 넣어 놓은 계좌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어…….”
“대원로의 저택 근방이에요. 어딘가 연결된 통로가 있을 거예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방금 건 농담이니까요!”
사람이 유머 감각이 없어!
크루엘로의 빤한 시선을 모르는 척하고 나는 뜨거워진 귀를 감쌌다.
그러고는 익숙한 주문을 외웠다.
─2주문, 감각 확장extension.
오감이 활짝 열리고 곧 검은 마나의 꼬리를 잡아냈다.
반지를 문질렀을 때 내가 도착한 그 자리의 정면부.
은근한 흑마법의 기운이 흘러가듯, 스치듯, 그곳을 맴돌고 있었다.
나이젤리아에게 받은 패를 들어 벽면에 가져다 대자, 마나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시야가 한 번 더 울렁거렸다.
“……오.”
이번에 옮겨 온 곳은 어두운 창고.
바닥에 철제로 된 사각 문이 열려 있고, 그 밑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
“턱이 높네요. 갈 수 있겠어요?”
“저는 갓 태어난 알파카가 아니에요.”
내 다리가 나뭇가지인 줄 아나.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계단은 앞뒤로 길게 나 있었고 벽면에서는 마석 램프가 희미하게 빛을 밝혔다.
공기는 이상하게 습하고 내려갈수록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야말로 악의 기지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 채 집중하다 보니 금방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공동의 가운데,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쳐들어야 전체를 다 살필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고전적인 문양으로 가득 찬 문은 아름답고 위압적인 동시에 어딘가 기괴한 구석이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살피자 가운데쯤에 난 둥근 홈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패를 끼웠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 덩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