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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40화 (40/162)
  • 40화

    몇 사람이 이쪽을 흘금흘금 쳐다봤다.

    “그래요? 영 식사를 안 하길래 맛이 신경 쓰이는 줄 알고.”

    그 이야기 아니었으면서 모르는 체하긴.

    크루엘로를 노려보자 그는 모르는 척하며 일어났다.

    “이만 일어날까요?”

    안내를 받아 우리는 2층으로 올라왔다.

    나무문은 생각보다 매끄럽게 열렸다.

    나는 빠르게 눈을 굴리고는 이번에도 뻔한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침대는 하나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침대 내 거.”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무겁도록 쌓여 간다.

    나는 멀뚱히 눈을 깜박이며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등이 배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푹신하지도 않다.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크루엘로보다는 낫겠지만.

    “…….”

    성의 대부분이 잠드는 시간이 새벽 1시.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고, 익숙지 않은 말을 타느라 몸에 피로도 쌓여 있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나는 천장을 빤히 쳐다봤다.

    안 보고도 저 무늬를 그릴 만큼이나 익숙해졌다.

    에휴.

    “크루엘로, 자요?”

    “아니요.”

    즉답이 돌아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자고 있어요, 깨워 줄 테니.”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할 말 있어요?”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물러터진 사람이었구나.

    “침대가 불편해서 못 자겠네요.”

    ***

    가보트 보네티.

    죽은 백작의 둘째는 성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그가 말했다.

    “미뉴엣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보트 공자님.”

    그리하여 돌아온 결과는 감금이었다.

    콰아앙, 닫힌 문을 보며 청년은 실소했다.

    크고 좋은 방에 기다려 달란 말.

    겉으로는 그럴싸했으나 제 호위를 다 떼어 내고 문 앞에 감시인까지 세워 두는 게 감금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가보트는 침대에 널브러져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 없지.”

    이 꼴을 보면 저를 후계 대용으로 쓸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하다.

    필사적으로 부풀린 희망이 단번에 꺼졌다.

    그렇다고 순순히 포기할 생각도 없었지만.

    순응하는 척, 가보트는 일단 눈을 감았다.

    시오라가 있는 저택을 떠나오니 외려 잠들기는 쉬웠다.

    장례를 치른 이후, 하루에 겨우 두 시간을 자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어둠이 깊어진 밤이었다.

    한결 또렷해진 의식이 개운하면서도 불안해, 그는 다급히 커튼부터 열었다.

    “휴, 해는 안 떴네.”

    시간은 가늠이 안 되지만 다행이다. 밤에는 움직여야 했으니까.

    가보트는 적들이 모르는 제 무기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퍽 요란스럽게 굴었으나, 미뉴엣과 상의 끝에 비밀에 부치기로 했던.

    “피아니시모.”

    그의 정령.

    허공의 한 점을 중심으로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그리 크지 않은 바람은 둥그스름하게 형체를 만들고 연한 풀빛으로 물들었다.

    시오라가 볍씨라고 부르는 작고 동그란 새가 반짝, 눈을 떴다.

    뺙!

    아직 조그맣고 할 수 있는 일도 적었지만, 그만큼 기척이 작기로는 따라올 이가 없었다.

    잘 포장하면 은밀하다고 해야겠지.

    가보트가 애정을 담아 속삭였다.

    “부탁할게, 피아니시모.”

    그리하여 뱁새의 활약이 펼쳐졌다.

    이 둥글넓적한 새는 먼저 가보트에게 제 기운을 둘러 그의 기척을 산들바람만큼이나 줄여 두었다.

    피아니시모는 위풍당당하게 문을 뚫고 지나가 감시원을 재웠다.

    이어 콧잔등에 주름이 가도록 킁킁거리며 주인에게 길을 안내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 줘 피하게 했고, 몸을 숨길 자리도 곧잘 알려 줬다.

    가보트는 암살자라도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뱁새의 활약에 올라탄 청년은 제 누이를 찾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미뉴엣이 갇힌 방 앞에 선 것뿐이지만.

    손잡이도 달리지 않은 문을 가리키며 가보트가 물었다.

    “여기야?”

    피아니시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으로 들어가려는 듯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통, 힘없는 소리를 내며 튕겨 나왔다.

    가보트가 다급히 손을 뻗어 뱁새를 받쳤다.

    “피아니시모!”

    뺘악…….

    풀 죽은 정령의 울음에, 가보트는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문 위에 손을 올렸다.

    정령의 기운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젠장, 쓸데없이 본격적이네.”

    미뉴엣이 정령을 써서 탈출할까 봐 기운 자체를 막아 둔 모양이다.

    끽해야 마도구로 수갑이나 채워 놓을 줄 알았지, 방 전체에 특수한 처리를 해 두었을 줄은 몰랐다.

    어쩐지 감시도 없더라니.

    어떡한다. 피아니시모가 열지 못하면 못 들어갈 텐데.

    ‘창문은 없을 것 같고, 연결된 환풍구가 있을까.’

    가보트는 일단 물러나 성의 구조를 더 파악하기로 했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는 방은 아닐 테니, 어떻게든 방도가 있겠지.

    피아니시모는 한층 기가 꺾였지만, 다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가보트가 갇혀 있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러던 도중.

    “……하도록. 최대한도가 30%다.”

    어느 방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가보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로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낮고 굵은,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듯 위협적인 소리.

    하지만 그 대화 상대의 목소리는 가보트도 알고 있었다.

    “넘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2원로!’

    노쇠한 보네티의 대원로를 대신하여, 원로회를 장악한 인물이다.

    가보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흘러드는 대화에 집중했다.

    “물론 저희 쪽에서도 각별하게 주의하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이란 게 있잖습니까.”

    “예상한 효과가 몇 배로 나타날 거다. 너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흐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남은 양은 언제쯤 회수하실는지?”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비상시를 대비해 넉넉히 줬을 뿐, 잔여물은 알아서 처리해라.”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말하는 탓에,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부추기는 것 같은데.’

    그 뭔지 모를 물건을 과도하게 사용하라고 종용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문 가까이 바싹 몸을 붙였다.

    그때, 피아니시모가 가보트의 뺨을 두드렸다.

    사람이 오고 있다는 신호!

    청년이 다급히 몸을 물렸다.

    그가 있는 곳은 일자형 통로로, 갈 수 있는 곳은 앞이나 뒤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려고 해도 동그란 정령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젠장, 동시에 오고 있는 건가.’

    급한 대로, 가보트는 문의 맞은편에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다급히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으나 숨기에도 어정쩡한 공간이다.

    밖에서 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복도를 지나다가 이쪽으로 다가오기만 해도 끝장이다.

    피아니시모가 기척을 줄여 줬다고 한들 투명화 마법이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가보트는 터질 것처럼 뛰는 제 가슴팍 위로 손을 올렸다.

    ‘뛰어내려야 하나?’

    바깥을 흘긋 내다본 가보트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차라리 걸리는 게 낫겠다.

    마침내 그의 귀에도 병사 둘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왼쪽에서 하나, 오른쪽에서 하나.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자기들끼리 마주쳤다.

    “충, 2─C구역 이상 없습니다.”

    “충, 2─D구역 이상 없습니다.”

    쿵, 쿵, 쿵.

    가보트의 심장 박동이 점점 거세어졌다.

    그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발코니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오지 마, 제발!’

    그러나 가보트의 바람과 달리 그들 중 하나가 발코니로 몸을 돌렸다.

    거리는 고작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큰일 났습니다, 2원로님!”

    다른 이가 소리치며 나타났다.

    다급한 목소리에 맞은편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든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구역을 순찰하던 경비들은 당황하여 그쪽을 쳐다봤다가, 상관의 복잡한 일에 말려들기 싫었는지 서로를 지나쳐 걸어갔다.

    발코니는 무사하다.

    가보트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님을 모시는 중인데 갑작스럽게 무슨 일인가!”

    “죄, 죄송합니다. 다만 너무도 급한 일이라……!”

    “뭔가.”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성을 찾아왔습니다.”

    ……뭐가 와?

    가보트가 눈을 깜박였다.

    ***

    “놀랐습니다, 이런 시간대에 손님이 오실 줄은…….”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우리를 맞았다.

    푹 꺼진 볼과 안으로 말려 들어간 입술, 옹졸하게 기른 콧수염이 어우러져 몹시도 생쥐 같은 인상이었다.

    보네티의 2원로─출처 : 크루엘로─라고 했던가, 겉모습이 참 솔직했다.

    “실례지만, 검문소 측의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휘슬에는 언제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안 되겠는데.”

    “예, 예?”

    “밤이 깊어 피로하군. 보네티는 힘들게 찾아온 객에게 물도 한 잔 내어 주지 않는가?”

    어떻게 한 건지, 크루엘로는 웃고 있는데도 짜증이 나 보였다.

    내가 봐도 뻔뻔스러운 작태였으나 2원로는 차마 화이트데저트 공작에게 따지지 못했다.

    외려 시종을 불러 허겁지겁 차를 내오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함께 오신 게……?”

    “누군지 몰라서 묻나.”

    “그저 어쩌다 같이 오셨는지가 궁금해서. 예에. 죽은 백작의 셋째인 걸 알고는 있습니다. 이름이 시오라였지?”

    “하대?”

    “아니!”

    2원로가 잠깐 소리를 높였다.

    그렇겠지, 나한테 말을 높이라는 게 얼마나 억울하겠어.

    원로회 인간들은 가주한테도 완전히 높여 말하지는 않는다.

    보네티의 사정이야 모르지만, 화이트데저트는 그랬으니까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얌전한 척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2원로님.”

    “그렇지! 아이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파스피에의 작은아버지란다.”

    “와, 정말요? 그러면 정말 편하게 말씀하셔야겠네요!”

    “그─.”

    “결혼 전까지만요.”

    뭘 노려봐!

    바깥은 신분이 깡패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하대하다가 존댓말 쓰면 기분이 정말 끝내줄 거다!

    “아무튼, 여기에 오신 이유는 말씀을 해 주셔야─.”

    “아, 잠깐만요.”

    말을 세 번이나 틀어막힌 2원로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아까부터 묘하게 문이 덜컹거린단 말이야.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 직감이 무언가 있다고 속삭여 왔다.

    쉿.

    나는 검지를 입가에 댔다가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러고는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으아악!”

    문에 기대어 있던 사람이 물 쏟아지듯 와르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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