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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45화 (45/162)

45화

“미뉴엣!”

내 부름에 미뉴엣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각은 풀린 거겠지?

설마 저 애한테도 죽이니 마니, 살해 협박을 듣는 건 아니겠지?

의심하며 눈을 마주치자 미뉴엣은 터벅터벅 다가와서 대뜸 내 볼을 잡아 늘였다.

“이으에?”

“넌 진짜지?”

환각 후유증이로군.

고개를 끄덕이자 미뉴엣이 순순히 손을 놔주었다.

얼굴은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췌했지만, 눈빛은 꽤 또렷하다.

환각 맛을 단단히 봤군. 하여간 믿을 사람이 나 빼고 하나도 없다니까.

2차 관문도 끝난 듯하여 우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오래지 않아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천둥소리에 묻혔는지 절벽은 이미 양옆으로 벌어진 채였다.

시련은 두 번째가 마지막이니 이제는 밖으로 이어지는 출구다.

나는 젖어서 뺨에 달라붙는 머리칼을 설렁설렁 떼어 내며 절벽으로 향했다.

생각보단 파란만장했지만, 어쨌거나 템페스타스도 끝이다.

아, 축하한다고 말해 줘야 하나? 워낙 경황이 없어서.

출구를 지나며 미뉴엣을 바라본 순간, 기척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미뉴엣!”

가보트였다.

한껏 일그러진 얼굴에, 기쁨보다는 절박함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 표정이 들어차 있다.

걱정을 많이 했나 본데, 나는 가보트를 놀리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큰일 났어, 지금 바깥이!”

“어라.”

바다 쪽에서 달려드는 거대한 용오름을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3차 관문?

가보트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1. 2원로가 절벽에 뭘 부었다.

2. 거인─템페스타스의 1차 관문 추정─이 절벽보다 커져서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바람으로 흩어졌다.

3. 영지에 폭풍우가 몰아친다.

거기에 가보트의 추측이 더해졌다.

“경황이 없어 전하는 걸 잊었는데 어젯밤 내가 뭘 좀 엿들었어. 웬 남자와 2원로가 떠들어 댔는데.”

“시간 없으니 빨리 말해.”

“최대한도는 30%니 정량만 써라,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효과가 나타날 거다. 들은 건 그것뿐이지만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베아티투도 얘기 같은데.

크루엘로에게 눈짓하자 그 또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상대는 아마도.

“어떤 남자였어?”

“얼굴은 못 봤어. 목소리만 들었는데 내가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낮고 굵더라. 굉장히 고압적이었고.”

“음.”

아레스로군.

최근 실패가 잦았던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지.

아무튼, 진짜라면 대단한 일이었다.

어떻게 안 들키고 숨어들었대. 수확제를 떠올려 보면 기감에 굉장히 예민한 것 같던데.

하기야 볍씨와 계약한 이후, 가보트의 기척이 크게 줄어들긴 했다.

정령을 불러낼 때면 더했으니, 은신에 특화된 쪽인지도.

앗, 그러면 그런 가보트가 엿듣는 걸 잡아낸 내가 제일 대단한 건가?

미뉴엣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땅한 인물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보네티 원로들은.”

“다 튀었어, 빌어먹을 인간들.”

“그 짧은 시간 내에? 대단들 하다.”

“영지는 어떻게 됐는데.”

“일단 대피 명령은 내려 뒀지만……. 미뉴엣, 너도 알 거야. 저 용오름이 육지에까지 닥치면…….”

영지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보통은 육지에 닿으면 기세를 잃는 게 용오름이라지만, 저 말도 안 되는 크기의 회오리가 쉽게 사라져 줄 것 같진 않았다.

베아티투도를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고 하니까 더더욱.

일단 항구는 망가질 거고 밭과 과수원을 비롯하여 집까지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얼마나 큰 피해가 생길지 몰라. 수복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그런 와중에 원로회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몸을 뺐단 말이지.”

미뉴엣이 어둑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도 잠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말, 남은 거 있어?”

***

말은 재앙으로 달려가길 거부했으나, 망아지 적부터 받아 온 훈련을 거역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세 마리의 말─나는 이번에도 크루엘로와 같은 말을 탔다. 시오라의 몸이란─이 최전방으로 달려 나간다.

휘슬의 남쪽으로 난 곶은 끝까지 달리면 10km를 살짝 넘기는 정도다.

30분이 덜 되어, 우리는 발 디딜 수 있는 가장 먼 곳에서 용오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위용은 비교할 수 없이 위압적이었다.

“……젠장.”

할 말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보트만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저걸 어쩌겠다는 건데.”

“프레스토.”

미뉴엣은 답하는 대신, 다시 제 파트너를 불러냈다.

검독수리는 주인의 뜻대로 용오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가보트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저 또한 뱁새를 불러냈지만, 피아니시모는 제 몸도 가누지 못했다.

저런.

나는 몇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루엘로가 용오름을 올려다본 채로 말했다.

“대강 어떤 상황인지 짐작되죠?”

“내 약혼자가 맛이 가서 나를 죽이게 하고 싶은 누군가가 관문에 베아티투도를 퍼부은 상황이요.”

“달링은 몸 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네요.”

“그건!”

누누이 말하지만, 시오라의 운동 신경이 나쁜 탓이지 내 탓이 아니다.

빌려 쓰는 입장에서 계속 투덜거릴 수도 없었지만.

“그건?”

크루엘로가 되물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어쨌거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도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진 않았다.

“정량대로 쓰지 않아서 그런지 베아티투도는 거의 1차 관문 쪽에 흡수된 듯해요. 아까 보니 마법진의 연결부가 끊어졌더라고요.”

에너지가 통로로 과도하게 유입되어 목적지에는 별로 가지도 못하고 터져 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절벽 내에서만 돌아야 하는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했고.

하기야.

“대놓고 함정이라기엔 안개 쪽이 좀 약하긴 했죠.”

크루엘로는 그 약한 공격에도 타격을 받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멀쩡했으니까.

“확실한 건 하나예요. 그 빌어먹을 안개는 어떻게 걷어 냈다고 쳐도 저건 못 없애요.”

“그쪽이 직접 나서도요?”

“내 입으로 못한다고 말하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지만, 네.”

크루엘로는 한쪽 눈가를 찡그리고 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수확제 때 썼던 주문, 이쪽에도 가능한가요?”

“아니요.”

이렇게 드넓은 공간을 역행시키려 했다간, 내가 원래 몸으로 역행되고 말 거다.

그렇더라도 원로회를 향한 크루엘로의 적의를 확인한 상황이니,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어라, 잠깐만.

혹시 나는 이미 임무를 완수한 게 아닐까?

“그러면 불가능하겠네요. 다가오기 전에 몸을─.”

“그것도 아닐걸요.”

내가 언제 방법이 없다고 확언이라도 했나.

베아티투도, 억지로 추출한 성력을 에너지원으로 써서 정령의 기운을 저만큼이나 부풀렸다.

그러면 진짜 성력으로도 정령을 강화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인공적으로 만든 것보다는 진짜가 더 강할 것 같은데.

성력을 흘려보내는 통로로만 쓰면─마법진 꼴이 안 나도록 주의해야겠지만─ 신체적인 부담도 그렇게 크지 않을 것 같고.

더군다나 보네티가 페불라의 교단에서 출발한 이들이라면 합도 맞겠는데.

“공작전하.”

용오름을 노려보던 미뉴엣이 어느새 다가왔다.

그녀는 크루엘로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그가 선수 쳐 답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대피까지네.”

“내버려 두면 영지가 엉망이 될 겁니다. 영지민 중 몇은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인생이 끝장날 거예요.”

“불가능해. 말 그대로의 의미로.”

“보네티를 통째로 넘기는 게 아니라면 무슨 대가라도─.”

“소백작은 꽤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크루엘로가 차갑게 미뉴엣의 말을 끊어 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이성을 찾을 수 있으면 그게 사람인가.

나도 내 돈─교단의 재산─이 날아갔을 때, 눈이 돌아가서 선배 신도들의 지옥 생활을 빌어 줬으니 심정적으로 미뉴엣의 편이다.

미뉴엣은 크루엘로를 노려봤으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 구경 말고 꺼져 주세요.”

오!

살벌하게 내뱉은 미뉴엣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가보트의 옷깃을 낚아채어 우리 쪽으로 밀쳤다.

“뭐 하는 거야, 미뉴엣!”

“바티, 넌 대피해.”

“너는 어쩌려고?”

“난 템페스타스를 통과했어. 원로회는 도망갔고.”

그녀가 두어 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제 내가 이 땅의 주인이야. 멍청한 놈들의 수작질 때문에 손도 못 써 보고 영지를 망칠 순 없어.”

“미뉴엣.”

“안 되는 거 나도 알아.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보고 몸을 피할 거야. 안 그러면 분명 후회할 테니까.”

“……그러면 나도 남을 거야.”

“헛소리하지 마, 이게 장난인 줄 알아?”

“넌 내가 하는 건 다 장난 같지? 우습게 보지 마!”

서로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남매간의 다툼은 아름다웠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용오름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기세로 보아 10분이면 육지에 닿겠다.

하는 수 없지,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까.

“크루엘로, 가보트 데리고 좀 피해 줘요.”

크루엘로는 나를 빤히 보더니 픽 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한창 화를 내는 가보트의 목덜미를 후려쳤…….

음?

“바티!”

“피했어요.”

“저기요? 꿈속도 피신처로 쳐 주나요?”

“어쨌거나 정신만 없으면 상관없잖아요. 방해될 일 없을 텐데?”

“허.”

크루엘로는 의식을 잃은 가보트를 대충 말 등에 얹어 놓았다.

그러곤 구경할 준비를 마쳤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미뉴엣은 우리를 번갈아 봤으나 조금 전의 대화로 범인을 알아낸 듯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나를 노려봤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음, 나도 장난할 생각은 없어. 난 진지한 사람이거든.”

“시오라 보네티!”

무의미한 말다툼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나는 배에 힘을 꽉 주고 소리쳤다.

“프─레─스─토! 네 주인이 불러!”

용오름 주변을 깔짝거리고 있던 검독수리가 곧바로 날아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잽싼 태도였지만, 짐작하고 있었다.

전에 신수도 그렇고 정령들도 그렇고, 내 신성이란 게 그네들의 호감을 사기 좋은 모양이다.

단순히 동향 사람인 걸 알아본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미뉴엣은 화가 났다.

“돌아가, 프레스토! 난 부르지 않았어.”

“에헤이, 있어 봐.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거든, 미뉴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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