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반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셨나요, 두 분?”
줄리안이 즐거운 듯 떠들어 대는 모양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또한 상대가 크루엘로란 걸 눈치챘으며 내게 베이더스 홍차를 따라 준 게 고의였다는 걸.
크루엘로의 눈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에게서 자주 보지 못한 표정이었으나 안개 속에서 보던 눈빛과 비슷했다.
정의하자면 살의에 가까운 감정이 줄리안을 향한다.
테이블 위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
어차피 이 자리에서 크루엘로의 정체가 드러나도, 그의 평판이 나빠질 건 없다.
줄리안 미네르바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도 없었다.
그러나 줄리안의 도발에 넘어가 공짜 열쇠를 잃는 건 아깝다.
나이젤리아가 약속을 지키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시간을 두고 그 꿍꿍이를 살피고 싶었다.
자, 그러면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루엘로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급한 일이 생겨서 실례할게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그대로 티파티를 빠져나왔다.
크루엘로가 버텼으면 데려갈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그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음, 그냥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했지만.
“레, 레이디 시오라? 레이디!”
니나 홀메이즈의 목소리가 점점이 멀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티파티 장소는 저택의 후원이었기에, 정문으로 가려면 저택을 가로질러야 했다.
사용인 몇이 오가다 흘금거리는 걸 무시하고 나는 꿋꿋이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걸음을 멈추었다.
진짜 도리 운드는 어디 있지? 혹시 아직 저택 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져서, 크루엘로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왜 멈추세요?”
“네?”
“난 우리가 사랑의 도피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강아지어를 쓰는 걸 보니, 이제 멀쩡해졌군.
답하지 않고 크루엘로를 흘겨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깨가 두 배는 벌어지고 눈높이가 훌쩍 올라간다.
새삼 크루엘로의 체격이 크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근방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물었다.
“진짜 도리 운드가 갑자기 튀어나오진 않겠죠?”
“그럼요.”
그러면 다음 질문.
“혹시 미치셨어요?”
“새삼?”
“아니!”
인정해 버리니 말문이 막힌다.
역시 자아 성찰이 잘 된 미치광이는 이겨 낼 수 없어.
“혹시 여기에 몰래 들어와야 할 사정이 있으셨나요?”
“없어요.”
“변신 마법을 좀 안전하게 개량하셨나요?”
“아니요.”
“그러면 여긴 왜 들어온 거예요? 그냥 날 쫓아 들어온 건 아닐 테고.”
“그거 맞아요.”
“……왜요?”
“그냥?”
“그걸 지금 말이라고─.”
“죽을까 봐 무서워서.”
꾹꾹 눌러 참으며 대화를 주고받던 중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크루엘로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휘어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같지 않아서 문제지.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도로 다물었다.
돌연 크루엘로가 옆에 있던 방문을 열어젖히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크루─.”
“쉿.”
복도를 지나는 인기척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불을 켜지 않은 데다가 커튼도 닫혀 있어 방 안은 어두웠다.
크루엘로는 문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한 뼘 반 위에 있는 붉은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요?”
크루엘로가 속삭이며 물었다.
“왜 나를 데리고 나왔어요?”
“……내버려 뒀다간 일을 치를 것 같아서요. 2원로의 제안이 무산되는 것도 싫었고.”
“달링은 생각보다 이성적이네요. 그래서 서운하고.”
사내는 문가에서 떨어지더니 나를 끌어안고 문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커다란 손이 내 입가를 누르듯 덮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으나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렸다.
하인 하나가 성큼성큼 들어와 창가 쪽을 살폈다.
“여기에 뒀던 거 같은데……. 아, 찾았다.”
고개를 조금만 틀고 유심히 지켜보면 바로 우리를 찾아낼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고 하인이 조용히 나가기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들키는 일 없이 도로 문이 닫혔다.
몸에서 긴장이 풀린 때 귓속으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래서 좋아요.”
가까이서 들린 소리에 솜털이 곤두선다.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자 한 치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홍채의 형태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달링이 나를 차갑게 대할 때마다 새삼 느끼게 돼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누구와?”
“글쎄.”
크루엘로가 입매를 늘여 웃었다.
인기척이 아예 멀어졌을 때, 그는 나를 놓아주고 창문 쪽으로 향했다.
시원스럽게 커튼이 열리고 밝은 햇살이 쏟아졌다.
그는 창문에 다리 하나를 올린 채, 나를 돌아봤다.
크루엘로의 두 눈 중, 한쪽만이 햇빛을 받아 밝은 색으로 빛나서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실은 조금 전에 마음에 상처를 받았어요.”
그가 훌쩍 창문을 넘어섰다.
나도 곧바로 뒤따랐다.
어차피 1층이었기에, 시오라의 몸으로도 이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무슨 상처요?”
물어보면서도 에이미의 이야기가 나올까 봐 조금 망설였지만.
“태어나 궁색하다는 조롱을 들어 보긴 처음이었거든요.”
“아아, 예에. 그러셨구나.”
“그런 의미에서 달링, 우리 돈 쓰는 데이트하러 갈래요?”
“쓸 돈 있으면 그냥 줘요.”
“서운하네요. 자기는 알아줄 줄 알았는데.”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온 뒤로 그는 인기척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나를 데리러 온 척할 수 있다, 이거지.
도리 운드의 꼴만 안 보이면 되었기에 나도 시원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머잖아 저택의 정문과 그 앞에 죽 늘어서 주인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보였다.
“화,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
난데없는 이의 등장에, 경비들이 놀라 입을 벌렸다.
그렇지, 저택에 들어온 적도 없는 사람이 안에서 튀어나오면 얼마나 놀라겠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니 정상 참작이 될 것이다.
“어떻게 안에서 나오시는지…….”
“기다리기 마냥 지루해서 말이야, 안까지 모시러 갔었네. 신경 쓰지 말게.”
“예?”
그는 다른 이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보네티의 마차로 향했다.
아주 자기 마차가 따로 없다.
애당초 저걸 타고 쫓아왔을 때부터 작정했나 보다, 에휴.
마차에 오르기 직전, 그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잊을 뻔했네.”
크루엘로가 손을 튕김과 동시에 어딘가에서 퍼버벙,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바퀴가 죄 터져 주저앉은 마차였다.
그 겉면에 그려진 건 올리브 이파리 문양. 미네르바의 상징이었다.
“저 마차, 줄리안 거예요?”
“질 낮은 바퀴를 썼나 보네요. 하기야, 미네르바 가문이 그렇게 부유하진 않죠.”
뒤끝 하곤.
어쨌거나 크루엘로는 진심으로 시원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엄청 나빠 보이더니 알아서 회복해서 다행이다.
줄리안의 마차야 희생양이 되든 말든 알 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돈 소문에 관심이 많죠.”
적당히 크루엘로에게 말을 맞춰 주며, 나도 마차에 올랐다.
갑자기 크루엘로가 나타났다는 말이 나이젤리아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면서.
농담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듯, 그날 마차는 수도 내 유명 보석상을 싹 돌아야 했다.
나야 재산이 늘어나니 아무래도 좋았다.
***
정이란 게 뭘까.
그건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에게 있어서는,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는 독약 같았다.
금발. 여성. 또래.
확률상으론 얼마든 가능하지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인위적인 우연이다.
크루엘로는 그들을 여러 번 의심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친절했고 크루엘로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잔인한 흉터를 남겼다.
세 번째로 시오라 보네티가 등장했을 때, 크루엘로의 머리가 자란 만큼 그 의심은 극에 달했다.
원로회가 보낸 사람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도 별반 달라질 건 없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이 지긋지긋한 화이트데저트를 떠넘길 만한 적당한 협력자.
딱 그렇게만 생각하고 행동했으나 인간의 마음이란 그토록 당하고도 포기를 몰랐다.
결론만 말하자면, 크루엘로는 또 졌다.
적이 아니라는 확신. 저를 두려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 친근함. 묘하게 내비치는 애정.
그 요소들이 한데 모여 경계심을 허물어뜨렸다.
차가운 비늘, 독샘에 무기를 숨긴 파충류 사이에 갇혀 있던 꼬마는 자라서도 정에 이끌렸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괜찮겠지, 허무하게 죽어 떠나진 않겠지, 안도한 것은 수확제의 기적을 목격한 덕이 컸다.
생각해 보면, 시오라 보네티는 기적을 발휘한 직후 쓰러져 앓았는데 말이다.
‘너무 약해.’
시오라 보네티는 자주 쓰러졌다.
제가 아는 것만으로 벌써 세 번이던가.
그럴 때마다 크루엘로가 느끼는 감상은 점점 달라졌다.
마음의 거리는 그만큼 빠르게 가까워졌고 과거에 경험했던 불안은 손쉽게 몸을 부풀렸다.
아직은 그리 크지 않은 감정이었으나 불안의 무게는 그보다 훨씬 무거웠다.
정을 주지 않았다며, 한가하게 부정이나 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기엔 크루엘로가 앞서 겪은 두 번의 후회가, 두 번의 죽음이 너무도 깊은 흉터를 남겼으니까.
잃고 나서 아팠던 경험이 크루엘로를 기민하게 했다.
어쩌면 지나친 정도로.
감정의 형태가 친애이든, 우정이든, 뭐가 됐든 간에 크루엘로는 이전처럼 시오라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다.
줄리안 미네르바가 티파티장에 들어간 걸 알고, 구태여 숨어들어 간 건 그 탓이 컸다.
“후.”
옅은 한숨이 흐리게 흩어진다.
마차는 꽤 규칙적인 속도로 달리고 있다.
크루엘로는 돈놀이에 즐거워하다가 지쳐 쓰러진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곱게 감긴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가만히 오르내린다.
사내는 꼰 다리 위에 턱을 괴고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화려한 인상. 에이미와도 비가와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한 번씩, 크루엘로는 그 위에 지나간 사자의 얼굴을 덧씌워 보곤 했다.
에이미, 혹은 비가.
한때 지독하게 앓았던 광증 때문이겠지만, 알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는 평생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남의 표정, 행동, 말투 하나하나에서 죽은 이들을 비추어 보면서.
그들이 되살아나기 전까지는 계속.
“…….”
문득 크루엘로는 시오라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불같이 뜨겁기도 했고, 죽은 사람처럼 차갑기도 했던 살갗은 평범한 정도로 따뜻했다.
“살아 있네.”
당연한 사실인데도 크루엘로에게는, 그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계속해서 시오라를 내려다보았다.
마차가 보네티 백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