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지금, 소리 들으셨습니까?”
“소백작이 1차 관문을 통과했나 보오.”
“빠르군. 싱거울 정도야.”
“설마 공작이 도와준 건…….”
원로들이 웅성거리며 절벽 쪽을 힐금거렸다.
미뉴엣이 안에 들어간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2원로는 인상을 찡그렸다.
“소란 떨 것 없네. 어차피 1차 관문이야 대단하지도 않아.”
담력과 관찰력, 그리고 순발력.
전해 듣기로는 정령의 힘보다는 그런 요소들이 중요하다고 했다.
약삭빠른 소백작에게 적합한 시험이다.
다음 관문은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없겠지만, 2원로는 그 작은 가능성조차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노인이 가보트를 흘금 보았다.
그는 초조하게 제 누이를 기다릴 뿐, 원로들의 대화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대놓고 저질러도 모르겠지만, 간단한 속임수쯤은 써 줘야 뒤탈이 없겠지.
“그러면 2차 관문을 열어 드려야겠군.”
2원로는 들으란 듯 크게 말하며 절벽으로 다가갔다.
2차 관문은 이미 열렸으나, 저 덜 자란 꼬마가 알 리가 없으니 눈속임으로 딱이다.
노인이 품에서 자색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새하얀 알갱이들이 가득 들어 있다.
모래알을 확대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다이아몬드를 조그맣게 뜯어낸 것 같기도 한, 베아티투도.
2원로도 이름만 어렴풋이 들어 본 금지 물품이다.
‘30%라고 했던가.’
화이트데저트의 10원로는 그 이상으로 사용하면 좋지 못한 꼴을 보리라 경고했으나 우습지도 않았다.
“예상한 효과가 몇 배로 나타날 거다. 너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효과가 크게 나타나서 뭐가 나쁘단 말인가.
어차피 그 효력은 시험장 안에서만 발휘될 테고, 마법진이 새겨진 절벽을 벗어나지도 못할 텐데.
더군다나 2차 관문이 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2원로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고는, 주머니에 든 것을 모조리 절벽에 털어 넣었다.
알갱이는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2원로의 부관이 당황하여 물었다.
“워, 원로님? 괜찮겠습니까?”
“아무렴. 확실히 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마법진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한다.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굉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절벽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마법진의 녹빛은 너무 짙어져 이제는 검은색으로 보일 지경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2원로는 웃었다.
“확실히 끝이 나겠군.”
이제 그 건방진 어린애 대신 제 핏줄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다.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뭐야, 저게!”
다른 원로의 경악 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2원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거인.
노인이 1차 관문의 시련으로 알고 있는 그 거인이 절벽보다도 거대해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원로와 눈이 마주친 순간, 거인의 입가가 크게 벌어졌다.
‘……웃었어.’
그럴 리 없겠지만, 그 모양새가 꼭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거인이 팔을 들었다.
보네티의 원로회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압도되어,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당장은 비극이 닥치지 않았다.
거인은 그들을 공격하지 못했고, 외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묘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준비된 핵이 그 강렬한 힘을 견뎌 내지 못하고 깨져 버린 탓이다.
‘끝…… 난 건가?’
그러나 2원로의 희망찬 바람이 무색하게도 흩어진 기운은 고스란히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모여든 모든 이의 머리칼이 동시에 흩날렸다.
쿠르릉, 하늘이 단번에 새까만 구름으로 뒤덮이고 번개가 몇 번씩이나 내리꽂혔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와 옷자락이 펄럭거리도록 거센 바람.
그 기운은 흩어지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바다 쪽에 자리를 잡았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2원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보트가 항의하듯 따져 물었으나, 2원로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머리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노인의 정신은 이미, 바다에 생겨난 괴물에 홀려 있었으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용오름.
“2원로님!”
템페스타스. 말 그대로 폭풍우였다.
“나는, 난…….”
“피하셔야 합니다!”
부관이 2원로의 팔을 낚아채어 달렸다.
동시에 정신을 차린 원로들 또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몸을 피했다.
가보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쳐도, 청년의 소리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제 몸이 상할까 달려 나갈 뿐.
마차와 말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러나 그 요란한 소음조차 대기의 비명에 여지없이 파묻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 굉음으로부터 30m 떨어진 곳.
거대한 나무에 기댄 사내가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정량을 지켰어야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베아티투도는 아주 극미량일 뿐인데, 감히 어찌 경고를 무시한단 말인가.
하기야 그토록 어리석기에 인간이겠지.
아레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나야 알 바 아니지만.”
그는 2차 관문 쪽을 흘금 보곤 자리를 떴다.
바라는 소식이 귀에 들려오기를 기대하면서.
***
2차 관문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관문.
절벽이 열어 준 문을 넘어가자마자, 희뿌연 안개가 사방에 차올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백색에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저기요? 들려요?”
크루엘로를 불러 봐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귀가 먹먹한 걸 보면 청각 쪽으로도 뭔가 처리가 되어 있는 모양인데.
시험을 치르는 건 미뉴엣뿐인데 왜 나까지 안개를 헤매야 하지.
“모르겠다.”
에휴, 나는 더 걷기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기다리면 알아서 끝나겠지.
이게 도대체 무슨 시련이람.
설마 정령으로 이 안개를 다 걷어 내란 건 아니겠지?
끌어모은 무릎에 턱을 괴고 고민하던 때.
[지금 뭘 하고 있지.]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귓바퀴를 감아 돌아온다.
동시에, 나는 이 관문의 테마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몸을 돌리자 키가 큰 여성이 보였다.
두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짧은 머리칼, 이제는 기억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
나는 담담히 그녀의 눈을 마주 봤다.
[네가 지금 이따위 일에 시간을 쏟을 때야?]
“그러면요.”
[네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안다.]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검은 장발에 창백한 피부의 남성이었다.
[우리의 신을 의심하라는 간교한 기록에 속아 넘어가다니.]
[우린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두 분 다 파문당하셨으면서 ‘우리’의 신은 무슨.”
나는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간만에 딸을 보는 감상이 겨우 그것뿐이에요?”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나의 부모님이었다.
‘시오라’가 아닌 진짜 내 혈육 말이다.
[교육을 더 받아야겠구나.]
[내버려 둔 사이 엉망이 되었어. 널 그리 홀로 두는 게 아니었는데.]
“사양할게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네가─.]
─정화purification.
가벼운 주문에 두 사람은 먼지처럼 흩어져, 다시 안개의 일부로 돌아갔다.
교육 같은 소리.
“먼저 죽은 사람한테 무슨 권리가 있다고.”
2차 관문은 환각.
아마도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당사자도 아닌 나까지 공격하는 걸 보면 애당초 참관인 같은 걸 인정해 주는 시스템은 아닌 모양이다.
함정인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원로가 몰래 기어들어 와 습격해 주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영 아니다.
날로 먹는 건 큐딜이 끝인가 보네.
혀를 차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쉽게 사라진 걸 보면 아마 크루엘로 쪽은 문제가 안 될 것 같은데…….
“응?”
나는 시야 한구석에 걸린, 조그만 인영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높다랗게 묶은 금발의 어린 여자아이.
내 기억에 저런 사람이 있던가?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허.”
짧은 일자형 앞머리에 동그란 눈, 주근깨가 총총 박힌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안녕! 나는 에이미야.]
에이미 로열샌드.
내가 들어갔던 몸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니 굉장히 낯설다.
그런데 에이미가 왜 나온담. 정신 공격일 거란 추측이 틀린 건가?
─정화purification.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그 애를 안개로 되돌려 보냈다.
이제 됐나,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시야가 금색으로 가득 차올랐다.
[안녕! 나는 에이미야.]
[안녕! 나는…….]
[안녕!]
[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는 인파에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크루엘로부터 찾아야겠다.”
***
사내의 낯은 최근 어느 때보다 창백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눌러 덮은 채, 크루엘로는 눈앞을 노려보았다.
뿌옇게 피어난 안개를 배경으로 금발의 여자아이들이 빼곡하다.
어떤 의미로는, 그에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흐…….”
에이미 로열샌드가 죽은 이후, 그는 광증을 앓았다.
처음에는 금발의 여자아이가 다 에이미로 보였다.
그러다가 곧 성별이 상관없어졌고, 다음으로는 나이가 상관없어졌다.
그 후로는 머리 색조차 중요치 않게 되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에이미로 보였다. 세상 모든 사람을 에이미라 불렀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머리 아파, 로이?]
[괜찮아? 누워서 쉴래?]
다정한 염려가 중첩해 들린다.
거기서 느껴지는 건 온기라기보다는 기괴함.
그는 몇 번이나 환각을 푸는 마법을 썼으나 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잠깐뿐이었다.
막대한 에너지원이 끊임없이 마나를 공급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베아티투도겠지.’
돌아보면 황당한 일이었다.
원로회에서 베아티투도를 모으는 건 알았어도, 그걸 쓴 정황은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다.
조사 끝에 그 위험성을 알고 나서는 아예 신경을 꺼 버렸다.
도저히 사람이 쓸 수 없는 물건이다.
애당초 모리온을 집어삼킨 후인을 위해 준비된 에너지니 괜찮으리라고.
안일했고 멍청했다.
함정인 걸 모르던 것도 아니고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외려 얻어 갈 게 있을 것 같아 들어와 놓고는.
‘아니.’
엄밀히 말해 위험에 처한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