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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39화 (39/162)
  • 39화

    크루엘로가 작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실은…….

    “약한데도 겁먹지 않은 사람도 있었어요.”

    “누구요?”

    “내 첫 번째 약혼녀랑…… 하녀 하나요.”

    “아…… 하.”

    이 얘기 괜히 꺼냈어.

    그나마 내 표정이 크루엘로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하긴. 어릴 땐 순해서 괜찮았으니 실제로는 하녀뿐이네요. 약혼녀가 죽은 뒤로 성격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음, 그렇군요.”

    “정말 관심 없어 보이네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그 애도 금발이었는데.”

    크루엘로가 내 머리칼을 스치듯 어루만졌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가라앉았으나 담담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짐작되지 않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망치고 싶어졌지만, 같은 말을 타고 있어서 불가능한 이야기다.

    차라리 남의 일이면 공감하려고 노력이라도 해 볼 텐데 내 일이다 보니 음.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들렸을 텐데도 크루엘로는 그걸 굳이 꼬집지 않았다. 대신하여.

    “전에 물어본 적이 있었죠? 약혼자, 내가 죽인 거냐고.”

    길드를 나오며 나눈 대화였다.

    “죽었다던 전하의 전 약혼자…… 들, 병에 걸린 사람까지 포함해서요.”

    “전하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요?”

    “전하의 손으로 죽였다거나?”

    “아니라고 했지만, 절반쯤은 맞아요. 첫 번째 약혼 상대는 나 대신 죽었거든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나는 정면만 바라봤다.

    말 사이의 공백을 말발굽 소리가 두드려 댔다.

    “내 차에 독이 들어 있었어요. 그 애는 별거 아닌 이유로 차를 바꿔 마시자고 했고 그러다가…….”

    “…….”

    “내가 마셨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래요. 그 앤 몸이 많이 안 좋았거든요.”

    공연한 죽음이었지.

    “한 번씩 생각해요. 죽어 가며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나를 원망하진 않았을지.”

    “아…….”

    “달링이라면 어떤가요. 내가 얼마나 미웠을 것 같아요?”

    그가 물었다.

    대단한 의미가 담기지는 않은 의문이었다.

    나는…….

    울컥 치솟은 감정의 덩어리를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안 미워했을 거예요.”

    진실인데도 추측형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애석하다.

    “나는 신을 모시는 몸이잖아요. 직관이 발달했거든요. 그래서 단언할 수 있어요.”

    위쪽에서 크루엘로의 시선이 선명히 느껴졌다.

    거짓을 내뱉는 것처럼 속이 멋대로 울렁거렸지만, 드물게도 진실만을 말했다.

    나는 입 안으로 전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안 미웠어. 네가 밉지 않았어.’

    차에 독이 든 건 애당초 알고 있었다.

    당시에도 그게 독이란 건 확신할 수 없었지만, 차에서 느껴지던 안 좋은 기운은 분명했다.

    잔을 아예 엎어 버리려고 했으나 의미 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내가, 에이미가 방문하지 않았을 때 독차가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차라리 크루엘로에게 경계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다.

    어차피 당시 에이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처음으로 남의 몸을, 그것도 어린 육체를 쓰던 때였다.

    별생각 없이 남발한 성력이 육체와 영혼의 괴리를 키웠고 그게 에이미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단축했다.

    그러니 이왕 죽을 거, 그 죽음을 의미 있게 쓰자고 생각했다.

    ‘아니.’

    절반은 핑계고 거짓말이다.

    에이미로 살 때 나는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

    [침묵하라.]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채로 다만 크루엘로의 교화에 힘써야 했다.

    나는 지쳐 있었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애정 앞에서 거짓만을 쏟아 내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내가 내 생각보다는 선한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잊은 지 제법 오래되었기에 서투른 애정이 더 아팠다.

    그러니 희망으로 둔갑한 자기합리화가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고는.

    ‘세뇌는 거의 풀었어. 이 아이는 책 속의 악당과는 너무도 다르니 이제 괜찮지 않을까?’

    당시엔 빙의가 한 번뿐인 줄 알았기에 에이미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더는 죄책감에 앓을 일도 없다고, 그러니까 이만 끝내 버리자고.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살이었다.

    나중에야 잘못된 판단이란 걸 알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는 점까지 그랬다.

    “그러면 좋겠네요.”

    크루엘로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흩어 냈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뱉어 내듯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진지해지지 말아야지.

    “에이미예요, 그 애 이름.”

    “……네.”

    “이런 이야길 꺼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좀 강박적으로 살았거든요. 세상 모든 인간이 원로회에서 보낸 사람 같아 보여서.”

    제 몸을 지킬 줄 알면서 원로회의 편일 리는 없는 고대 신의 교도.

    당연히 크루엘로가 만났을 리 없는 유형이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할 겸 목소리의 톤을 띄워 말했다.

    “그렇죠, 저같이 믿음직한 사람이 흔치는 않죠. 외모, 품성, 능력 모든 면에서 이런 사람이 어디 또 있겠어요.”

    “맞아요.”

    크루엘로의 순순한 수긍에 내 말이 이상하게 변질됐다.

    괜히 잘난 척한 것 같은데……?

    아냐, 나는 잘난 척이 아니라 그냥 잘난 거니 괜찮아.

    “그러면 좀 더 잘해 줄 기회를 드릴게요.”

    “영광이지만 어떤 식으로요?”

    “하반신에 감각이 사라졌어요. 충격을 없애는 마법을 써 주세요.”

    “그런 마법이 있나요?”

    “없어요? 진짜? 마법은 다 되는 거 아니에요?”

    “자기는 너무 마법에 의존적이에요.”

    “안 돼……. 있다고 말해요!”

    “있어요.”

    “진짜?”

    “진짜.”

    크루엘로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하반신에서 전해지던 충격이 싹 사라졌다.

    와, 그런 게 진짜 있어?

    놀라운 마음이 반, 진작 써 주지 않은 걸 원망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하지만 좋아.

    “올 때도 부탁해요.”

    몸과 마음이 한결 행복해졌다.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쌓이긴 했지만, 이쯤이야 익숙하니까.

    가볍게, 즐겁게, 경쾌하게!

    끌어 올린 입꼬리가 조금 어색했다.

    ***

    백작령. 휘슬.

    이름만 들었을 땐 한가로운 시골 마을이 떠오른다.

    실제 휘슬은, 뒤쪽으로 낮은 산이 있고 바다를 향해 뾰족한 곶이 있는 꽤 장엄한 도시였다.

    그 때문에 검문소에 선 줄도 길었다.

    우리는 마법을 써서 건너뛰었다.

    마법 탐지기가 잔뜩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 정도에 걸릴 거면 수확제에서도 발각됐겠지.

    돈을 찔러 주고 스리슬쩍 건너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크루엘로의 외모가 너무 유명해서 윗선에 보고가 들어갈 것 같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니 용서하소서, 페불라시여.

    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꾹 눌러썼다.

    “달링의 동생은 성으로 들어갔어요.”

    “안 쫓아갈 거예요. 시조의 일기쯤이야 몰래 엿보고 나오면 그만이잖아요.”

    말을 타고 오면서 재차 결심했다.

    역시 내가 누구한테 정을 줄 처지는 아니야.

    가보트도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왔겠지, 나는 새벽에 잠입해 원하는 것만 얻어 오면 그만이다.

    “그러시다면야.”

    크루엘로는 별다른 첨언 없이 끄덕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기에 우리는 여관을 잡기로 했다.

    머리에 삼각 두건을 두른 노인이 우리를 맞았다.

    그러고는 책에서 허다하게 읽은 그 말을 뱉었다.

    “방이 하나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수?”

    “……진짜? 왜요?”

    “왜긴, 백작님이 돌아가셨잖아. 추모한다고 여기저기서 몰려들 오셨지.”

    어쩐지 길에 사람이 많더라.

    하기야 보네티의 일로 먹고사는 사람만 보아도 이 마을 정도는 채울 것이다.

    그런 게 고위 귀족의 영향력이었다.

    다른 데에 가 볼까, 고민하던 차 내 속내를 눈치챈 건지 노인이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그냥 한 방 쓰셔, 다른 데 가도 다 똑같아.”

    “음.”

    “조금 뒤면 우리도 방 없을걸? 보아하니 둘이 만나는 사이 같은데 이참에 이러쿵저러쿵─.”

    “쓸게요! 쓸게요!”

    “하이고야, 귀청 떨어지겠네.”

    노인이 투덜거리며 열쇠를 내주었다.

    방값은 당연하게도 크루엘로가 치렀다.

    난 돈 없어. 크루엘로가 따라와 줘서 다행이다.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하고 올라가기로 했다.

    “닭고기 스튜 두 그릇 나왔습니다!”

    저택에서 먹던 것과는 시각적인 차이부터가 남달랐다.

    배고프니까 그냥 먹자, 하며 스푼을 들어 올린 순간 남의 시선이 느껴졌다.

    턱을 괸 크루엘로였다.

    “왜요?”

    “식전 기도 안 해요?”

    “안 해요. 원래 이쪽은 그런 거…….”

    “막내! 기도하고 먹어야지, 너희 부모님 아시면 큰일 난다?”

    음.

    생각해 보니, 원래 있었는데 내가 폐지한 거였다.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어요. 말하자면 옛날 관습이죠.”

    틀린 말은 안 했다.

    크루엘로는 더는 별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스푼을 입에 넣었다.

    그럭저럭 먹을 순 있는 맛이었다.

    크루엘로는 아예 입도 대지 않았지만.

    새벽에 성에 들어갈 걸 생각하면, 이 몸으론 먹어 둬야 했다.

    하지만 식사보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게 더 재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별소리가 다 들려왔다.

    어느 마을의 누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3분 만에 이성을 홀리는 법이라든지, 누가 쟁기를 들고 빚쟁이를 쫓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리고…….

    “그러면 소백작님이 와 계신다는 건가?”

    “그렇겠지, 작위를 넘겨받으셔야 하잖아. 백작님의 관을 운구해 오신 것도 그분일걸.”

    미뉴엣의 이야기도.

    티 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리자, 근처에 있는 상인 두 사람이 보였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얼굴은 다홍색이고 눈은 게게 풀려 있다.

    “이제 그분께서 백작이 되시는 건가? 아직 결혼도 안 하신 걸로 아는데.”

    “윗분들께서 골머리를 앓으신다나 봐.”

    미뉴엣의 평판이 꽤 부정적이네.

    “3원로님의 아드님과 결혼하면 딱 좋을 텐데. 왜, 미하엘 님 말이야.”

    “좋으신 분이지. 그런데 진짜 왜 결혼을 아직도 안 하셨대. 우리 같은 평민들이야 상관없지만, 귀하신 분들은 좀 다르지 않나?”

    “아직 어려서 그러시겠지. 그 나이 때는 당연한 소리만 해도 진저리를 치잖아.”

    “에휴, 윗분이니 뭔 말은 못 하겠고. ……생각 같아서는 미하엘 님이 백작님이 되시면 좋겠어.”

    “어허! 자네, 취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상인이 동료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는 말이 나오지 않을 느낌이라, 나는 다시 반절 남은 스튜로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귀는 여전히 열어 둔 채였다.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만큼 들려오는 말도 많았고, 미뉴엣의 이야기도 몇 섞여 있었다.

    조금 전 두 사람처럼 대놓고 떠들어 대진 않아도 확실히 그녀를 향한 여론은 좀 부정적이었다.

    미뉴엣은 거의 수도 저택에만 있었으니, 아마도 보네티 원로회에서 분위기를 만든 걸 텐데.

    이렇게까지 대놓고 구는 걸 보면, 설마 진짜로 위기 상황인가?

    “신경 쓰여요?”

    “아니요!”

    크루엘로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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