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티파티에 다녀온 이튿날, 나이젤리아가 바로 저택을 찾았다.
권력가들은 엉덩이가 무거울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티파티에는 잘 다녀왔니?”
별거 아닌 말이었음에도 표정을 간수하기 어려웠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시험 때문에 긴장한 것처럼 들리길 바랄 뿐이다.
설마 크루엘로의 일을 들킨 건 아니겠지……?
“듣기로는, 웬 자작가의 아가씨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려 했다던데.”
“네?”
“틀리니? 도피 도중에 크루엘로에게 현장을 발각당하고, 선물 공세를 받으며 겨우 마음을 돌렸다고 하던데.”
“사람들이 소설을 잘 쓰네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직후, 미뉴엣에게 된통 혼난 나는 울면서 편지를 썼다.
수신인, 티파티에 참석한 전원.
내용, 갑자기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제 약혼자와 관련하여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크루엘로 핑계를 대라고 조언해 준 건 당사자였다.
그러면 더 물어보지도 못할 테니까.
그랬는데 소문이 그렇게 났단 말이지.
재밌어 보이니까 봐준다.
“아무튼, 괜찮죠? 티파티에 참가하는 건 시험이 아니었잖아요.”
“당연한 이야길.”
우리는 응접실의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거기서 무슨 차를 마셨는지 기억하니.”
“홍차요.”
아, 이렇게 답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정성껏 대답했다.
“향이 선명하고 쓴맛이 덜한 걸로 보아 메머릭 지역의─.”
“맛있었니?”
“음, 맛있었죠.”
같이 나온 쿠키가.
차의 카테고리는 둘뿐이다. 먹을 만한 정도와 먹기 싫은 정도.
나이젤리아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찻잔과 티포트가 각각 네 개씩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티포트를 들어 하나씩 찻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잔에 담기는 액체의 색은 미묘한 차이지만 전부 달랐다.
혹시 차종을 구분하는 시험인 건가?
“이 중에 하나를 마시는 게 첫 번째 시험이란다.”
와, 맞혔나 봐!
“참고로, 독차가 아닌 잔은 단 하나뿐이다.”
아니네, 칫.
“염려하지 말거라, 마시더라도 배앓이를 하는 정도란다.”
차를 다 따른 나이젤리아가 한쪽으로 티포트를 치웠다.
“차를 마실 때 무슨 생각을 했지?”
“티파티에 독차가 있었을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번은 아니라도. 화이트데저트의 안주인에게 필요한 사교 활동이란 그 정도지. 목숨을 보전할 정도로만 현명하면 괜찮단다.”
보네티에서의 파티를 떠올리자 기분이 묘해졌다.
와인에 몬스터 독이 가득 들어 있던 날, 그 일을 주도한 건 원로회였다.
그러면서 목숨을 보전할 만큼만 현명하라니 이미 통과한 시험 아닌가.
“그래서. 독이 무서워 시험을 포기하겠니?”
“그럴 리가요.”
노골적으로 독을 타서 죽일 리는 없다.
그렇게 쓰고 버리기에 나이젤리아는 지나치게 거물이었으니.
만에 하나, 먹으면 즉사하는 독을 넣었다고 해도 내가 죽을 일도 없다.
에이미 때는 엄연히 죽어 준 쪽에 가까웠고 성력과 독극물은 상극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성직자라는 정보는 줄 수 없었기에, 독차를 구분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음.”
보통 귀족가에서는 감지 마법이 새겨진 은제 다기로 독을 분간한다.
그러나 네 개의 잔 중, 변색한 건 없었다. 엄연히 시험이었으니까.
실제로 보네티에서 일을 치를 때도 와인잔부터 갈아치웠으니 항의할 수도 없다.
독을 감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몬스터 독은 특유의 기운이 있어 감각을 확장하면 느낄 수 있지만, 그건 또 아닌 듯했고.
그 외에 아는 지식은, 보통 색과 맛이 진한 액체에 탄다는 정도다.
그러면 가장 연한 차가 안전하려나.
“으으음.”
모르겠다, 내가 왜 고민하는 거람.
나는 내가 알던 상식과 반대로 가장 짙은 차를 골랐다.
그러고는 나이젤리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잔을 기울였다.
목 너머로 액체가 넘어가더니, 진한 향이 입 안 전체에 퍼졌다.
“욱!”
절로 눈이 부릅떠졌다.
나는 살짝 손을 떨며 잔을 내려놓았다.
이 맛은……!
“베이더스 홍차가 그렇게 유행이에요? 진짜 너무 쓰다, 전 이거 싫어해요.”
“차종을 맞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맞단다.”
“그래서 제가 통과한 거죠?”
“마셔 놓고 물어보는 거니?”
나이젤리아는 웃으며 조그만 은색 환약 네 개를 꺼냈다.
각각의 잔에 하나씩 집어넣자, 개중 세 개의 잔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무사한 건 내가 마신 차뿐이었다.
“어떻게 맞혔지?”
“그냥 감이요.”
“감?”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맞히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게 문제였으니까.”
“이 중에 하나를 마시는 게 첫 번째 시험이란다.”
애당초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독차든 아니든, 가벼운 독이란 걸 믿고 마시기만 하면 끝.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이젤리아의 시험은 두 번째까진 통과율이 높은 편이기도 했다.
첫 번째에서 열두 명이 통과했댔지?
시험을 치른 게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단위는 안 될 것 같은데 실은 합격률 100% 아닌가.
나이젤리아가 별다른 감흥 없는 얼굴로 동의했다.
“맞아. 통과한 걸 축하한단다.”
휴, 어쨌거나 다행이었다.
티파티에 크루엘로가 왔던 걸 들키지 않았든지, 아니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든지.
“아니? 그 애의 첫 번째 약혼녀는 독차를 마시고 죽었단다.”
흘러가듯 한 말에 나는 후자라는 걸 알았다.
에이미 로열샌드를 죽인 게 베이더스 홍차, 그 사실을 재차 떠올린 건 어제의 티파티에서였으니까.
나는 담담히 답했다.
“알아요.”
내가 이 차를 선택한 건 그래서였으니까.
나이젤리아가 설핏 웃었다.
“최종적인 보상도 중요하지만, 중간중간 의욕을 고취해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그녀가 손짓하자, 나이젤리아의 수행인이 검은 상자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걸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이란다. 혹시 불필요하다고 생각해도 보관해 두렴. 필요할 날이 올 테니까.”
두 번째 시험은 다음에 알려 주마.
답을 듣지도 않고 나이젤리아가 응접실을 나갔다.
배웅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고 그럴 마음도 없었기에 문이 닫히는 즉시, 나는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건 상자의 색과 같은 검은 천이었다.
들어 올리자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옷? 하나는 로브고 하나는…… 사제복처럼 생겼네.”
이런 걸 왜 주는 거람.
의아해하며 천을 들어 올리자 그 밑에서 둥그런 패가 툭 떨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나는 곧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와, 이거 설마…….”
패에는 음각된 뱀이 제 꼬리를 물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로보로스, 검은 뱀 교단의 상징이었다.
***
“교단의 복장이네요.”
크루엘로가 단언했다.
오늘 그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저택에 들어왔기 때문에, 대화 장소는 응접실이었다.
“이 옷이 필요할 때가 올 거라고 하던데.”
설마 다음 미션이 교단 잠입?
나이젤리아가 아군이거나 하다못해 회색분자만 됐어도 덥석 물었겠으나 그녀는 너무도 분명히 교단 편이었다.
입고 들어가면 ‘적이다!’ 하고 쫓아올지도.
“원로회는 원래 함정을 노골적으로 파는 편인가요?”
“아니요. 도발하는 건 10원로의 방식이에요.”
아하, 아레스.
휘슬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을 청소하는 자리에 달링을 끼워 넣고 싶은가 보네요.”
“네?”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요? 내가 파벌을 정리해 주기로 했다고.”
마차에서 얼핏 들은 말이었다.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준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당시엔 흘려들었다.
내가 크루엘로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듯이, 그 또한 전부를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말해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것도 없지, 나는 귀를 열었다.
“간단히 말해 2원로는 운명론자예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모리온이 세상에 나올 것도 이미 정해진 사실이라고 믿고 있죠.”
“음.”
“그러니 사소한 일 몇 가지에 일일이 털을 곤두세우지도 않아요.”
“열쇠를 내주는 것도 사소한 일인가요?”
“애당초 다른 열쇠가 나한테 있는 것도 알 거예요.”
아니, 크루엘로는 눈을 맞추며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우리한테’지만.”
“허.”
“굳이 그런 제의를 한 건 말 그대로, 달링에게 호기심을 느껴서예요. 원래도 따분하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사니까.”
“심심풀이 대상이라니 더 별로네. 그 김에 파벌 정리도 하고요?”
지나칠 정도로 여유를 부린다.
그게 내게 나쁜 건 아니었으나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그 콧대를 콱 꺾어 버리면 좋겠네.
“아, 잠깐. 그러다 세 번째 시험으로, 나더러 교단 정리를 요구하는 거 아니에요?”
“확실히 그럴걸요.”
“그렇게 태평히 말할 문제예요?”
어처구니가 없다.
내게는 파벌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거니와, 혼자서 교단 정리를 할 여건도 안 된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낌없이 성력을 퍼부어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몸을 하루만 쓰고 버릴 수도 없고.
“그쪽은 달링이 신경 쓸 일도 없을 거예요. 시험을 받으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저더러 혼자 하라던데요. 안 들킬 자신 있어요?”
“그럼요.”
“도리 운드 때처럼 허술한 자신감은 아니길 바라요, 부디.”
“그때는 놀러 간 거였으니 일과는 다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교단 정리고 나발이고 적을 돕는 일이 내키진 않지만, 세력을 깎아 둬서 나쁠 건 없지.
그 김에 대원로와 2원로의 사이를 벌릴 수 있다면 더 이득이다.
“그러면 교단의 위치는─.”
“아마 다음 보상이지 않을까 싶은데.”
“아, 알았어요. 통과하면 되잖아.”
열쇠 안 주기만 해 봐라.
내 선배 신도들이 아주 단단히 반겨 줄 테니.
***
두 번째 시험 내용은 서신으로 날아왔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랬다.
‘대신전에 기부금을 전하고 돌아오면 다음 시험을 내 주마’.
기부금이라니 이번에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무해해 보여서 외려 의심이 간다.
하지만 시험 때문이 아니라도, 신전에 한 번은 들러야 했다.
기록을 보내기로 한 마믹이 아직도 깜깜무소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