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49화 (49/162)

49화

나이젤리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우리의 손아귀에 있던 아이가 그토록 자랐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나 세뇌를─.”

“다시 할 필요도 없소. 어차피 일이 시작되면 알량한 세뇌 따윈 풀려 버릴 거요. 모리온이란 그토록 거대한 힘이고 인간의 힘이란 어설프기 짝이 없으니.”

“…….”

“우리는 다만 크루엘로가 그 힘을 갖춰 세상에 그분이 태어나시길 기다리면 될 뿐이오.”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대원로의 표정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쯧, 나이젤리아가 가볍게 혀를 찼다.

“예언 하나를 받았소.”

“예, 언이라니 설마!”

“기일에 대한 계시를 받은 건 아니라오. 다만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배는 항로를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건 그분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나는 다만, 그 아이에게 뭐가 있는지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움직일 뿐이고.”

거사는 이미 큰 물결을 탔다.

굳이 노를 젓지 않아도 어떻게든 예정이 실현될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의미 없는 노라면, 모리온을 삼킬 당사자에게 쥐여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차차 그의 수하가 될 이들이 배를 움직여 보겠다고 설쳐대는 꼴은 우습기만 할 테니.

그것이 나이젤리아의 신앙이었다.

‘그러는 김에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것 또한 내 사명이겠지.’

나이젤리아는 속마음을 감추고 웃었다.

‘예언’이라는 말에 헤오림의 기세는 완전히 누그러졌다.

“믿겠습니다, 2원로.”

“아무렴.”

2원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그녀는 조금 전부터 신경 쓰이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접실의 문가였다.

“거기 있니, 에덴.”

“뭐?”

대원로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연갈색 머리를 허리춤까지 기른 창백한 낯의 사내, 에덴이었다.

대원로가 제 아들을 다그쳤다.

“들었느냐, 에덴!”

“무슨…… 말씀을 나누신 건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버님. 다만 원로분들께서─.”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내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지 않소, 대원로.”

나이젤리아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생각해 보면 대원로의 죄지. 어째서 이 아이에겐 그분의 은혜를 가르치지 않은 거요?”

“……몸이 약한 아이입니다. 그 마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건강했지. 테타니오에겐 그리 매몰찬 사람이 그런 핑계를 대는가.”

“2원로님!”

“아네, 알아. 저 마음 약한 아이가 교단의 일을 어찌 받아들일까 두려워하는 마음. 내 어찌 모르겠소?”

어설프게 도덕적이고 물러터진 아이.

크루엘로를 동정하여 각별하게 아끼던 만큼, 교단의 일에 반발할 가능성이 큰 이였다.

교단은 변절자를 살려 두지 않으니 대원로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뻔하다.

나이젤리아가 웃었다.

“네게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에덴.”

“2원로님?”

“그리고 몇 번이나 네 기억에 손을 대야 하는 나 또한.”

그녀의 손짓에 에덴의 눈꺼풀이 덮였다.

대원로는 참담한 얼굴로 쓰러지는 자식을 받쳐 안았다.

“좋은 꿈 꾸렴, 아이야.”

자고 나면 지금 본 건 잊어버리겠지만 어차피 꿈이란 다 그런 법이니.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오라.”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듯, 나이젤리아가 돌아간 직후 미뉴엣이 들이닥쳤다.

나는 도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다.

“이제부터 널 가르칠 거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데.”

“나도 잘 몰라.”

“시오─.”

“크루엘로가 저질렀나 봐.”

이름자 하나에 내 결백이 증명됐다.

미뉴엣의 얼굴에서 의심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역시나 크루엘로, 편리하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소몬 후작의 학자로서의 위상은 인정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야.”

“소몬 후작?”

그러고 보니 나이젤리아의 소개 중에 그런 말이 섞여 있긴 했다.

작위가 있었구나. 미뉴엣의 반응으로 보아 이름난 학자인가 보다.

“그 사람의 시험은 악질적이기로 유명해. 통과시킬 생각이 없을뿐더러 죽는 사람도 나오니까. 이건 시간 낭비야, 시오라.”

“음, 아직 위험한 느낌은 아니었어. 사교 활동이 적다고 티파티에 참가하라던데.”

“뭐가 됐든 간에 거절해.”

“으으음. 있잖아, 미뉴엣. 이미…….”

“하겠다고 말했어?”

미뉴엣이 기가 막힌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고, 미뉴엣은 속이 답답하다는 듯이 내 앞에 놓인 찻잔을 거머쥐었다.

내가 다급히 말렸다.

“아, 그거 마시지 마. 뭘 탔을지 몰라.”

“그렇게 경계하는 애가 그런 말을 덥석 물어?”

“……”

“소몬 후작은 화이트데저트의 원로야. 너도 휘슬에서 봤지? 원로회가 어떤 건지.”

“봤지.”

“넌 모른다고 말했지만, 아버질 살해한 사람도 그쪽 원로회에서 보냈을 확률이 높아. 아닌 척해도 화이트데저트가 질이 나쁘단 건, 알 사람은 아니까.”

정답이다.

백작을 죽인 건 아레스였으니.

하지만 미뉴엣에게는 범인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해 둔 터라 나는 표정 관리에 힘썼다.

어쩔 수 없지.

이 애가 복수심에 불타 위험한 짓을 벌이면 곤란했다.

이제는 프레스토가 변했으니 전보다는 아레스의 상대가 되겠지만 어쨌거나…….

돌연 미뉴엣의 얼굴이 변했다.

“시오라 보네티.”

“응?”

“너, 사실 다 알고 있지.”

“아니? 아닌데?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 기억 상실이야.”

“그렇지. 내가 순진했네. 네가 수상하다는 건 진작 알았으면서 왜 구체적으로는 의심을 안 해 봤을까.”

그건 아마도 성력 때문…… 이 아니라!

위기일발! 위기일발!

나는 되도록 표정을 순진무구하게 가꾸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너랑 공작 한패야.”

“우와, 어떻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그냥 약혼해서 좀 어울려 다니는 거지!”

“잠깐. 혼담을 대신하려던 것부터가 계략이었나?”

“그런 수상쩍은 거 아니거든! 소설 쓰지 마, 언니!”

“그러면 왜 네가 하겠다고 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었는데 뭔들 못 하겠어?”

“휘슬에서 있던 일을 생각하면 뭘 하든 굶어 죽진 않을 텐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휘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비밀로 해 주기로 약속했잖아!

있는 힘껏 모르는 척하며 그런 눈빛을 쏟아 내자 미뉴엣은 영지 일을 더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를 의심하듯 가늘어진 두 눈은 그대로였다.

“너, 시오라 보네티는 맞지?”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릴 들은 것 같은데.

그대로 굳어 버려서 외관상으로는 오히려 티가 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여기까지 가는 건 네 말대로 소설이겠네.”

미뉴엣이 사람 심장 소리를 듣는 괴물은 아니라 다행이야.

나는 당연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미 하겠다고 말했고, 티파티에 참가하란 말을 들었다고?”

“으응.”

“입 밖으로 내뱉었다면 취소하는 건 안 되겠네.”

“그렇겠지?”

“넌 취소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면 그만둘게.”

“……있어 봐,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빠른 데를 찾아 줄 테니까.”

그쪽에서 수작질을 부릴 여유가 없게 하려는 거구나.

“단, 다음부터는 반드시 상의하고 저질러.”

등이 식은땀으로 푹 젖은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새삼 자괴감을 느꼈다.

나는 미뉴엣한테 왜 이리 약해지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어.

그리하여 선택된 건 니나 홀메이즈의 티파티로, 파티가 열리는 날은 당일 오후였다.

갑자기 들이닥쳐도 되나 싶었지만 그쪽에서도 괜찮다고 했다니까 뭐.

남은 시간이 빠듯해서 심장이 터지도록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그러고야 간신히 시간에 맞춰,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기분으로 나는 등받이에 푹 파묻혔다.

나는 누구인가. 왜 적이 내 준 과제를 이토록 열렬히 하고 있는가.

시험에 통과하면 열쇠를 준다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

이럴 시간에 차라리 나이젤리아의 차에 독을 타서 열쇠를 빼내는 게 정답 아닐까.

될 리가 없겠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티파티가 그렇게 싫어요?”

크루엘로가 내게 물었다.

“아니, 티파티가 아니라요…….”

대답하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이, 하늘색 머리칼의 청년이 빙긋 웃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흰 셔츠에 연회색 베스트, 겉옷은 벗어 둬서 꼬고 앉은 긴 다리가 잘 보였다.

원래도 역사서에 나올 법한 얼굴이지만, 오늘은 더 반짝거리는군.

그래서 얘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아는 사람?

혹시 내가 마차를 잘못 탔나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이건 보네티의 마차가 맞았다.

“달링이 탈 때부터 있었어요.”

“혹시 보네티의 마차가 화이트데저트에 팔렸나요?”

“아닐걸요. 마부가 그냥 들여보내 주더라고.”

“아하.”

모르겠다.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하도 많이 겪어서인지, 이 정도는 따질 일도 아닌 것 같아.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가 나이젤리아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크루엘로에게 말했다.

“혼자 참석해야 한대요.”

“데려다만 줄게요.”

“내가 애도 아니고.”

“보네티의 일을 주관한 게 아레스였나 봐요. 일이 실패해서 도망쳤대요.”

“거긴 일하는 원로가 아레스와 큐딜밖에 없대요?”

“둘이 말단이었으니까요.”

“아레스도 세 번째였나 보네. 쫓기고 있을 텐데, 설마 날 죽이러 오겠어요?”

“실패를 만회하면 용서받는대요. 아레스는 교단에 집착도 심한 편이고. 당분간 자기를 따라다니려고요.”

나는 비밀기지로 연결된 반지를 가리켰지만, 크루엘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티파티가 끝난 뒤에도 데리러 올게요.”

하기야 아레스는 암살 전문이라고 했으니, 게이트를 쓸 여유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이전이라면 필요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 몸은 어떤 의미로, 내 생각보다 대단했으니까.

성력이 활성화된 상태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할 테고.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하다가, 문득 내가 티파티에 가는 이유를 떠올렸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네.

“그런데 크루엘로, 나한테 해명할 게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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