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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47화 (47/162)
  • 47화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과 음산한 분위기.

    나는 잠긴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꿈 맞네.”

    원래는 저 난리를 피우기까지 며칠이 더 걸렸는데 말이야.

    소란은 금세 마무리됐다. 내 기억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금방.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이리로 다가온다. 터벅, 터벅, 터벅.

    높고 가느다란 소리로 이어진다. 끼이익.

    도서관의 문이 열리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느리게 고개를 들면 그곳엔 내 어머니가 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제, 너뿐이란다. 네가 마지막 신도야.”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건 비틀린 모정.

    아니, 신을 향한 집착이란 말이 더 어울릴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도서관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내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성인의 손이 그 자리에 있었다.

    “깰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이 꿈속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걸까.

    고민하다가 나는 소일거리라도 찾아보기로 했다.

    “〈운명〉이나 찾아볼까.”

    산더미같이 쌓인 책 더미 앞에 멈춰서 나는 그 사이를 헤집었다.

    에이미가 되기 직전까지, 그쯤에서 책을 읽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갈색 가죽 양장은 없었다.

    꿈이니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성적인 생각보다는 감정이 앞섰다.

    이상하게 점점 초조해졌고 따라서 손이 급해졌다.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없던 것 같아.

    어쩌면 여긴 꿈이 아닌 게 아닐까?

    내가 현실이라 믿었던 곳이 꿈이었으면?

    시오라 보네티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면…….

    “아.”

    나는 갑자기 고개를 꺾어 위를 봤다.

    신전은 언제나처럼 크고 높고 넓고, 공허하고…….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

    “……시오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흔들었다.

    눈앞이 어지러워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하여 시야가 맑아졌을 때, 나는 바라던 대로 꿈에서 깨어 있었다.

    눈앞을 가득 메운 건 선명한 붉은색.

    크루엘로의…… 색이었다.

    “아.”

    그럴 이유도 없는데 나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꿈에서 깨어나 처음 본 얼굴이 크루엘로라는 게 대단히 다행스러웠다.

    그런 내 속내를 알 리 없을 텐데 그는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왜?

    혹시 날 암살하려던 순간, 내가 어색하게 눈을 뜬 건 아니겠지?

    의심하는 찰나, 뭔가가 눈 쪽에서 흘러내렸다.

    더듬어 보니 눈가가 축축하다.

    혹시 피인가 싶어 고개를 내리자 보이는 건, 음.

    “설마…… 눈물?”

    꿈을 꾸다가 울면서 깨어났다고?

    내가?

    수확제 때는 내 감정이 아니었으니 그렇다 치자.

    내 감정으로 운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악몽을 꾼 것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황당하면서도 머쓱하여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크루엘로는 금세 당황을 수습하고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남의 침대인데 참 서슴없다.

    물론 내 침대도 아니었지만.

    “아닐걸요?”

    따지고 보면 고향이고 곧 돌아갈 곳인데 악몽은 아니지.

    아, 그러면 향수병인가 보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내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엘로는 왜 그렇게 놀랐어요, 사람 암살하려다가 들킨 것처럼.”

    “갑자기 울길래 깨워 줬더니 돌아오는 말이 삭막하네요.”

    “그냥 눈이 건조해서 그랬겠죠. 나 원래 안 울어요.”

    “흐음.”

    “수확제 때는 내가 울고 싶어서 운 게 아니거든요. 일일이 말하긴 복잡하지만요.”

    “왜 변명을 하지.”

    “누가 취조하길래.”

    크루엘로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내게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 그의 손가락등이 닿았다.

    시원하다.

    “열이 남았네. 아직 아파요?”

    “음, 그냥 멍한데.”

    “열 때문이에요.”

    “왜요, 내가 신경 쓰여서 미치겠어요? 내가 아프니까 그쪽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나요?”

    “응, 신경 쓰이네.”

    다 자란 크루엘로는 놀리는 맛이 없다.

    칫, 나는 공격 의지를 꺾었다.

    “우리 약혼까지 한 사인데 그러면 안 되나요?”

    “계약서에 있는 이혼 조항을 한 번 떠올리고 말씀하세요, 파트─너.”

    “달링이 그렇게 섭섭해할 줄은 몰랐는데 감동이네요.”

    “서론은 이만하면 됐고요, 그래서 얼마나 지났어요?”

    “이제 사흘이요.”

    우와, 그렇게나 됐어?

    9주문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몸이 더 안 좋았나 보다.

    그러니 그딴 꿈을 꾸지.

    크루엘로는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벌어진 일들을 말해 주었다.

    영지 상황이 멀쩡해지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던 원로회가 기어들어 왔다.

    하나 여론은 이미 바뀐 뒤였다.

    영지민 몇이, 그들이 꽁무니 빼는 모양새를 봤다나 뭐라나.

    더군다나 미뉴엣이 템페스타스까지 통과해 버린 마당─원로들은 크루엘로가 도와준 거라고 주장했지만─이라서…….

    “원로들은 다 감옥에 있어요. 아, 2원로는 빼고요. 실종됐다던데.”

    “엥 갑자기?”

    “익명의 제보자가 원로들의 비리를 제보했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그 제보자의 이니셜이 C.W.인가요?”

    “글쎄요, 말 그대로 익명이라 난 잘 모르겠네.”

    크루엘로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보네티의 2원로가 실종된 지점까지 포함해서, 크루엘로가 손을 쓴 건 틀림없어 보였다.

    수작질을 부려 온 게 정말 아레스였는지도 확인해야 할 테니까 이의는 없다.

    “달링의 자매는 어제부로 백작이 됐어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계승식은 약식으로 진행했고.”

    “아하.”

    “그 백작이 나더러 묻더라고요. 왜 여기까지 내려왔느냐고.”

    “뭐라고 했어요?”

    “음, 적당히 말해 뒀는데 나중에 말이나 맞춰 줘요.”

    무슨 말을 했는데? 왜 말을 안 하지?

    어쩐지 불길함이 치솟아 올랐으나 그걸 입 밖에 낼 겨를은 없었다.

    “이제 식사하러 갈까요?”

    아무렴, 내 배 속 사정보다 중요한 건 없지.

    ***

    체했다.

    사흘간 아무것도 안 먹은 위에 대뜸 스테이크를 집어넣었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고기 좀 먹었다고 체하다니, 이런 몸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역시 내 신한테 사기를 당한 게 틀림없어.

    “…….”

    속으로 생각하고 창문을 슬쩍 내다보았다.

    다행히 사람을 놀라게 하는 비도, 바람도, 천둥도 아무것도 없다.

    흠흠. 뭐, 겁먹은 건 아니고.

    어쨌거나 덕분에 나는 하루를 백작성의 침실에서 보내야 했다.

    어차피 수도로 돌아가는 건 내일이랬으니 상관없겠지.

    당장이라도 미뉴엣이 그날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캐물어 올 줄 알았으나, 의외로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볼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확신까지는 아니라서 무서웠는데 다행이야.

    그리고 가보트. 수도에서 꺼림칙한 태도를 보였던 그는.

    “그런데 그 말 사실이야?”

    침실의 문가에 서서 나와 대화 중이었다.

    저기나 침실 안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딴에는 중요하다고 하니까.

    “뭐가?”

    “네가 말을 탈 줄 몰라서 공작을 부려먹어 영지로 내려왔다는 말.”

    둘러대긴 무슨, 진짜 정직하게 말했네.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가보트는 눈가를 찡그렸다.

    “미뉴엣이 그러더라. 나보고 너한테 승마 좀 가르쳐 주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가보트한테 몸 쓰는 걸 배우라니 굴욕적이야.”

    “말도 못 타는 주제에!”

    “어쩔 수 없었어.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말 한 필 없었거든.”

    “그, 그 정도였냐? 아니, 진짜로 물어보려는 건 아니고.”

    얜 이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사기를 안 당하고 살아가는 거지?

    얼굴이 벌게진 가보트를 한심하게 쳐다보자 그가 한 번 더 화를 쏟아 냈다.

    다혈질.

    “아무튼, 이번 일은 고마워.”

    “뭐가?”

    “휘슬을 도와준 거 말이야.”

    “이거 봐, 이거. 아직도 난 남이구나. 날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면 내가 영지 좀 도왔다고 고맙다고 했겠어?”

    “뭐? 야, 그런 게─.”

    “흑흑, 서러워. 가보트가 아직도 날 남으로 보다니, 텃세가 너무 지독해서 이 누나는 힘들어.”

    “시오라!”

    당황하던 가보트는 익숙한 패턴에 화를 내며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여기가 침실이란 사실을 자각한 건지 멈칫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가를 서성거리는 모양새가 강아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가보트는 화를 내려는 듯 인상을 썼으나 내가 너무 시원하게 웃자 금세 전염되어서 함께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사그라졌을 때, 기껏 분위기를 둥글게 마모해 놓은 보람도 없이 그의 표정은 다시 가라앉았다.

    가보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버지는…….”

    그는 채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그 반응에서, 나는 가보트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미뉴엣이 알려 준 건지, 스스로 생각해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도에서 거리를 둔 것도 그래서였을까.

    그러나 나는 가보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그래.”

    유감스럽게도 내 알량한 배려는 내뱉자마자 들통난 듯싶다.

    가보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의 발치 앞, 카펫이 동그란 모양으로 젖어든다.

    내 동생의 얼굴에서 툭툭 떨어져 내리는 무언가를, 나는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침대와 문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아무렴.

    ***

    휘슬에서 수도로 올라온 즉시, 크루엘로는 어딘가로 향했다.

    모노톤으로 꾸며진 고풍스러운 저택의 응접실, 사내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2원로님께서 대원로님과 의견이 다르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상대는 단출한 차림의 노인이었다.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노년의 여성.

    화이트데저트에서는 2원로라 불리는 이였다.

    “어릴 때는 2원로님도 같으셨습니다만, 어느 순간부턴가 제게 간섭하지 않으시더군요.”

    “내가 대의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나?”

    “그럴 리가요.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내리라 생각하신 거겠죠.”

    “네가 날 판단하는구나. 빙빙 돌릴 것 없이 할 말을 하거라.”

    “열쇠를 내어 주십시오.”

    관심이 없다는 듯, 내리깔렸던 눈이 느리게 올라간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입술이 얄팍해지도록 입꼬리를 당겼다.

    “제 손으로 열쇠를 모아 문을 여는 걸 바라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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