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51화 (51/162)
  • 51화

    줄리안이 가식적인 얼굴로 나를 염려하는 척했다.

    “저번에 그런 농담을 하셔서 그런지 한 번씩 신경 쓰이더라고요.”

    크루엘로가 잘해 주냐는 질문에 즉답으로 부정했던 거?

    그걸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니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는 저번보단 퍽 선선히 답할 수 있었다.

    “당연히 잘해 주시죠.”

    “그렇군요, 아직도…….”

    그가 묘하게 웃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줄리안이 내 머리 쪽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머리에 나뭇잎이 묻었네요.”

    사르르, 줄리안의 눈이 휘며 눈꼬리가 웃는 모양대로 접혔다.

    왜 저렇게 신경 써서 웃는담.

    “인사드리는 게 늦었네요, 시오라. 궁정 무도회 때는 감사했습니다.”

    “뭐가요?”

    “당시 들고 있던 뱀술에 뱀이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조언해 주신 덕에 물리지 않았어요.”

    “뱀술이요? 그런 걸 들고 다니셨어요?”

    뭐야. 왜 무도회장에 뱀술 같은 걸 들고 다녀.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데이디어가 동조했다.

    “그렇게만 들으니 확실히 줄리안이 굉장히 수상하게 들리는군요.”

    “말했잖아, 데이디. 그냥 선물 받은 거였어.”

    “하지만 선물이란 건 받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서……. 아, 아니에요. 줄리안의 취향이 그럴 수 있죠.”

    “제 취향 아닙니다.”

    “알죠, 그럼요.”

    “……그러면 시오라는 그때, 어떤 뱀을 말씀하셨던 건가요?”

    그걸 물어봐야 알아?

    당일 오전에 나이젤리아와 열쇠가 어쩌고 떠들어 대기까지 했는데.

    혹시 줄리안은 끄나풀 중의 끄나풀이라 정보 공유도 못 받는 건가?

    나는 떠볼 겸 입을 열었다.

    “거리에 뱀이 많이 나온다는 기사를 읽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반응은 유했으나 일순간 두 눈에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내 말을 믿는 기색이다.

    진짜 모르다니!

    하기야 원로회 늙은이들이 가보트만 한 어린애를 신뢰할 리 없지.

    경계심이 팍 낮아져서 나는 한결 순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 그, 그런데!”

    이 테이블이 4인석임을 상기시키듯, 소외됐던 도리 운드─나머지 한 사람─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나빴는지,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테이블보가 뒤집힐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그녀는 놀라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쳤고, 찻잔 몇이 엎어지며 찻물이 흘러넘쳤다.

    “운드 자작 영애, 괜찮으세요?”

    “죄, 죄송합니다! 저 옷 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도리 운드가 시녀를 따라 자리를 비웠다.

    다른 하인이 엉망이 된 테이블을 정리해 주는 동안 잠시 사람들의 대화가 멎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시오라. 손이 좀 젖었네요.”

    줄리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내 손가락의 찻물을 닦아 주었다.

    이쪽을 흘금거리던 시선 몇이 묘하게 변한다.

    그렇다는 건 내 착각이 아니란 거지?

    “줄리안, 지금 허접한 미인계─.”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내 회심의 공격이 저지당했다.

    도리 운드가 벌써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옷을 갈아입는 데 한참 걸리는데 엄청나!

    감탄하며 쳐다본 순간,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하던 말씀들 계속 나누세요.”

    어라.

    조금 전까지 긴장해서 말을 더듬지 않았나.

    그리고 웃는 모습도 아까랑 다른 것 같다.

    꼭 크루엘로처럼 웃네.

    왠지 불길해졌지만, 잠깐 새 사람이 바뀐 건 아닐 테니까 괜한 의심이겠지.

    “…….”

    ……바뀌었나? 아니지?

    “레이디 시오라, 조금 전에 하시려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네, 네?”

    “미인계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 미인계. 네, 줄리안은 미인계도 쓸 만큼 잘생겼다고요.”

    나는 입이 움직이는 대로 성의 없이 말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심 때문에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도리 운드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크루엘로가 도리로 변신해서 들어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근거 또한 빈약한데 이상하게 직감이 불길했다.

    그런데 만약, 진짜 만약에 이게 크루엘로면 시험은 어떻게 되는 거람?

    “앞에 ‘허접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지 않았습니까?”

    “참. 이번을 포함하여 모든 시험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치르는 게 좋겠구나.”

    둘이란 걸 들키게 되면 설마.

    “실격 처리되나?”

    “예? 줄리안이 미인계에 실격 처리될 만큼 허접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줄리안의 외관이라면 충분하죠.”

    “미네르바 소후작님의 얼굴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영양가라고는 1g도 없는 대화에 도리 운드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랑 너무 다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혹은 그─를 노려봤고, 상대는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박였다.

    혹시 모르니 미끼를 던져 보자.

    “그러고 보니 아까 베이더스 찻잎을 제일 좋아하신다고 했죠?”

    “그럼요. 특유의 쓴맛이 매력적이잖아요.”

    얘, 도리 운드 아니야.

    나는 확신을 얻었다.

    변신 마법인지 뭔지를 써서 크루엘로가 잠입해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변신 마법이라고 하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죽고 나서 안 풀리는 변신 마법이 어디 있어? 바람만 세게 맞아도 풀리는데.”

    큐딜의 유언이 그랬지.

    당시엔 내가 수정 작업을 거칠 거라 흘려들었지만, 티파티장은 실외에 있는 터라 아까부터 한 번씩 큰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만 맞아도 풀린다는 건 비유겠지?

    ……혹시 지금 위태로운 상황인가?

    “그런데 소후작님과 찻잎이 무슨 상관인가요?”

    내가 왜 물어봤는지 뻔히 알면서 크루엘로는 뻔뻔스럽게 답을 채근했다.

    일단은 나도 응하는 수밖에 없다.

    “아, 마음에 드시냐고 했죠. 그럼요. 저도 눈이란 게 있는데요.”

    “절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시오라의 약혼자가 그분이시라 제 얼굴 같은 건 평범하게 보실 줄 알았거든요.”

    “아, 음.”

    그야 크루엘로의 얼굴과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다.

    하지만 내가 미친 것도 아닌데 크루엘로 앞에서 그 얼굴을 칭찬할 리가.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역사서에 기록될 법한 위대한 얼굴이라고.”

    줄리안은 실은 크루엘로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나는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데이디어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래서 동화 한 닢 쓰지 않더라도 데이트가 즐거울 거라고요.”

    “네?”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전하께서 조금 수수한 데이트를 즐기시는 것 같아 보기 좋다는 소문이었거든요.”

    뭔 해괴한 헛소문인가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게 그럴싸하다.

    인형 극장, 보네티 백작저, 수확제, 분수대가 있는 공원, 도서관 등 크루엘로와 만난 장소는 대개가 소박했다.

    그래서 수전노 소리라도 나왔나?

    슬그머니 크루엘로 쪽을 살피자 웃음기가 가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큼! 나는 다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레이디 시오라?”

    아차, 숙이면 상심한 것처럼 보이려나.

    하지만 어떡해.

    크루엘로가 수전노라니, 일부러 돈이 안 드는 곳에서만 데이트를 했다니.

    내 손에 어마어마하게 비싼 마도구를 끼워 놓고, 결혼 계약서에 어마무시한 조항을 박아 놓고도 그런 소릴 듣는다는 게 너무 웃겼다.

    나는 입술을 꾹 눌러 웃음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흡, 그분께서 소박한 데이트를 즐기긴 하죠.”

    “그렇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혹시 돈을 아끼신다는 소문이 같이 돈다면 그건 오해예요. 저도 받은 게 많거든요.”

    “시오라의 그 반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이 반지랑…….”

    생각해 보니 선물로 받은 건 더 없다.

    몬스터 독 해독제를 말하긴 궁색하지.

    하지만 물건만이 전부는 아니니까, 까짓 내가 명예 회복 좀 시켜 준다.

    “엄청난 돈을 받았어요.”

    사방에서 헉 소리가 났다.

    여기 대화를 엿듣는 티를 너무 내는 거 아니야?

    “돈…… 이요?”

    “네, 상상하면 놀랄 만큼 막대한 돈이요.”

    엄밀히 말하면, 수임료에 가까웠고 아직 받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더 넉넉히 챙겨 주리라 믿는다.

    그런데 장내가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오죽하면 누군가 속살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정도로.

    “……공작이 돈까지 주면서 만나는구나.”

    “하기야, 그 공작이잖아. 위험 수당 없이 만나기는 좀.”

    “그분께서 매달린다는 말이 진짠가 봐요.”

    어, 이거 설마 사회성 없는 발언이었나.

    나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말을 얹었다.

    “농담이었어요.”

    가만히 있던 도리 운드, 실은 크루엘로가 끼어들었다.

    “농담이 아니라도 상관없죠. 그 정도는 받으셔야 도리에 맞네요. 상대는 보통 성미가 아니시잖아요.”

    나를 도와준 게 아니란 건 명백했다.

    그 알맹이를 모르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더 싸하게 가라앉는다.

    도리 운드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몰라, 평판 같은 거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포기하고 차나 마시기로 했다.

    “어.”

    다 마셨네.

    나는 빈 잔을 보고 사용인을 부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줄리안이 대신하여 근처의 시녀를 불렀다.

    “베이더스 찻잎으로 우린 걸로 가져다줄래.”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그거 좋아한다고 한 건 크루엘로인데 왜 나한테!

    나는 쓴맛을 싫어한다.

    하지만 대접받는 음식의 맛을 평가하는 건 결례였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줄리안이 건네받은 티포트를 내 잔에 기울였다.

    조르륵, 찻물이 빈 잔에 차올랐다.

    다른 잎으로 우린 홍차보다 진하고 선명한 색이라 구분하긴 쉬웠다.

    이걸 또 마시게 될 줄이야.

    나는 한숨을 삼키고 찻물을 노려보다가 문득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걸 어디서 마셨었지? 최근은 아닌데.

    줄리안이 내게 차를 내밀었다.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한 모금만 마시고 관둬야지.

    나는 손잡이를 쥐고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입가에 댈 수는 없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운드 자작 영애?”

    크루엘로였다.

    아무런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그가 찻물을 바라보았다.

    남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본래의 모습이 그 위에 비쳐 보이는 듯했다.

    그 표정은…….

    “마시지 마.”

    “아…….”

    그제야 나는 내가 언제 베이더스 홍차를 마셨는지 떠올렸다.

    “로이, 네 차가 더 맛있어 보이는데 나 그걸로 마실래.”

    10여 년 전.

    크루엘로를 대신하여 마셨던 독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