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월 ×일.
레카논의 성기사들이 턱밑까지 쫓아왔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신관들도 성력을 잃어 간다.
여기서 더 깊숙이 숨어들면 몬스터가 나올 텐데 성력도 쓰지 못하는 몸으로 어찌 이들을 보호할까.」
「×월 ×일.
아아, 페불라시여.
당신을 의심한 불민한 신도를 용서하소서.
기어이 우리는 몬스터를 만났다.
모두가 절망하여 숨죽이던 때, 양피지에서 빛이 났다.
폭풍이 불며 생긴 형체는 전설로 이야기되던 짐승을 닮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신수인 줄 알았으나, 곧 세간에 불리는 정령임을 알았다.
신관의 몸으로 어찌 신 외의 다른 존재와 맺어지겠냐마는, 나는 그것이 당신의 뜻이란 걸 알았다. 받아들였다.
이제 나는…….」
「×월 ×일.
레카논의 추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정령의 덕이다.
고민 끝에 우리는 둘로 나뉘었다.
페불라의 유지를 받드는 이들에겐 레카논의 성물을 쥐여 보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남았다.
우리는 이제 신관이 아닌 정령사로 살아간다.
그건 당신의 인도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이시여.」
「×월 ×일.
오늘로 당신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나이다.
나의 운명, 나의 주인, 나의 신이시여.
불민하게도 저는 주어진 종의 길을 거부하고, 당신께서 새로이 밝혀 주신 길을 걷고자 합니다.
저희의 이름은 더 이상 페불라와 함께 불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심한 이후에도 저희는 종종 당신이 함께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앞으로의 길에도 당신의 눈길이 함께하리라 믿습니다.」
「×월 ×일.
일기를 읽는 후손에게 전하노라.
그대들은 아마 신과는 닿지 않을 불신자이리라.
다만 우리의 시작이었던 존재마저 잊어버리는 것은 짐승조차 생각 못 할 배덕한 일이로다.
다음의 문구를 후대에 전해지게 하라.
보네티에는 신이 있다.
그녀는 우리의 시작을 만들었으며 우리와 함께 걷고 우리의 마지막을 수호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험난한 폭풍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잊지 마라.
우리의 곁에 신이 함께함을.」
기록은 그것으로 마지막이었다.
혹시나 해서, 바로 다음 대의 일기를 펴 봤으나 그 안에 ‘페불라’라는 글자는 한 자도 없었다.
다만 마지막 장에는 선대가 남긴 문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다른 보네티 백작의 일기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음.”
기분이 묘했다.
시조의 일기엔 내가 아는 페불라 계파가 전부 들어 있었다.
통째로 사라졌다는 푸가 신전의 사람들이 내 직접적인 선조였고, 성물을 가져간 이들이 마믹의 선조일 것이다.
마믹이 자료를 전해 줘야 좀 더 확실해지겠지만.
“……악신설은 별로 없네.”
언급은 있었지만, 그게 진짜인지 내막이 어떤지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보네티의 시조는 내 신의 선량함을 온전히 믿는 듯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말이야.
일단은 읽었던 기록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 순간, 보네티 남매도 독서를 마쳤다.
“젠장, 템페스타스 얘기는 정말 한 자도 없네.”
“죽상 지을 거 없어, 바티. 승산은 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멀뚱히 듣다가 나는 손을 들었다.
질문!
“미뉴엣의 정령도 뱁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미뉴엣이 숨도 안 쉬고 부정했다.
가보트가 좀 상처받은 것 같다.
“부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풋내기와 비교당할 정도는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정령이 달라져?”
“보통은 더 커지지. 격이 달라질 정도면, 조종도 바뀌어.”
“아하. 그러면 비둘기쯤?”
“……3대 전부터 가주의 정령은 각각 벌새, 종달새, 참새였고 아버지는 올빼미셨어.”
“갑자기 좋아졌네.”
“템페스타스를 치르지 않은 건 선조들의 재능이 유독 덜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미뉴엣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네 정령은 뭔데?”
“직접 봐.”
그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자신감이 묻어났다.
하긴 그녀가 뱁새를 불러내는 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휘슬의 뒷산으로 조금만 들어오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다.
맨눈으론 확인할 수 없지만, 보네티의 선조는 절벽 전체에 거대한 마법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템페스타스의 시험장이었다.
“세상에, 내 대에서 템페스타스라니.”
2원로 외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원로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대부분이 이 상황을 반기듯 웃고 있어서 괜히 얄미웠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꼭 그러셔야겠습니까.”
4원로.
유일하게 미뉴엣에게 찬성표를 던졌다는 노인은 미뉴엣의 외조모였다.
염려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미뉴엣의 혼담을 가장 강요한 사람이라고 들으니 순수한 걱정으로는 안 보인다.
“공작전하께서 안위를 보전해 주신다는 건 물론 기꺼운 일입니다만, 어디까지나 목숨만입니다. 크게 다치실 수도 있어요.”
“그래서 건강하게 작위를 빼앗기라는 소리신가요?”
“제발, 소백작.”
“어차피 외길뿐이에요.”
차갑게 말한 미뉴엣이 돌아서며 말했다.
“시작하시죠.”
기다렸다는 듯, 2원로가 손짓하자 그의 수하들이 절벽에 수십 개의 마정석을 박아 넣었다.
대기가 진동한다.
마정석에 고여 있던 마나가 절벽을 타고 올라가 거대한 마법진을 녹빛으로 물들인다.
절벽 전체에 정령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함과 동시에 쿠르릉, 굉음이 났다.
“와.”
문이 열리듯 절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나뿐 아니라 모여든 사람 대부분이 그 모습을 감탄스럽게 구경했다.
그러나 정작 시련의 주인공은 덤덤했다.
“다녀올게, 바티.”
미뉴엣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크루엘로와 내가 그 뒤를 따라갔다.
들어올 사람이 다 들어온 걸 알았는지, 절벽은 다시 벌렸던 아가리를 다물었다.
그 사이로 가보트가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진 않았다.
표정으로 봐서 응원이었겠지.
절벽이 도로 닫히고 난 뒤, 먼지가 가라앉은 시험장은 넓고 텅 빈 공간이었다.
정령의 기운이 가득 차 있긴 한데,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설마 너무 오래돼서 장치가 망가졌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온다.”
미뉴엣의 혼잣말과 함께 기운이 급변했다.
절벽을 할퀴며 생겨난 거대한 바람이 한군데로 모여든다.
녹빛의 회오리바람이 뭉치듯 연결되고 엮이며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 갔다.
그리하여 생겨난 실체는 어지간한 대저택만 한 크기의 거인.
템페스타스, 폭풍우란 이름에 걸맞은 시련이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압도적인 외형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절벽에 매달린 수십 개의 사슬에 몸이 묶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거인이 팔을 휘둘러 댈 때마다 하나둘씩, 툭툭 끊겼지만.
거인이 미뉴엣을 움켜쥐려는 듯 닿지 않을 거리에서 팔을 휘둘렀다.
“우악!”
나를 공격하려는 게 아닌데도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칼이 요란하게 흩날려 시야를 방해했다.
다급히 머리를 그러모아 쥐고, 넘어질 뻔한 건 크루엘로가 허리를 잡아 주었다.
“감사. 그런데 방풍막은 없어요?”
“없을 리가요.”
동시에 투명하고 둥그런 막이 우리를 둘러쌌다.
끊임없이 뺨을 때려 대던 머리칼도 진정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법 만세.
미뉴엣은 거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속삭였다.
“프레스토, 뒤로 돌아.”
언제 불러낸 건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새가 거인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매끈한 녹빛 깃털과 날카로운 부리.
새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생긴 외관에 반투명한 형체가 더해져, 뱁새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맹금류?”
“검독수리예요.”
크루엘로의 짧은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명도 멋있네.
검독수리, 프레스토는 거인을 현혹하며 이따금 날개를 휘둘러 칼날 같은 바람을 흩뿌렸다.
하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거인의 형체는 잠깐씩만 일그러질 뿐 오히려 프레스토의 힘을 흡수해서 더 크고 단단해지는 듯이 보였으니까.
그 와중에, 남은 사슬은 벌써 반도 남지 않았다.
“저게 다 끊어지면 보통은 죽는 건가?”
마법사보다는 좀 나은 편이라지만, 정령사도 육체파는 아니다.
거인의 공격 한 번에 쓰러질 게 뻔하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챙겨 온 바구니로 손을 넣었다.
냠. 버터 쿠키 맛있다.
“맛있어요?”
크루엘로가 물었다.
이건 달라는 소리지.
하나를 꺼내 그의 입에 물려 주자, 그가 얌전히 받아먹었다.
그러면서도 딴지를 걸었다.
“달란 말은 아니었는데. 여관에서고 성에서고 먹지를 않더니.”
“여관 음식은 취향이 아니었고, 성 음식은 뭘 탔을 줄 알고요.”
“쿠키는 다른가요, 달링?”
“사람들 안 볼 때 해독 한 번 했어요.”
“입에 넣은 거 삼키고 말해요.”
시험을 보다 말고 미뉴엣이 이쪽을 잠깐 노려봤으나, 곧 그녀의 눈이 거인에게로 되돌아갔다.
“미뉴엣도 배고픈가 보네요.”
“그러게요.”
“어, 사슬 다섯 개 남았, 와! 한 번에 다 끊어졌어요!”
그새 자유를 찾은 거인이 기지개를 켜더니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면 실패?
그때 미뉴엣도 탐색을 끝내고 소리쳤다.
“프레스토, 등허리 쪽으로 들어가!”
바람에 묻혀서 소리 대부분이 날아갔지만, 대충 저렇게 말했을 거다.
검독수리가 거인의 척추를 파고들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감각이 있다.
보통은 사슬이 안전장치라고만 생각하고 패닉에 빠졌겠지만, 거인을 공격할 포인트는 애당초 뒤쪽에 있었다.
거인의 몸이 흐트러졌다가 복구되는 기준도 그쪽에 있었으니, 약점은 거기뿐.
바람이 워낙 거칠어 알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그 부근에서 녹색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다.
“허리 조금 위, 부숴!”
쾅쾅쾅, 거인이 미뉴엣에게 달려올수록 근방의 바람도 거세게 불어닥쳤다.
공간은 넓었으나 거인이 그 이상으로 컸기에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마침내 미뉴엣의 코앞에 들이닥친 거인이 곧장 팔을 휘둘렀다.
거목 같은 손이 짙은 살의를 머금고 날아든다.
그것이 미뉴엣의 조그만 머리통에 닿기 직전!
쩌저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거인의 몸을 구성하던 바람이 하나씩 풀려나 흩어진다.
미뉴엣을 후려치려던 손, 팔, 어깨부터 다리, 허리, 가슴과 머리까지.
종내 산들바람만큼이나 가벼워진 공기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후.”
미뉴엣은 그제야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 역할을 마친 프레스토가 다가와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1차 관문 통과.
감상은.
“생각보단 싱겁네.”
나는 남은 과자를 입에 쏙 털어 넣었다.
거인이 묶여 있던 쪽의 절벽이 다시금 좌우로 입을 벌렸다.
다음 관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