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버지.’
가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미뉴엣이 백작이 되기 위해선 원로회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하나 그녀가 영지로 내려간 지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원로회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려가서 작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면, 그들에게도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원로회도 작위를 방계로 넘기고 싶진 않겠지.’
일이 쉽게 풀릴 리 없다는 불안감이 치솟았지만, 가보트는 애써 잘 될 거라고 되뇌었다.
영지로 내려갈 준비를 마치고 가보트가 말에 올라탔다.
그의 뒤쪽으로는 네 명의 호위가 말을 타고 따라붙었다.
가보트는 말을 박차려다가 잠깐 저택을 돌아보았다.
사실은…….
“나도 갈까?”
‘의지하고 싶었지.’
성격이 특이해서 알기 어렵지만, 시오라 보네티는 단단한 사람이다.
땅에 큰 뿌리를 내린 거목과도 같다.
그게 아니라도 이런 때 누군가의 온기가 옆에 있어 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슬픔을 나누기 위해 미뉴엣의 방을 찾아갔던 때.
“너, 정말 몰라? 아버지가 왜 그날, 네 대기실에 들어갔었는지.”
방 안에서 들린 대화가 잔인하리만치 분명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는데 말이다.
혹여라도 다른 사람이 대화를 엿들을까 봐, 가보트는 대화가 끝날 때까지 문 앞을 지켰다.
발밑이 까마득하게 꺼지는 가운데에서도 계속.
생각하니 어이가 없어서 그는 웃고 말았다.
“어떻게 도와 달라고 말하겠어.”
모르겠다.
무슨 생각이어야 곤란한 혼담을 처리해 준 양딸을 죽이려 드는지.
알면서도 저는 왜 그런 아비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어째서 잠깐이나마 무결한 시오라를 원망할 수 있었는지.
한 줌 남은 염치가 그의 입을 다물렸다.
체념하며 가보트가 말했다.
“가자.”
“예, 공자님.”
다섯 마리의 말이 달려 나간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며 그들이 지나간 곳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약 50m 뒤로 시선을 옮기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와, 간다. 출발한다!”
하나는 시오라 보네티.
“정말 아끼나 봐요. 뒤치다꺼리까지 해 줄 정도면.”
다른 하나는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사내가 심드렁한 얼굴로 하는 소리에, 시오라가 혀를 찼다.
“내가 지금 가보트 때문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누가 따라오라고 시켰어요?”
“나 없으면 못 가잖아요. 달링은 말도 못 타면서.”
“아니, 그건 배울 일이 없어서……! 애초에 그쪽이 부추기지 않았으면, 말을 빌려 탈 일도 없었거든요?”
“맞네요, 부추긴 건 나였죠. 미안해요.”
“아, 좀. 말다툼하려면 좀 끝까지 버텨 봐요, 재미없게.”
“정말 재미없어요? 난 재밌는데.”
샐쭉 웃는 얼굴을 보고, 시오라는 크루엘로의 가슴팍에 머리를 받아 버렸다.
조금도 타격이 없어 보였지만.
“출발이나 해요, 놓치겠다.”
“내 사랑의 분부대로.”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앞선 흙먼지를 쫓아 땅을 박찼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알려면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한창 가보트가 영지로 내려갈 준비를 하던 때.
나는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미뉴엣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가보트는 뭘 어떻게 해결한다는 걸까.
차가운 사이가 돼야 한단 걸 알면서도 궁금증이 말도 못 하게 치솟았다.
크루엘로의 정보 길드라도 가 볼까 싶어서 반지를 노려보다 아닌 척하기를 몇 번, 생각만으로 지쳐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천장…….”
천장은 새하얗다.
새하얀 건 가보트.
가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넌 이 저택을 지켜 줘, 시오라.”
거절.
“이상하다.”
거리를 두려던 건 나였는데 왜 내가 밀려난 것 같지?
아까 좀 쌀쌀맞지 않았어?
아니야,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겠지.
영지에 다녀오면 다시 원래대로의 가보트로 돌아올 거다.
놀리기 좋고 순진하고 조금만 상처받은 척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무른 가보트로…….
“돌아오면 안 되지!”
나는 목 뒤를 받치던 베개를 집어 던졌다.
뭐 해, 진짜.
휘말려 죽을까 봐 겁먹어서 거리를 벌린다고 해 놓고 왜 서운해하는데.
입적했다고 진짜 가족이 된 것도 아니잖아!
페불라시여, 이 못난 신도의 마음을 정화해 주소서.
힘들 때만 찾는다고 무시하지 마시고, 신이면 신답게 좀 너그러운 마음으로!
“헉!”
그때 요란하게 불어닥친 바람에 커튼이 크게 펄럭였다.
어우, 무슨 천 소리가 저렇게 크냐.
벌떡 일어나 앉으며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페불라시여, 저는 아무 말도 안 했…….”
불현듯 커튼 너머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허.
“저기요, ‘문’으로 끝난다고 창문이 문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런가요. ‘하트’로 끝나길래 자기가 내 심장인 줄 알았는데요.”
햇빛을 바로 받아 반짝이는 하늘색 머리.
장신의 사내는 창틀에 걸터앉아 유유히 다리를 꼬았다.
“안녕, 스윗하트.”
밖에서 누가 보면 어쩌려고.
한 소리 해 주려던 순간, 헤엄치듯 움직인 커튼이 크루엘로의 뒷모습을 가렸다.
세상에 마법 남발하는 것 좀 봐.
너무 부럽다.
“미뉴엣 보네티, 구금되어 있어요.”
“마법……. 네?”
“그쪽도 원로회가 극성인 모양이더라고요.”
이게 뭔 소리야.
당황해 눈을 깜박이자, 크루엘로가 미뉴엣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요약하자면.
“파워 싸움? 미뉴엣 길들이기? 내 아들과 결혼하지 않으면 작위 계승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정확하네요.”
그럼 가보트는 뭐 하러 간 거람. 원로회를 설득할 패라도 있나?
물어보려던 찰나.
“물론 달링은 궁금하지 않겠죠. 남매와 멀어지기로 했다니.”
“그, 그렇죠. 하나도 안 궁금해요. 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길 굳이 찾아와 하시는지 모르겠네!”
놀림당하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슬픈 일이다.
크루엘로가 눈을 휘어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다른 명분도 챙겨 왔는데.”
“……뭔데요? 아니, 뭐, 그냥 조그만 호기심이 생겨서요.”
“자기가 악신설을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도 조사해 봤거든요.”
아차, 페불라 악신설! 잊고 있었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 힘든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겉으로는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으며 나는 여유로운 척, 다리를 꼬았다.
“그러다가 재밌는 걸 발견했어요.”
“으흠.”
“보네티가 페불라 교단의 하나에서 출발했다는 걸 알아요?”
“……혹시 내가 확인 못 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어요?”
“진짜예요. 찾아내긴 좀 어려웠지만, 보네티 가문으로 확립하기 전에는 한 교구를 담당하던 수석 신관이었대요.”
원한다면 증명해 줄 수 있다고 크루엘로가 덧붙였다.
증명을 보기 싫은 건 둘째 치고 와 닿지 않는다.
뭐라고 할까, 너무 짜 맞춘 듯한 우연 아니야?
이게 다 신이 인도한 길이라고 덮어놓고 신기해하기에는 내 신앙심이 너무 불량했다.
똑똑, 페불라시여, 계십니까? 어떻게, 계시 한 말씀이라도 안 내려 주십니까?
“시기적으로 보면 악신설이 나온 것도 그즈음이라고 해요.”
“보네티 가문으로 확립될 때요?”
“그보다 전이요. 제국 건국 전엔 부족 생활을 했다던걸요.”
“아아.”
“듣기론 그 시조의 일기가 백작성에 남아 있다고 하던데.”
일기라고 하니 좀 더 궁금해졌다.
딱딱한 기록보다는 훨씬 생동감이 넘칠 테니까.
어떤 언어로 적혀 있더라도 읽어 낼 자신이 있기도 하고.
다만…….
나는 곁눈으로 크루엘로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면…… 확인해 봐야겠네요? 보네티 시조의 일기요, 영지에 있겠죠?”
“그럼요.”
“진짜로 페불라랑 연이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게 또 신도의 책임이란 거잖아요.”
“그렇죠.”
“제가 보네티 일에 간섭하러 가는 건 아니지만, 필요하면 휘슬에 가 볼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럼요, 어쩔 수 없죠.”
정해진 답이 착착 나온다.
나는 만족하며 백작저를 나왔다.
집사장에게는 크루엘로와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거짓말했다.
혹시라도 가보트가 보게 되면 저를 미행한다고 오해할까 봐 후드가 달린 로브를 입고 투명화 주문을 둘렀다.
준비를 마치고는 기세 좋게 말에 올라탔다.
승마를 배워 본 적은 없었지만, 세상에 내가 못하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진짜, 뭐 이런 몸이…….”
시오라 보네티가 못하는 건 있었다.
여태 썼던 몸 중에도 유별나게 운동 신경이 떨어진다.
순발력 정도야 성력으로 보정할 수 있었지만, 기술적인 면은 전혀 안 먹힌다.
검이 괴발개발로 나갈 때 알아봤어야 했어.
하는 수 없이 비웃으며 구경하던 크루엘로와 함께 말을 타야 했다.
그리하여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나는 내 하반신에게 안녕을 고하는 중이었다.
승마, 그것은 엉덩이가 죽는다는 뜻이다.
기껏 키워 놓은 체력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통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에 전념하다가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감사하단 말을 안 했네요.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음. 뒷조사하고 감사 인사를 받으니 쑥스럽네요.”
“오, 방금은 진짜 쑥스러워서 둘러대는 말 같았어요.”
“…….”
“다른 약혼자들은 왜 그렇게 크루엘로를 무서워했대요? 생각보다 잘해 주는데.”
내가 페불라의 신도란 걸 알고 크루엘로의 태도가 한층 친근해지긴 했지만, 그전에도 크게 나쁘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정도였으면, 파혼해 달라고 애걸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원로회에서 손을 뻗은 게 컸나?
“글쎄요. 당사자한테 나쁘게 대하진 않았는데 뭐만 하면 겁먹고 움츠러들던데. 재미는 없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가문의 비리를 폭로하는 게 취미랬지.
이건 나도 목격한 바 있으니, 원로회에 다 뒤집어씌울 수는 없겠다.
“보네티는 정말 봐준 거예요? 별거 안 하셨잖아요.”
“비리를 터뜨리고 다닌 건 화풀이였어요. 이전의 혼담에서 제 의사가 반영된 적은 별로 없어서.”
“이번은…….”
“제의한 건 달링이지만, 선택은 내가 했잖아요? 만족하고 있어요.”
나이를 거꾸로 먹나.
오히려 진짜 어릴 때는 성숙했던 것 같은데.
그땐 좀 어린애같이 굴길 바랐는데,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강한 사람을 만나면 좋았겠어요. 그러면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뭐……. 내가 성력 믿고 겁을 안 먹는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아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게 내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오라가 죽더라도, 설사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살아남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까.
“그런 셈 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