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내 말에 미뉴엣을 자극했는지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도와? 뭘? 네깟 게 어떻게 날 돕겠다는 건데.”
“들어 봐.”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내가 우스워? 시답잖은 소리 말고 꺼져. 네가 뭘 믿고 이러든 더는 봐줄 생각도 없어.”
“나, 크루엘로 믿고 헛소리하는 거 아닌데.”
“내가─.”
“언니.”
난데없는 부름에 미뉴엣이 한순간 말을 잃었다.
“나한테 빚 하나 있지? 가보트의 볍씨를 불러 줬을 때 말이야.”
“빚은 가보트 말고 나한테 달아 둬.”
생각 같아서는 미뉴엣도 기절시켜 버리고 싶지만, 그녀는 깨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 책임감에 기대는 수밖에.
나는 웃었다.
“갑자기…….”
“그거, 지금 받을게.”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비밀로 하는 거야.’
그렇게 속삭인 시오라는 프레스토를 거느리고 용오름 쪽으로 걸어갔다.
제 주인도 잊은 듯 순순한 정령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으나 기이하게도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뭘 하는 거야, 미뉴엣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엉망으로 젖어 흔들리는 금빛 머리칼을 보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알 수 없는 예감.
‘무슨 멍청한 생각을.’
가만히 있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미뉴엣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시오라를 붙들려 손을 뻗었다.
마법으로 근방의 시야를 가릴 뿐, 내내 얌전하던 공작이 그녀를 막아섰다.
“있어 보지 그래. 자네 힘으론 턱도 없을 텐데.”
“시오라가 죽기를 바라시는 건 아닐 텐데요.”
“명령으로 해 줘야 가만히 있겠나.”
“지금!”
미뉴엣은 소리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제가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서는 아니다.
흥분이란 미뉴엣 보네티와 가장 먼 단어였지만, 그런 게 지금에 와 중요할 리 없다.
그녀가 입을 다문 건 순전히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요란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은 여전했으나, 공기에 길이 생겼다.
시오라의 머리칼이 나선형으로 휘감기듯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으나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서로운 기운이 퍼진다.
“저게 뭐야.”
미뉴엣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프레스토는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시오라의 앞에서 느릿하게 날개를 펄럭였다.
시오라가 새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지던 새하얀 광휘가 손끝으로 흘러가 정령을 휘감는다.
용오름이 그새 더 가까워졌는지, 바람은 더 폭력적으로 몰아쳤다.
그러나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오라에 이어 정령 또한 희게 빛났다.
처음에는 옅게, 그러다가 그 깃털의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환하게.
그러며 검독수리의 몸이 자라난다.
점점 크게,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는 평범한 생물이라 칭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은 마치.
“아.”
신을 닮았다.
미뉴엣은 기록실에서 읽은 문구를 떠올렸다.
외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모든 기록의 끄트머리에 적혀 있어 강제로 머리에 새겨졌던 그 글귀.
「보네티에는 신이 있다.」
성휘에 휩싸인 새는 더 자라나는 걸 멈추고 용오름을 향해 날았다.
원래는 진녹빛이어야 할 바람이 기다란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었다.
「그녀는 우리의 시작을 만들었으며.」
원래 몸집의 몇 배가 자라났다고 한들, 용오름 앞의 새는 여전히 미미했다.
그러나 정령의 날갯짓은 저보다 몇 배는 거대한 재앙을 휘감고 저와 같은 색으로 물들이며 끝내는.
「우리와 함께 걷고 우리의 마지막을 수호할 것이다.」
무언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미뉴엣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후두둑, 비와는 명백히 다른, 덩어리진 물방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러니 우리는 험난한 폭풍 속에서도.」
미뉴엣이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땐, 조금 전 떨어진 물줄기에 비마저 지워진 뒤였다.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잔잔해진 바다.
빽빽하게 하늘을 덮은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미뉴엣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광휘에 휘감겼던 영령한 새는 빛을 잃었으나, 그래서 더 그 아름다움이 선명해 보였다.
미뉴엣은 달라진 제 정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이 다한 정령이 흩어지듯 사라져 제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보네티에는, 신이 있다…….”
입 밖으로 내뱉어 말하고, 그녀는 웃고 말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미뉴엣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조금 전의 광경을 만들어 낸 주인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시오라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시오라는 여봐란듯이 웃었다.
그리고.
“너, 대체……. 시오라!”
그대로 기우는 몸.
미뉴엣이 다급히 손을 뻗었으나, 먼저 준비하던 이가 있었다.
크루엘로가 자연스럽게 시오라의 몸을 받쳐 안았다.
미뉴엣과 달리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비밀로 하자고 협의했잖아.”
“전하.”
“그러면 ‘너는 대체’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지.”
그는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만큼, 묘하게 웃었다.
미뉴엣은 입술을 한 번 짓씹고는 물었다.
“따질 생각은 없어요. 시오라는 괜찮은가요.”
“아마도?”
“……이걸 이제야 묻는 걸 보면 저도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지만.”
미뉴엣은 제 시야를 가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물을 머금고 묵직해진 끝에서 축축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피부에 닿는 그 불쾌한 감각이 그녀를 차분하게 했다.
“전하께서는 여기에 왜 오신 건가요.”
***
용오름은 어찌나 커 보이고 프레스토는 어찌나 작아 보이는지.
나섰다가 안 되면 그렇게 창피한 일도 없다.
계속해서 성력을 밀어 넣다 보니 정도를 넘었고 결국 눈앞이 새까매졌다.
픽픽 쓰러져 대는 취향은 없는데 이게 벌써 몇 번째야.
눈을 뜨며, 나는 또 몇 시간이 지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건 예상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어라.”
세로로 무늬를 낸 높다란 기둥들.
결벽적으로 새하얗고 깨끗한 석조 건물과 중심에 선 거대한 여성체 조각상이 보인다.
그 앞에 놓인 제단까지 차례로 훑어보며 나는 말을 잃었다.
아주 익숙한 광경이지만 오래간만이라 그런지 몹시 생소했다.
그건 내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음, 음.”
에이미도 비가도 시오라도 아닌 ‘내’ 목소리.
몇 년 만에 듣는 거지.
조금 어색해서 목을 더듬어 보았다.
“애기!”
“왁!”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라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음.
설마 나, 아직 안개 속에 있나?
여태 있던 일은 다 꿈속의 꿈, 환각 속의 환각 같은 거였어?
치미는 혼란에 멀거니 서 있는데, 나를 부른 신관이 내 볼을 쭉 잡아 늘였다.
안 아프다.
이쪽이 꿈이구나.
“뭘 넋 놓고 있어,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신관이 황당해하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 눈높이가 말도 안 되게 높아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손이 꼼지락거린다.
내 몸이 어려져 있다.
나는 여기가 꿈속이라는 두 번째 증거를 찾았다.
“애기!”
“왜 찾으셨는데요?”
“뭐야, 아직도 삐졌어? 벌써 열 살이나 된 애가 속은 좁쌀만 해서는.”
“엥. 내가 삐졌다는 설정이에요?”
“말 또 이상하게 하네. 너한테만 숨기려고 한 거 아니야. 원래도 체이스한테만 살짝 말하려던 건데.”
“어, 이 말은…….”
“좋아, 원래 확실한 게 아니니 말을 아껴야겠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애기, 너 이제 막내 아닐지도 몰라.”
역시나.
내가 알던 말이 나왔다. 기억 속에서 들은 적이 있던 이야기.
그녀는 제 배를 소중히 감싸며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임신읍?”
나도 모르게 상대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녀는 의아해했지만, 손을 떼어 줄 생각은 통 들지 않는다.
등으로 식은땀까지 흘렀다.
“말, 하지 말아요. 알았죠?”
어차피 진짜 임신도 아니었다.
상상임신이라고 했던가, 착각이라고 했던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 배 안에 아기는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진짜도 아닌 꿈이니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하면서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여기서 뭘 하고 있니. 놀고 있을 시간이 아닌데?”
어머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봤으나 나는 태연히 웃었다.
“오늘 분의 공부는─.”
“다 했어요. 그래서 좀 쉬고 있었어요, 어머니.”
“시간이 남으면 도서관으로 가라고 했을 텐데.”
“지금 갈게요.”
고분고분하게 답하고, 나는 자기가 아이를 품은 줄 아는 신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래요. 페불라께서 그러셨어.”
“어, 어?”
“신을 거역할 생각은 아니죠?”
엄포를 놓자 그녀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끔찍하게 크고 말도 안 되게 책이 많은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도서관 담당이셨지.
“명심하거라. 도서관의 책을 다 읽는 게 마지막 신도로서 네 의무라는 걸.”
내게 쏘아붙이고, 그는 도서관을 나가 열쇠로 문을 잠갔다.
쾅 닫힌 문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왜 쓸데없이 옛날 일을 꿈으로 꾸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의식이 또렷한 걸 보면 내 신이 개입한 것 같기도 한데, 도대체 왜?
페불라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빼 펼쳤으나 글자 하나 없는 백지다.
꿈이란 게 여기까지 섬세하지는 않네.
몇 권을 펼쳐도 마찬가지라 나는 독서로 시간 때우기를 포기했다.
심심할 틈은 없었다.
곧바로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