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음, 잠깐.”
크루엘로 또한 불현듯 뭔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손을 뻗어 왔다.
기다란 손끝이 내 이마에 닿았다.
뭐가 묻었나?
“이제 열은 없네요.”
“그만큼 잤는데도 안 떨어지면 그게 열인가요, 불이겠지.”
“몸에 좋은 약초 좀 보내 둘게요.”
“독초 아니고요?”
“의심스러우면 나한테 먼저 먹여 봐요.”
놀리려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진지하다.
크루엘로가 급격히 수상해졌다.
눈이 가늘어졌다.
“왜요?”
“그냥 달링이 내 생각보다 너무 약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성력 부작용이에요. 약한 게 아니라 몸이 감당 안 될 정도로 센 거예요.”
“알았어요. 그러니 그 귀한 힘은 봉인해 뒀다가 열쇠를 찾을 때 쓰는 게 좋겠어요.”
“좋아요. 내가 허약해 보이는 건 인정해요. 그런데 크루엘로가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아요?”
“어떻게?”
“과보호. 팔불출. 오버하는 로맨티시스트.”
“나쁘지 않은데.”
그는 다리를 바꾸어 꼬았다.
“우리, 약혼한 사이예요, 내 사랑.”
“더 해야 하나요? 이젠 가만히 있어도 원로회에서 날 죽이려 들 텐데.”
“입도 맞춰 놓고 간단히 버리는 거예요?”
“야!”
내 수치스러운 과거를 들추다니, 떠올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또 얼굴이 홧홧해지기 시작했다.
크루엘로가 즐거운 듯이 웃어서 두 배로 화가 났다.
“그쪽 약점을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예요.”
“설레라. 기대하고 있을게요, 자기.”
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이야기가 애먼 데로 흘러간 걸 알아차렸다.
“대화가 산으로 갔는데, 그래서 2원로는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부탁했어요.”
“아, 그 말은 들었어요. 시험을 모두 통과하면 열쇠를 준다던데 이게 말이 돼요?”
“2원로는 원로회에서도 좀 튀는 사람이에요. 대원로와는 의견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죠.”
“교단 내 파벌 싸움이라도 있단 말이에요?”
“비슷해요. 내가 그걸 좀 정리해 주기로 했는데 대가로 열쇠를 요구했죠.”
그러니까! 바로 그 지점을 이해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모리온으로 가는 문이잖아.
열쇠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심부름한 아이한테 과자를 던져주듯 그렇게 막 줄 수 있는 거야?
“일단은 티파티에 다녀와요. 지금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
“맹세컨대 괜찮을 거예요. 영 내키지 않으면 이제라도 거절해도 괜찮고요.”
“말할 상황이 없었다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다음엔 말하고 저지르면 좋겠네요.”
“곧 2원로가 다른 나라의 학회에 다녀올 예정이라 어쩔 수─.”
“크루엘로.”
크루엘로의 말을 끊고 이름을 불렀다.
그는 당황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게요.”
조금 머뭇거린 후에는 덧붙이기도 했다.
“다치지 않게 할게요, 털끝 하나도.”
그 목소리에 멋쩍은 기색이 녹아 있어서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런 걸 보면, 어릴 때 모습이 다 사라진 건 아닌데 말이야.
그립다, 그리워.
그러는 새 마차는 착실히 움직여 홀메이즈 백작저 앞에 멈추어 섰다.
크루엘로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나는 땅으로 내려왔다.
혼자서도 할 수 있었지만, 사람 눈이 있는 데서 굳이 사이가 나빠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튼,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보네티의 마차를 타고 온 만큼, 데려다줬다는 말이 무색했지만.
마차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 오히려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크루엘로가 나를 끌어안고 가볍게 뺨을 비볐다.
“잘 다녀와요, 달링.”
“아…… 니…….”
뭐! 하는! 거야!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외침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따지고 보면 그냥 접촉이었지만, 굉장히 낯부끄러운 스킨십이었다.
사람들 눈 때문에 나는 그를 노려보기만 했고, 크루엘로는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빤히 쳐다보기에 내가 먼저 휙 몸을 돌렸다.
“…….”
그러자마자 다시 백작저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티파티에 입장 시간이라도 정해져 있는지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몸은 내 게 아니다.
나는 시오라 보네티가 아니다.
속으로 수도 없이 중얼거리면서, 나는 고개를 처박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
“드디어 와 주셨군요!”
니나 홀메이즈가 감격하며 나를 반겼다.
내가 당일이 되어서야 갑자기 참석 의사를 전한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 미안해졌지만, 스멀스멀 피어난 창피함에 죄책감이 밀려났다.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홀메이즈 백작 영애.”
“저야말로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다시 뵙고 싶었어요. 그날, 큰 도움을 받았잖아요. 기억나시죠?”
당연히 기억한다.
생각 없이 마신 술에 독이 들어 있어서 남의 얼굴에 뿜어내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독주를 회수하던 그날.
어라, 생각해 보면 이게 더 창피한 일 같은데.
“레이디 시오라의 테이블은 이쪽이에요.”
그녀의 안내를 따라 내 자리로 향했다.
티파티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일반적인 파티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하나의 테이블당 네 개의 의자가 딸려 있었는데, 내 쪽 테이블에는 몬스터 독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뿐이었다.
자리 배치도 주최자의 역량이라고 하니 우연은 아니겠지.
머잖아 모든 손님이 모이고 티파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저번 신전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아무래도 레이디 시오라께서는 신의 사랑을…….”
주최자는 원래 테이블을 옮겨 다니면서 대화를 주도한다고 배웠지만, 니나는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그걸 탓하기는커녕 이쪽을 흘금거리기 바빴다.
정확히는 ‘내’ 쪽이었다.
인기인의 삶이란.
어쨌거나 나는 티파티에 충실히 참석해야 했기에 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하여.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아, 래버린스 경. 저번에 보내 주신 자수정 브로치 디자인이 굉장히 세련됐더라고요. 미감이란 게 저평가되긴 쉽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분야잖아요.”
인적사항에서 급하게 외운 정보를 토대로.
“제가 우연히 이뤄 낸 성과보다는 홀메이즈 백작 영애가 더 대단하죠. 밀수선을 적발하셨다고 들었어요. 그거야말로 대단한 공로인걸요!”
이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칭찬을 입에 담으며.
“운드 자작 영애께서는 차를 정말 잘 아시네요. 레이디 같은 분께서 티파티를 빛내 준다고 생각해요. 홀메이즈 백작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첨, 아니 내 편이 되어 줄 사람들을 늘렸다.
나를 친구도 없다고 조롱했겠다? 보나마나 시험도 사교 활동에 관련해서 나오겠지.
그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 결과, 20분 만에 테이블의 동료들은 나를 페불라 보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물론 악신설의 그 페불라는 아니다.
“어쩜. 레이디 시오라께서는 정말 자상한 분이세요. 근래 이렇게 즐거운…….”
그때 입구에서 난 작은 소란이 니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홀메이즈 백작저의 집사가 다가와 주인의 귀에 속삭였고, 니나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여러분께 양해를 구할 일이 생겼네요.”
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이디어 크림슨 경과 미네르바 소후작님께서 근방을 지나다 방문해 주셨다고 해요. 이 자리에 두 분을 더 모셔도 괜찮으실까요?”
둘 다 아는 이름이다.
데이디어 크림슨은 궁정 무도회 때 정보를 외워 뒀고, 미네르바 소후작은 줄리안이었으니.
왜 티파티 도중에 끼어들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분사회란.
머잖아 대화가 멈춘 티파티장에 두 명의 남녀가 들어섰다.
“음.”
줄리안 미네르바야 전에도 대화를 나눠 봤지만, 그 옆의 여자는 처음 본다.
180cm도 넘을 듯한 장신에 누가 봐도 기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추가적인 정보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크림슨 공작가의 차녀. 줄리안이 싸고도는 소꿉친구. 가보트의 아카데미 동기. 소속 없는 기사.
원로회와 닿아 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침 지루하던 참이라 조금 흥미진진해졌다.
내가 급하게 참여한 티파티에 갑자기 쳐들어온 두 사람이라, 우연이라기엔 과하지?
나는 마카롱 하나를 입에 넣으며 그 둘을 관찰했다.
남녀는 참석한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이쪽 테이블로 다가왔다.
주최자인 니나에게 인사를 했고 이어.
“실례지만 아는 분이 레이디 시오라뿐이네요. 괜찮다면 저희가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두 명분의 자리를 빼앗았다.
내 양옆에 앉아 있던 니나와 래버린스 경이 다른 테이블로 떠났다.
대놓고 깡패 짓이네.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시오라.”
“음, 덕분에요.”
“아, 이쪽은 데이디어라고 해요. 제 친구면서 가보트의 동기이기도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시오라.”
데이디어 크림슨이 내게 악수를 건넸다. 재색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크림슨 경.”
“데이디어라고 불러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요, 데이디어 경.”
이쪽도 용건은 나한테 있었단 말이지.
웃고는 있으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런데 저를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예, 가보트의 누이시니까요.”
“가보트에게 데이디어 경의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카데미 동기였습니다. 학부도 달랐지만 오며 가며 대화를 나눴지요. 지금은 제가 가보트에게 무언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만요.”
“같지만…… 이라니요?”
“제가 사회성 면에서 많이 미욱합니다. 한 번씩 관계가 멀어지는데 이유를 통 알 수 없더군요. 물어봐도 답해 주지 않아서.”
데이디어의 목소리가 급작스럽게 침울해졌다.
연기 잘하네.
“물론 가보트를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언제나 제 쪽이 문제였으니까요.”
“아니, 무슨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시오라는 다정한 분이시군요.”
연기…… 맞지?
표정이나 목소리가 너무 진지해서 외려 헷갈렸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을 굴리다 나는 줄리안을 쳐다봤다.
“아, 공작전하와는 잘 지내고 계시나요?”
그래, 차라리 이런 얘기가 낫지!
줄리안이 제 기능을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