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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54화 (54/162)
  • 54화

    뺙!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맞아 준 건 이번에도 겨울 살쾡이였다.

    아직도 여기에 있어?

    품에 뛰어드는 고양이를 받쳐 안으면서도 당황해 눈을 끔벅였다.

    곧 저번에 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가 달려가기에 예상은 했지만 역시 시오라 신도님이셨군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프리가 수석 신관님.”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 뒤 나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딱히 바쁜 일은 없었지만,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으니까.

    “실은 기부를 좀 하고 싶어서 왔어요.”

    뒤쪽으로 손짓하자, 함께 온 호위 기사가 마차에서 궤를 하나씩 가져왔다.

    도합 세 개.

    뚜껑을 열자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이 시야를 물들였다.

    “소소하게 준비했습니다.”

    “세상에…….”

    신관의 눈은 동전이 들어갈 만큼이나 커졌다.

    나는 억지로 차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어깨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내가! 이렇게! 대단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돈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즐거운 거지.

    이건 다 크루엘로가 내어준 성금이었다.

    “내가 준 건지 알 것 같은데요. 이러다 내 평판이 좋아져 버리면 어쩌죠, 달링.”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그만큼 크루엘로가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약혼녀에게’라는 말을 넣어 주세요.”

    “빼도 맞는 말이잖아요.”

    내가 이 정도 돈을 기부하려면 전 재산을 다 털고도, 크루엘로에게 받기로 한 재산까지 한 뭉텅이 떼 와야 한다.

    크루엘로가 물어온 제안에 내 돈을 왜 쓴담.

    장담컨대,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기분이 내 돈을 쓸 때보다 수십 배는 좋다.

    “덕분에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겠습니다. 신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기뻐해야지!

    신관의 말에 턱이 치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나는 두 번째 목적을 달성하러 왔다.

    마믹의 거처는 여전히 신전 깊은 곳에 있었다.

    저번 사태로 평판이 좀 좋아지는 것 같더니만, 말뿐이었나.

    똑똑, 문을 노크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마……. 어라.”

    만나기로 한 건 마믹이었지만, 이번에도 그녀 혼자만 있지는 않았다.

    저번에 봤던 성기사, 로 블루가 함께였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지 알 텐데, 눈치껏 좀 혼자 있을 것이지.

    나는 뚱하니 마믹을 쳐다봤다.

    “어서 오세요, 시오라 신도님.”

    “……안녕하세요, 성녀님. 그리고 로 블루 경도요.”

    “다시 뵙습니다.”

    “바쁘실 것 같은데 나가서 일 보셔도 돼요. 신전이 좀 분주해 보이던데.”

    “조금 전까지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만, 성녀님께서 혼자 손님을 상대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음, 그렇구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대화를 나누시면 됩니다.”

    신경 쓰지 않길 바라면, 이 방을 나가 주면 좋겠다.

    어떻게 해 보란 식으로 마믹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눈동자만 굴릴 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혹시 일부러 저러는 건데 내가 눈치가 없어서 모르는 건가?

    설마 나 박대받는 중?

    “이번에는 어떤 일로 찾아 주셨을까요, 시오라 신도님.”

    “으으음, 그냥 기부금도 낼 겸, 성녀님의 안부도 물을 겸?”

    “아, 막대한 성금을 내주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많은 분의 피와 살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신도님.”

    말로는 할 게 없어 신전에 사기를 쳤다지만, 연극배우를 했으면 생계 정도는 보장됐을 거다.

    가식 떠는 솜씨 봐, 위정자가 따로 없네.

    “겨울 살쾡이가 아직 있더라고요. 저번 습격 이후, 신수들의 거처를 옮기셨을 줄 알았는데요.”

    “그건……. 말해도 될까요, 로?”

    “외인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저렇게 꽉 막혀서 뭐에 쓴담.

    마믹 옆에 딱 붙어 있는 목적도 감시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오라 신도님께서는 저번 일을 도와주셨으니 경과쯤은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마믹에게 감시책을 붙이는 건 현명한 일이지.

    머릿속에서 삽시간에 의견이 바뀌었지만 당연하다.

    사람한테는 융통성이란 게 있어야지, 로 블루처럼.

    “신수들은 성하께서 보호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옮겨 갔고 겨울 살쾡이가 마지막 순서입니다.”

    “성……. 교황님이요? 스케일이 그렇게까지 커져요?”

    “실은, 저번의 폭도들도 성하께서 직접 데려다 살피셨습니다. 신문이 끝나 지금은 이 신전에 감금 중입니다.”

    “결과가 안 좋게 나왔나요?”

    “혹시 ‘검은 뱀’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일이 원로회의 소행인 건 빤했지만, 진짜로 교단의 사람을 썼어?

    떠돌이 용병에게 돈을 주고 꼬리를 잘라 낸 건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조심성이 없었다.

    아니면…… 일부러 그 이름이 세상에 나오게 했거나.

    “수백 년간 존속돼 온 네크로맨서 단체입니다. 악마를 숭배하며 죽음을 정복하는 것이 지상의 목적이라고 하더군요.”

    “그 레카논인 척하던 폭도들이…….”

    “예, 검은 뱀이었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수십 년 만에 얼굴을 들이민 곳이 이 신전이라니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신수를 보호한 곳이 여기라 그랬겠죠.”

    “그게 아니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검은 뱀에서는 고대 교단들을 주도적으로 해체해 왔습니다. 개중엔 저희 신전을 이용한 일도 많았지요.”

    그래서 신중하게 반응하려고 했는데.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성기사는 미관상 보기 좋았지만,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열심히 듣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걸 저한테 말씀해 주셔도 되나요?”

    “부디 주의하시길 바란다는 의미로 말씀드립니다.”

    “입을?”

    “‘검은 뱀’ 교단에서 일을 방해한 시오라 신도님께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하.”

    “원하신다면, 당분간 성기사 몇을 붙여 드리려 합니다.”

    “그건 괜찮아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 정도로 막아 낼 수 있는 원한이 아니다.

    보네티에서 하던 것 좀 봐.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 낸 베아티투도를 펑펑 써 재끼던데, 나이젤리아만 아니었어도 진작 암살자를 부대 단위로 보냈을 거다.

    무대고 나발이고 이제 가릴 생각도 없어 보이더만.

    “생각이 바뀌신다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로 블루의 수긍을 끝으로 나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고지식한 성기사를 어떻게 내보낼까.

    해답은 알아서 찾아왔다.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곧 성마른 노크가 울려 퍼졌다.

    “헤일로 2성기사단의 루카스입니다. 긴급히 보고드릴 문제가 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로 블루는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문을 열었다.

    들어온 사람 또한 저번에 본 얼굴이다. 대신전에 사람이 없나?

    그는 로 블루의 귀에 대고 그 긴급한 문제를 보고했고, 로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성녀님,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긴요한 일이 있으시면 얼마든지요.”

    “그리고 시오라 신도님께서는 사양하지 마시고 필히 귀갓길에 저희 성기사들을 대동하시기 바랍니다.”

    “꼭 필요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방금, 신문 중이던 폭도들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

    “오늘만이라도 신도님의 안위는 저희 신전에서 책임지겠습니다.”

    그 엄숙한 기세에 밀려, 나는 아무래도 좋은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 블루가 루카스와 함께 방을 나섰다.

    나는 닫힌 문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금 그쪽에서 움직였단 말이지.

    꼬리를 잘랐다고 하기엔 한참은 늦었으니 다른 의도가 있을 게 뻔하다.

    이쪽은 조금 짐작이 된다.

    그런데 정말로 그날의 폭도들이 교단의 네크로맨서였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에덴, 대원로의 아들 목에 왜 칼을 들이밀었던 거지?

    내부에서 파벌 싸움이 있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아니면 말이 안 맞아서 생긴 단순한 우연?

    아무래도 찜찜해선 눈가를 찡그리던 때.

    “그, 그렇게 압박 주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난데없이 마믹이 변명했다.

    그러더니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고는, 서랍을 들어 밑에 있는 서류를 꺼냈다.

    먼지가 뿌옇게 묻은 서류는, 아무래도 저번에 말했던 그 기록 같았다.

    지레 찔린 사람처럼 왜 갑자기 재빨라진 거람.

    아, 혹시 내가 입 다물고 있던 게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나?

    마믹을 다루는 방법을 깨달았다.

    “잘못한 건 아나 봐?”

    “신전에서 내 입지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기록물 보냈다가 그거 뒤져 보면 다 끝장인데 어떻게 그런 무서운 짓을 해.”

    “아, 그랬겠네.”

    “‘그랬겠네’? 지금 내 마음고생과 노고를 그 한 마디로 요약한 거야?”

    “두 단어가 같은 말이야. 아무튼 힘들었겠다.”

    성의 없는 공감에 마믹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고저쩌고 하소연하는 걸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기록을 챙겨 들었다.

    로 블루가 빨리 올 것 같진 않았지만, 여기서 볼 순 없으니까.

    “그거 대륙 공용어로 쓰여 있는 게 대부분인데 내가 모르는 언어로 된 기록도 있었어.”

    “읽을 수는 있는 상태지?”

    “읽을 줄 모르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논리적이긴.

    “고생했어, 그럼 나 갈게.”

    “벌써 가? 진짜 그거 가지러 온 거야? 정도 없다, 진짜.”

    “내가 더 있으면 좋겠어?”

    “됐어. 가. 잘생긴 로 블루 보면 되지, 내가 네 얼굴을 뭐 하러 들여다봐?”

    “내가 더 예뻐.”

    마믹이 반박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이상한 바람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다.

    그녀가 뚱하니 나를 노려보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성기사단 꼭 데려가. 로가 이미 대기시켜 놨겠지만.”

    은근히 미운 동생처럼 군다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성기사단의 호위를 받아 저택에 돌아오는 일은 꽤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신전 내, 내 직함은 여러 가지였고 개중에는 성기사도 있었지만, 확실히 성기사 하나와 성기사‘단’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새하얀 갑옷에 새하얀 말, 멋있었지.

    나는 만족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자마자 응접실로 향해야 했다.

    “왔구나.”

    나이젤리아가 손님으로 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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