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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41화 (41/162)

41화

물결치듯 나풀거리는 은발과 초췌함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아름다운 낯.

엎어진 채 미동도 없는 청년은 분명.

“가보트?”

“…….”

지금 상황이 창피한지 가보트의 온몸이 새빨개졌다.

얼굴, 목, 손에 발목까지.

재밌다, 이렇게 격렬하게 창피해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 와중에 가보트의 뱁새가 날아와 내 뺨에 얼굴을 비볐다.

가끔 보면, 이 애는 주인보다 날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검지로 뱁새의 가슴 털을 쓰다듬다가, 가보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엄숙함을 끌어모아 말했다.

“지금 소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보트가 눈을 번쩍 떴다.

얼굴은 여전히 체리 빛깔이었지만, 눈동자는 초점이 풀려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가 소리쳤다.

“미뉴엣이 감금되어 있어! 도와줘!”

“오.”

참신한 소감이네.

***

감금이라니요! 저희는 그냥 어쩌고저쩌고…….

정신을 차린 2원로는 귀가 아프도록 떠들어 댔지만, 크루엘로의 시선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

이쯤 되면 그의 악명이 꽤 편리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한테는 역시 크루엘로!

물론 2원로도 최후의 항변 정도는 했다.

“이, 이건 보네티의 일입니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라 하신들 가문의 일에 간섭하시는 건…….”

“작은할아버님!”

한 번의 부름으로 끝이었다.

남의 일인 척하기엔 크루엘로가 내 약혼자다. 나도 엄연히 보네티였고.

원로회의 힘이 아무리 세 봐야 크루엘로가 더 세고, 명분은 죽은 백작의 자식들에게 있으니 어쩌겠는가.

2원로는 마지못해 우리를 안내했다.

문고리도 없는 방이었다.

어떻게 들어가나 했더니, 2원로의 수하가 옆에 달린 등불을 당겼다.

문이 돌아가며 열렸다.

“비밀 문이구나.”

고성과 잘 어울리는 구조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간만에 미뉴엣과 재회할 수 있었다.

방을 나오는 미뉴엣의 눈빛은…… 뭔, 묶어 둔 맹수를 만나는 줄 알았다.

애당초 그녀가 왜 순순히 잡혔는지도 의문이었지만, 궁금증은 금세 해소됐다.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백작부인을 인질로 삼았구나, 대범하기도 하지.

2원로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신전에서 요양 중이시네. 파스피에가 그리되고 몸이 더 안 좋아진 듯하여.”

“어느 신전이요.”

“……덴벨 수석 신관이 담당하는 쪽이네.”

미뉴엣은 수하─미뉴엣의 부하들도 감금됐다가 풀려났다─에게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자 잠시, 방 안에는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새삼스럽게도 크루엘로가 참 튄다고 생각했다.

보네티 틈에 얘가 왜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눈을 마주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웃는 건 예쁘네.

“어쨌거나 내 조치가 강압적으로 느껴졌다면 그 점은 사과하겠네.”

“그걸 감금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가보트, 나는 자네들이 진정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흥분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니.”

그리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네. 소백작, 자네가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선 여전히 원로회의 인가가 필요해.”

2원로는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멀뚱히 눈을 깜박였을 뿐인데, 설명이 덧붙여졌다.

“12원로 중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만 백작이 될 수 있단 말일세.”

“미뉴엣은 이미 후계인데도요?”

“정상적인 작위 계승이 아니지 않나. 후계가 가주를 죽였을 경우를 대비한 거지. 물론 소백작이 그랬다고 생각하진 않네만.”

“……그래서요.”

“입에 담기 부담스러워 시간을 끌었지만, 회의는 이미 끝났네.”

노인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로회는 혼인도 안 한 후계를 백작위에 올릴 수 없다고 판단했어.”

“작은할아버님!”

“얌전히 있어, 가보트.”

“자네들도 알겠지만 보네티 역사에 없는 일이잖나. 그러니 결론 내리자면 소백작, 자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일세.”

그럭저럭 차분하던 2원로의 눈에 열기가 번졌다.

선명히 드러난 그것은 분명, 탐욕이었다.

“백작위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미하엘과 결혼하거나.”

“3원로님의 아드님과 결혼하면 딱 좋을 텐데. 왜, 미하엘 님 말이야.”

바라는 건 역시나 이거였구나.

사실 그들이 만들어 낸 소문의 방향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의도였다.

“미뉴엣이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야…… 다른 후보가 다시 시험대에 오르겠지.”

“음.”

“그렇게 보지 말게. 절, 절차라는 게 그렇네. 화이트데저트에도 원로회가 있지 않습니까, 전하?”

“있지. 우리 측 어르신들께서도 날 쥐고 흔들려고 안달을 내니 마찬가지로군.”

“그, 그게!”

심드렁한 크루엘로의 답에 노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면 자기 편을 들어 줄 줄 알았나. 웃겨.

그때, 잠자코 듣던 미뉴엣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템페스타스를 치르겠어요.”

“소백작!”

그게 뭔데.

나는 반사적으로 크루엘로를 쳐다봤다가 아차 싶었다.

요즘, 얘한테 너무 의존하는 거 아닌가?

어쨌거나 그의 입에선 곧바로 답이 나왔다.

“보네티의 전통인 가주 시험이에요.”

작위 계승 조건이 원로회의 인가라는 건 악용될 위험이 뚜렷하다.

그래서 초대 가주는 재능 있는 정령사가 사장되지 않도록 시험을 만들었다.

절벽에 거대한 마법진을 새겨 만든, 일명 템페스타스.

시련을 넘어선 이는 자력으로 가주직에 오를 수 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는 위험한 시험인 데다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정령의 힘이 약해져서 최근 몇 세대 동안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라는 게 크루엘로의 설명이었다.

“관문이 두 가지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2원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답을 토해 내란 시선에 노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극비입니다. 원로회에서도 대원로님께만 전해지는 내용인지라 저도 잘…….”

모르면서 몸은 왜 떤담.

알고 있다는 자백과 다를 게 없었다.

저도 그걸 알았는지, 2원로가 다급히 말을 돌렸다.

“정, 정녕 그런 선택지를 고르려 하는가.”

“템페스타스를 치르는 건 후계의 권리예요. 거부할 수 없으실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2원로는 난처한 척 굴었으나 두 눈이 묘하게 빛났다.

착각은 아닌 것 같은데.

“들어간 사람의 절반은 목숨을 잃었어. 나도 돌아가신 가주를 볼 면목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요.”

“자네를 죽게 둘 수는 없어. 그래서 그런데…….”

노인이 크루엘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혹 참관인으로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위급 시 소백작의 목숨만 지켜 주신다면 마땅한 사례를 치르겠습니다.”

“가문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그야 시오라, 저 아이도 함께 가면 될 일이지요. 어떠냐, 아이야. 너도 미뉴엣과 친하게 지내지 않니.”

“2원로님, 아무리 그래도 가문의 일입니다. 어떻게─.”

“소백작, 자네는 가만히 있으시게. 자네 혼자만의 몸이 아닌 걸 생각해야지!”

크루엘로는 고민하듯 나를 한 번 쳐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언제 봤다고 미뉴엣과 친하다고 판단한 걸까.

여러모로 함정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하지만 덫에 걸려 있으면 사냥꾼이 잡으러 오는 법!

“좋아요! 그런데 저에게도 조건이 있어요.”

“뭐? ……말해 보거라.”

그렇다고 미끼도 없는 함정에 들어갈 순 없지.

“보네티 시조님의 일기를 보고 싶어요.”

***

그리하여 당초 목적과 달리 나는 꽤 정당하게 일기를 펴 볼 수 있었다.

시조의 일기는 백작 전용 개인 서재에 있었다.

당초엔 나만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보네티 남매까지 우르르 들어왔다.

크루엘로만 관심이 없다며 빠졌다.

그렇다고 남매가 나를 감시하러 들어온 건 아니었다.

“템페스타스, 템페스타스…….”

여기에 있는 건 보네티 시조의 일기만은 아니었다.

역대 보네티 백작들이 남긴 기록도 전부 있어서, 이들은 그 안에 템페스타스의 힌트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눈이 벌게진 가보트를 옆에 두고 나는 책장을 뒤졌다.

“이 사람이 진짜 시존가? 아니네, 더 앞에 사람이 있네. 음.”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찾아낸 서적은 딱, 가보트가 보여 준 정령 소환진만큼이나 낡아 있었다.

내용물은 고대 신어로 적혀 있었다.

다른 기록을 가지러 온 미뉴엣이 흘금 보고 말했다.

“고대 신어네. 읽을 수 있겠어?”

“조금? 내가 어릴 때 이쪽을 공부했나 봐.”

“……학계에서도 절반도 해석하지 못한다던데.”

“뭐, 그냥 궁금해서 보는 거니까.”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 있나.

앞부분은 정말 교단에서의 생활이 적혀 있었다.

기도하고 신전을 청소하고 전도하는 등의 평화로운 일상.

본격적인 내용은 후반부에 전개되었다.

「×월 ×일.

우리 교단에서 신도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성자님께서 그러셨을 리 없다.

다른 신전을 찾아갔으나 푸가 신전은 건물째 사라져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 또한 수배가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을 피해야 한다.」

「×월 ×일.

레카논에서 우리를 추적해 들어온다.

페불라시여, 부디 당신의 종들을 굽어살피소서.」

「×월 ×일.

성자님을 만났다.

그는 제물 건에 침묵하며 우리에게 두 가지 물건을 남겨 주셨다.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와 레카논의 성물.

레카논의 성자를 처리하였으니 추적이 더뎌질 것이며,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신도들은 기뻐하였으나 나는 의문이 든다.

왜 제물 이야기에 침묵하셨을까.」

「×월 ×일.

성자님이 말도 없이 사라지셨다.

레카논의 추적도 더욱 거세어졌다.

페불라시여, 정녕 당신의 종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정녕 당신께서 제물을 바라셨나이까.

…….

신을 의심했기 때문일까, 성력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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