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하하. 자라더니 제법 건방져졌구나, 크루엘로.”
“물론 그냥 달라는 건 아닙니다.”
흥미롭다는 얼굴로, 2원로는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였다.
“교단에 점점 대원로님의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믿음보다는 욕망으로, 능력보다는 연줄로 타고 들어오는 이들이요.”
“그래, 불신자가 과분한 자리를 노리고 있지.”
“내키지 않아 하시는 걸 압니다. 전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잠시간 크루엘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기꺼워 보이기도 했고 노여워 보이기도 했다.
나이테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겹겹이 홍채 주름을 쌓은 듯 알아보기 어려운 눈빛.
그러나 끝내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크루엘로가 원하는 대로였다.
“네 말대로다. 나는 검은 뱀을 깨끗이 씻어 내고 싶다.”
후, 2원로가 허공에 뿌연 옅기를 내뱉었다.
“최근 큐딜이 사라졌다는구나. 아레스도 일을 실패한 후로 복귀하지 않는다 하고. 네가 그렇게 했지?”
“예.”
“그 또한 청소의 일환이냐?”
“열쇠 지갑에서 열쇠를 뺐을 뿐입니다.”
“고얀 것.”
“어차피 둘 다 대원로의 줄을 잡았습니다. 갈아 끼운다면 2원로님께 오히려 득이 아닙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그래, 내게 신세를 진 아이들이 다음 자리를 준비하고 있지. 내겐 득이었다.”
그녀가 파이프를 자리에 내려 두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열쇠를 내주기 부족해, 송사리 몇의 목숨값으론 너무 과분하잖니?”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십시오.”
“네게 귀여운 약혼녀가 있었지?”
크루엘로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지켜냈다.
그럼에도 그 속이 보이는 듯하여 노인이 픽 웃고 말았다.
“오해하지 말거라. 나는 혈통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 어차피 모두가 불완전한 인간인 것을.”
고결하다는 핏줄의 결합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끔찍한 유전병뿐.
2원로는 인간이 마구잡이로 섞여야 보석이 만들어진다는 주의였다.
그러니 그녀가 보는 인간이란 것들은 다 동등했다.
단, 눈앞의 아이만을 제외하고.
“그저 범상한 아이가 아니란 걸 안다. 적어도 너는 그 애를 동등하게 대하는 듯하니 무언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거겠지.”
“그래서요.”
“그 아이에게 직접 시험을 내주마.”
크루엘로가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으나, 그 또한 2원로의 시험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노인은 학자로서 몹시 위명이 높았는데, 권력의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자 제자로 받아 달라는 이도 많았다.
처음에는 좋게 거절했지만 갈수록 선을 넘어오는 부탁에 심기가 상했다.
그녀는 제가 내린 세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하면, 제자로 인정하는 걸 넘어 후계로 삼겠노라 선언했다.
악의로 내린 결정인 만큼, 시험의 난이도는 뒤로 갈수록 악랄하게 높아졌고 사망자도 적잖게 생겼다.
그 이후로 더는 2원로의 제자가 되려는 이가 없었다.
그랬는데.
“그 아이가 죽을 것 같거든 적당할 때에 개입해도 좋아. 물론 그럴 경우 열쇠는 주지 않겠다만.”
“그건 알랑거리는 하이에나들을 조롱할 때 쓰시던 방법이 아닙니까.”
“멍청하면 조롱거리가 되겠지만, 명민하면 쌓여 있던 조롱을 다 제 위명으로 삼킬 수 있겠지.”
“…….”
“내키지 않으면 못 들은 일로 해 주랴?”
“……아니요.”
크루엘로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동요가 가신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 아이의 동의도 없이 내뱉는구나.”
“같은 생각일 겁니다.”
주저 없이 나온 답에, 2원로는 웃었다.
그러며 아주 조금쯤은 시오라 보네티가 궁금해졌다.
***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 침실에 틀어박혔다.
몸이 다 회복되기도 전에 긴 시간 마차를 탔으니 당연하다.
정신없이 자고, 자고, 계속 자고.
머릿속에 든 불순물이 깨끗해지다 못해 뇌도 좀 지워진 것 같을 때야 더 잘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러자마자 들은 첫 말은 이랬고.
“시오라 아가씨, 손님이 응접실에서 기다리십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들은 소리는 이랬다.
“네가 시오라로구나, 나는 나이젤리아라고 한단다.”
“안녕……. 네?”
“부인, 소몬 후작, 선생님, 뭐라고 불러도 좋아. 아, 화이트데저트의 2원로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쉽겠구나.”
붉은 갈색 머리칼을 틀어 올려 묶은 노인.
차분한 차림에 은테 안경이 꼭 학자 같았으며 팔꿈치를 덮는 긴 장갑이 인상적인 이였다.
아직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힘겹게 일했다.
「2원로, 나이젤리아. 대외적으로는 명망 있는 학자였으나 실제로는 검은 뱀 교단의 머리였다. 권력욕이 적은 편이었음에도 교단 내에선 대원로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였다.」
〈운명〉에서 2원로를 소개한 구절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외양 묘사가 떠올랐으며 그 내용은 눈앞의 노인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면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나는 일단 입을 열었다.
“와, 진짜요?”
입은 일을 안 했다.
이게 뭔 멍청한 반응이람.
나는 정신을 다잡고 눈을 또렷하게 떴다.
“크루엘로의 부탁으로 너를 가르치러 왔단다.”
그리고 2연타.
이 기분은 뭐랄까.
수확제에서 크루엘로에게 팔려 나갈 때 느꼈던 감상이다.
잠깐 또 얌전하더라니 무슨 짓 했냐, 크루엘로.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뭘 가르치러 오셨다는 건가요?”
“정확히는 시험이라고 해야 할까. 궁금하면 주변에 물어보려무나, 모두가 알 테니.”
“죄송하지만 크루……. 공작전하와 먼저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요.”
“나는 원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
어쩌라고.
귀한 기회니 황송하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뭐, 어떤 의미로 귀한 기회긴 했다.
원로랑 단둘이 독대라니, 열쇠를 빼먹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내가 내 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도 제자가 될 수 없었거든.”
“대단하신 건 알겠는데요.”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게 열둘, 두 번째가 열에 세 번째가 제로. 괴롭히려고 낸 걸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예상을 벗어난 천재가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그래서 한 번쯤은 통과하는 꼴을 보고 싶구나. 크루엘로가 내게 필요한 걸 말하라 하기에, 너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
“세 번만 통과하렴. 그러면 네게 내 열쇠를 주마.”
일순간 공기가 줄을 당긴 것처럼 팽팽해졌다.
나는 나이젤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연상시키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동자에 시오라의 모습이 비친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에는 널 습격하는 아이도 없을 거야, 난 누가 끼어드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언제부터 패를 다 까는 분위기가 된 건가요.”
“크루엘로가 말하지 않던?”
“제 반응을 보시면 아시겠지만요. 저에 대해 뭘 아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크루엘로가 말해 준 만큼만.”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말씀이네요.”
겉으로는 태연히 받아치면서도, 나는 내심 한숨을 삼켰다.
왜 말도 없이 일부터 저질렀냐고 크루엘로에게 따지고 싶지만, 실상 말할 시간이 없던 걸 안다.
침실에서 하루 종일 잠만 잤으니까.
나는 자리에도 없는 크루엘로를 머릿속에서 지워 내고 지금 상황에 집중했다.
손에 든 열쇠는 아직 하나, 모리온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넷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눈앞의 노인에게 있다면.
“왜 이런 제안을 주시는지는 물어도 답해 주지 않으시겠죠?”
“내가 대답할 문제는 아니지. 그래서 하겠느냐?”
“좋아요.”
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내 정보만 노출된 채로 끝나게 될 테니까.
실상 크루엘로가 물어 온 기회에 감사해야 했다.
“들은 대로구나.”
“뭘 들으셨는데요?”
“듣기론 네가 막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새 같다고 하더구나.”
알고 한 얘기는 아니겠지?
나는 괜히 뜨끔했다.
“파티 한 번, 무도회 한 번. 경험해 본 사교 활동이라곤 그게 전부인 데다가 친구조차 없다.”
크루엘로, 내 욕하고 다녀?
그리고 그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소리야?
“네가 화이트데저트의 사람이 되려면, 최소한 사람 보는 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뭔가요.”
“티파티에 나가 보렴. 언제든 어디든 그런 건 상관 없이 아무 곳에나.”
“그게 시험이에요?”
“다녀오면 첫 번째 시험을 내 주마.”
귀찮아도 못 할 일은 아니라 나는 수월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번을 포함하여 모든 시험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치르는 게 좋겠구나.”
다소 일방적인 협상을 마친 직후, 나이젤리아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닫고 나는 무심코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그 위에는 두 잔의 차가 있었지만, 어느 쪽도 입을 댄 흔적이 없었다.
***
보네티 백작저를 나온 2원로, 나이젤리아는 곧바로 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시간을 내 달라는, 대원로의 청 때문이었다.
그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헤오림이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드물게도 그는 인사말조차 생략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2원로. 그것을 가르친다니요, 건드리지 말라니요!”
나이젤리아는 태연히 응하며 모자를 벗었다.
“자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뭐 대수라고 대원로께서는 그리 흥분하시오.”
“그 별거 아닌 것 하나를 해치우려다 원로가 둘이나 실종됐습니다!”
“실종이 아니라 도주 아니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열쇠가 둘이나 사라졌다는 겁니다. 이러다가 자칫 대계마저─.”
“대원로께선 그분을 믿지 않으시오?”
2원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노인의 말을 끊었다.
“거사가 그릇될 일은 없소이다. 때가 되면 열쇠는 알아서 한곳에 모이겠지.”
더군다나.
“대원로께서 불안해하시는 사정은 알겠소만, 정녕 일을 망친 게 그 여자아이라 생각하시는 거요?”
“……가주가 벌인 짓임을 모르진 않습니다.”
“알면서 애먼 약자를 탓하시는가?”
“그것이 등장하고부터 모든 일이 어그러지는 기분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릴지는 압니다만.”
“안다니 다행이오.”
대원로는 이를 악물었지만,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노인 또한 내심으로는 동의하고 있었기에.
“일을 망친 건 크루엘로요. 그건 불안할 게 아니라 기꺼운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