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눈앞엔 그저 에이미 로열샌드가 가득 차 있을 뿐, 누군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크루엘로가 닥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절벽을 공격하면 끝난다.’
환각을 만들어 낸 마법진 자체가 망가져 버리면, 에너지원은 아무 의미 없게 될 테니까.
문제는 절벽이 무너졌을 때, 과연 시오라 보네티가 살아남을 수 있냐는 것이다.
성력을 쓰면 순발력은 꽤 좋아지는 듯했지만, 전반적인 운동 신경이 엉망이다.
크루엘로는 장담할 수 없는 문제에 걸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그는 일단 움직였다.
수많은 환영들이 그를 뒤따랐다.
[왜 말이 없어, 로이?]
[목이 아파?]
“닥쳐.”
[세상에, 너 그런 말도 할 줄 아니?]
[우리 차를 마시자! 나 레몬 셔벗이 먹고 싶어. 저번에 먹은 게 진짜 맛있더라.]
“부탁이니 조용히 해.”
[로이는 차가 싫어? 그러면 내가 대신 마셔 줄게.]
[맞아, 그게 뭐든 대신해 줄 수 있어.]
“제발 좀, 에이미.”
[에이미가 아니라니까요.]
에이미 로열샌드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
크루엘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 10대 중후반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에이미와 마찬가지로 금발이었으나 색이 더 짙었고, 머리는 단발.
다소 우울한 인상에 입술 밑에 점이 있는 소녀.
그녀가 냉소적인 투로 말했다.
[하도 그러시길래 저도 그 아가씨의 얼굴을 봤어요. 저랑 전혀 안 닮았던데요. 이러는 거 그 아가씨한테도 실례잖아요.]
“……비가.”
[이제야 제 이름이 기억나셨어요?]
비가는 피곤해 죽겠다는 듯이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이게 다 뭐예요.]
그러고는 크루엘로의 한 걸음 앞에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나은 척하시더니 또 세상이 전부 에이미 아가씨로 보여요?]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니면 뭐가 달라지나요. 아직도 그분의 죽음을 못 잊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요.]
크루엘로에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을 쏘아 내고 비가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저도요.]
“비가.”
[생전엔 저를 못 믿으시더니 사후엔 또 엄청나게 생각해 주시네요.]
“……그래서 난─.”
[그게 제가 정말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크루엘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비가는 반걸음을 더 걸어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양손이 다정하게 사내의 양 뺨을 붙들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잔인한 목소리.
[알잖아요, 전부 소공작님의 욕심이에요.]
“…….”
[정말 저를 위하신다면 그냥 다 잊어버리세요. 무덤을 파헤치지 말고.]
크루엘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비가를 노려봤다.
[절벽을 부숴서 모두를 묻어 주세요. 그러면 다시는 소공작님이 괴로울 일도 없을 거예요.]
“……안 해.”
[우리는 소공작님을 해치러 나온 게 아니에요. 그랬다면 이렇게 말로만 떠들고 있지 않았겠죠.]
“비가.”
[편해지고 싶어요, 크루엘로.]
그 말에 크루엘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를 악물고 그는 비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면서도 몸을 휘청거린 건 오히려 비가가 아니라 그쪽이었다.
역기가 치민다, 크루엘로는 다시 손등으로 입가를 눌렀다.
“넌…… 비가가 아니야.”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건 아니고요?]
비가가 그를 조롱하듯 웃었다.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퍽 따뜻한 웃음은 크루엘로의 정신을 강하게 자극했다.
시야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크루엘로는 무겁게 마른침을 넘겼다.
비가가 한 걸음 더 다가오기에 그는 세 걸음을 물러났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져 드릴게요. 신분제란 게 그렇잖아요. 아랫사람이 이길 수가 있나.]
비가가 자주 하던 말.
이게 환각인 걸 알면서도 크루엘로는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제가 이 환각의 핵이에요. 절벽을 부수지 않아도, 저만 죽이면 안개는 걷힐 거예요.]
“널, 죽이라고?”
[어차피 환각인데 어때요. 제가 이 자리에 살아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니시죠?]
아니면, 겁먹었어요?
비가가 장난스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그녀의 눈 밑으로 유쾌한 보조개가 팼다.
크루엘로는 따라 웃지 못했다.
무겁게 침잠한 눈으로 비가를 노려볼 뿐이다.
그래, 상대는 진짜 비가가 아니라 환각이다.
1차 관문과 마찬가지로 핵을 파괴하면 꿈처럼 사라지는 단순한 시련.
그는 거칠어진 숨을 달랠 생각도 않고 마나를 끌어모았다.
크루엘로의 손에서 얼음으로 된 검이 솟아났다.
상대는 도망칠 생각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 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그냥 환각일 뿐이다.
“…….”
검을 쥐니 꾸물꾸물 살의가 치솟는다.
고백하자면, 그건 환각을 향한 감정만은 아니었다.
진한 애정의 옆자리에 같이 묻어 둔 원망이 있다.
사체에서 흘러나온 질척한 감정은 제가 비가를 떠올리는 걸 의도적으로 막아왔으나 둑이 터진 듯 쏟아지고 말았다.
상대가 원해서 죽은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통제할 수 없다.
왜 너는 나를 두고 죽었나.
왜 흉터를 뜯어내 새로 아물게 하고 그 자리에 더 큰 못을 박았나.
나는 세상에 너뿐이면 됐는데.
그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크루엘로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차라리 검을 휘둘러 비가의 환각을 베어내면 그의 마음은 훨씬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지.
마음엔 증오가 가득한데, 손에 쥔 무기를 한 번만 움직이면 되는데 그 한 번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환각과 영원히 살아갈 순 없어요. 이젠 졸업하셔야죠.]
그렇게 말하며, 이상하게도 그녀는 갑자기 크루엘로의 뒤쪽을 가리켰다.
말과 맞지 않는 손짓에 그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크루엘로의 등에 강렬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큭?”
“오, 이걸 속네.”
이어 들린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크루엘로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던 비가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그의 등짝을 후려치고 있었다.
“비…….”
내뱉기 전에 크루엘로는 깨달았다. 상대는 비가가 아니다.
알아차린 순간 비가의 얼굴이 녹아내리고 다른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번에도 금발이었으나 그 외엔 전혀 다르다.
머리 길이도 코 모양도, 점 없이 깨끗한 턱도, 그리고 동그랗게 뜬 보랏빛 눈동자는 더더욱.
크루엘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오라 보네티?”
“알아보겠어요? 정신이 들어요? 이젠 제 말 들려요?”
질문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시오라는 구태여 등짝을 한 번씩 더 두드려 댔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그 얄팍한 수작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비가가 아닌 시오라.
확신을 얻은 동시에 주위에 있던 에이미가 차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건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
가까이에 있던 이부터, 보이지 않게 멀리 있던 이까지.
마침내 모두가 사라진 세상에서,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오직 시오라뿐이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몹시도 선명했다.
크루엘로가 봐 온 색 중에 가장.
크루엘로를 찾았다.
근방 30m 내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얼굴로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근방 1m 내까지 에이미들이 들어찬 게 아이러니했다.
내 가짜 분신들을 힘겹게 헤집고 그 앞을 가로막았을 때, 나는 일이 다 해결된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비가.”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진짜로 심장 떨어지는 줄.
당연하게도 크루엘로가 내 정체를 눈치챈 건 아니었다.
다만 환각에 당해, 나를 비가로 봤을 뿐이다.
내 몸에 정화를 걸어도 안 통하고 뭐라고 말해도 혼자만의 대화를 진행하기에, 뺨까지 붙들고 말했는데 차갑게 내쳐졌다.
나쁜 자식!
“널, 죽이라고?”
“뭐라는 거야, 미쳤나 봐!”
급기야 살기까지 뿜으며 헛소리를 지껄이기에 나는 도망칠 준비를 마쳤다.
쉬이, 착하지.
나는 크루엘로를 긴장시키지 않기 위해 손바닥을 펴 보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좋아, 셋을 세고 도망치자.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흠, 잠깐만.”
나는 내민 손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크루엘로의 눈동자가 쫓아왔다.
왼쪽도 위도 아래도 마찬가지.
“오호라.”
내 말과 표정은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내 동작은 그대로 보이는 거 맞지?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앗, 저기! 대원로가 탭댄스를 추고 있다! 세상에, 9연속 백 텀블링! 저것이 바로 예술?”
나는 크루엘로의 뒤쪽을 가리키며 아무렇게나 소리쳤다.
다행히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녀석!
그 틈을 타, 나는 성력을 잔뜩 불어넣은 손으로 크루엘로의 등짝을 갈겼고 그는 정신을 차렸다.
이상, 경과 보고 끝.
모르는 척 등을 더 패 주다가, 크루엘로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슬그머니 손을 회수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허탈한 듯 웃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에요.”
“때린 건 등짝이지만요.”
머리를 때려 줄 걸 그랬나. 아쉽다.
크루엘로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달링은 별일 없었나 보네요.”
“맞아요. 크루엘로 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환각 자체가 서로 공격하게 만드는 함정이었던 듯하고.”
“그렇겠죠. 그쪽이 날 죽이려고 한 거 보면요.”
“이해해 줘요. 달링이 다른 사람으로 보였어요.”
“죽었어도? 그래도 이해해야 할까요?”
“……뭘 원해요.”
“일단 유보.”
오늘도 또 하나의 빚을 얻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안개가 남아 있으나 아까보다는 상당히 옅어진 채였다.
정황상 따져 보면.
“들어온 사람이 전부 환각을 해제해야 끝나는 체제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안개가 빠르게 사라졌다.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아니, 비단 기분상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무슨 비가 이렇게…….”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와르르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천둥 치는 소리도 보통 시끄러운 게 아니다.
언제부터 내린 거람?
나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내렸고 멀거니 선 여자 하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