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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37화 (37/162)
  • 37화

    이유를 뭘 더 쥐어짜 내라고.

    크루엘로를 노려보다가 나는 제풀에 지쳐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긴 아니지만, 궁금하긴 했다.

    “굳이 민감한 얘기를 꺼내게 하네.”

    “해 봐요, 뭐든.”

    “크루엘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어땠어요?”

    그가 내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냥…… 남매 모두 백작과 사이가 나빠 보였는데 생각보다 슬퍼하더라고요. 내가 이상한가 싶어서.”

    시오라 벨벳도 같은 상황이었기에 주저 없이 물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슬프지 않았다.

    약간의 상실감과 허무함. 덧붙이자면 해방감을 느꼈다.

    그렇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는데도 그랬다.

    “딱히 기억나지도 않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충격은 받았던 것 같지만, 슬픔보다는 다른 의미였을 거예요. 죽음을 처음 겪은 때였으니까.”

    “음.”

    “달링이 이상하지 않단 걸 확인받고 싶어요?”

    그런가.

    어쩌면 새로 밴 습관 같기도 했다.

    바깥에 나온 이후로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뿐이었다.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배우고…….

    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네.

    “신경 쓸 거 없어요. 원래 사람은 다 이상하거든요.”

    “제일 이상한 사람이 할 소린가, 그게.”

    크루엘로가 툭 뱉은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성의 없이 가벼운 위로였지만, 가슴에 올리기엔 딱 좋은 무게였다.

    나는 입 안에 남은 사탕을 대굴대굴 굴렸다.

    어느새 새끼손톱보다 작아진 사탕이 마지막 인사를 하며 혀로 녹아내린다.

    음, 달다.

    단건 언제나 옳아.

    마음이 산뜻해졌다.

    “웃는 걸 보니 좋아졌나 보네요.”

    크루엘로가 날 따라 웃으며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비 갠 하늘로 잠깐 향했을 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발목!”

    내가 더 약한 척을 한 건─약한 게 거짓말이란 건 아니지만─ 이때를 위해서였다.

    사정없이 목검을 휘둘렀으나, 크루엘로는 아무렇지 않게 발을 들어 목검을 밟아 버렸다.

    그 힘에 딸려가 도로 내 몸이 바닥에 처박히려는 걸 잡아 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당황한 티도 없는 얼굴을 보며 나는 투덜거렸다.

    “에이, 안 맞아 주네.”

    “다음 기회를 노려 봐요.”

    칫.

    ***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까지 안 풀릴 수 있을까.

    아레스에게 소식을 전해 들으며, 대원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직도 9원로의 소식이 없다고?”

    “줄리안 미네르바가 계속 수색 중입니다.”

    “제대로 해내는 게 하나도 없구나. 정말 단 하나도!”

    노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일을 다 망쳐 놓고 큐딜은 실종됐다.

    말이 실종이지, 실패의 책임을 물을 것이 두려워 도망친 게 분명하다.

    수확제, 신전에 시오라 보네티 납치까지.

    세 번의 기회를 모두 쓴 원로에게 남은 건 어차피 죽음뿐이었으니.

    큐딜이 죽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열쇠가 돌아오지 않았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 몸에서 열쇠를 빼낸 게 아닌 이상, 죽은 이의 열쇠는 대원로의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좋았다.

    열쇠 마법은 검은 뱀 교단의 시조가 창시한 마법으로 교단에서도 열쇠를 보관할 만한 상위급 원로에게나 전수되는 극비였다.

    그 말은 즉, 큐딜이 열쇠를 빼앗기지 않고 살아 있음을 의미했다.

    “수색 인원을 늘리겠습니다.”

    으득, 대원로는 이를 갈아붙이며 눈앞의 사내를 노려봤다.

    산처럼 거대한 덩치에 빽빽이 들어찬 근육질, 짙은 눈썹에 무감한 얼굴을 한 10원로.

    아레스 또한 실패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 조그만 천것 하나를 해치우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다른 일이 실패한 건 그렇다 쳐도, 시오라 보네티 쪽은 납득할 수가 없다.

    아무리 크루엘로가 싸고돈다고 해도, 처리할 시간이 잠깐도 없었을까.

    아레스는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 담백한 태도에 노인의 분노가 살짝 누그러졌다.

    실상, 이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크루엘로를 결혼시키려는 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씨를 남기기 위해서다.

    일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가능성을 고려해서.

    그러니 그 반려가 누가 됐든 대계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노인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수십 년간 쌓여 온 직감이었다.

    처음에는 제 속을 긁어 대는 그 미천한 출신에 화가 났지만, 그 기분은 점차 변질했다.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한 듯한, 그 여자를 죽여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그의 분노를 충동질했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어리석어 보였지만.

    대원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네티 백작은 왜 죽인 것이오.”

    “타깃을 살해하기 직전에 발각됐습니다.”

    “……그치도 정령사였지. 기감에 예민할 테니 그럴 만하군.”

    “대원로님, 이 기회를 이용해 보려 합니다.”

    대원로가 느릿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보네티의 원로회는 이 기회에 미뉴엣 보네티를 길들이려 할 겁니다.”

    “그 아해에게 빚을 지워 천것을 죽이게끔 지시하라는 말이오?”

    “아닙니다. 미뉴엣 보네티의 역할은 백작령으로 타깃을 유인하는 것뿐입니다.”

    “흐음.”

    “어리석게도 타깃은 보네티 남매와 사이가 제법 좋아 보이더군요.”

    보네티 소백작을 조금 가둬 두는 것만으로 영지로 내려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혈기 왕성한 청년답기는 했다.

    “그것을 영지로 유인하더라도 암살은 무리일세. 가주는 9원로 때도 움직였어. 이 시점에서 혼자 보낼 리 없지 않은가.”

    “이걸 봐 주십시오, 대원로님.”

    아레스가 대원로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노인은 그 내용물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대원로의 눈이 아래로 향할수록 주름진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노인의 두 눈에 분기는 깔끔히 가셔 있었다.

    “참으로 공교로워, 어쩌면 이리도 아귀가 들어맞는지.”

    그분의 도우심이 틀림없다.

    하나.

    “가주가 홀려 버리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소.”

    “그래서 드리는 청입니다. 베아티투도를 쓰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대원로님.”

    “과연.”

    그거면 모든 가능성을 봉합할 수 있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설사 통제하지 못할 위험이 그 땅에 닥치더라도 그건 대원로가 마음 쓸 일은 아니다.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해졌다.

    대원로는 충실한 부하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

    노인은 걸음을 옮겨 아레스가 선 뒤쪽의 벽으로 향했다.

    그가 케인으로 벽면을 밀자 벽이 돌아가면서 새까만 공간이 드러났다.

    “들어오시게, 최근 일들이 모두 망가진 건 어쩌면 기도가 부족해서일지 모르니.”

    아레스는 아래쪽으로 드러난 공간을 재빨리 살폈다.

    새하얀 거석을 깎아 만든 여성체 신상과 거대한 제단.

    원로회의 전신인 검은 뱀 교단에서 섬기는 악마의 제단이었으며, 모리온을 집어삼킨 크루엘로에게 깃들 것이라 믿는 악신의 제단이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대원로님.”

    아레스는 들끓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환희했다.

    노인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

    장례식은 끝났으나 그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미뉴엣은 백작부인을 모시고 휘슬─보네티 백작령─로 내려갔다.

    부인은 다시 요양차, 미뉴엣은 원로회의 인가를 받고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여기나 저기나 원로회의 권력이 대단들 했다.

    가문 내에서는 가주가 최고 권력자인 줄 알았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나름대로 준비했다.

    크루엘로의 검술 교실은 하루짜리였지만, 내가 이 몸을 쓸 날은 앞으로도 많았다.

    이제 원로회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테니 나도 체력 정도는 갖춰 놔야 했다.

    그래서 나는 새벽─기사들이 없는 시간─마다 연무장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도 가까스로 두 바퀴를 돌고 헉헉거리던 차였다.

    “……시오라.”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가 베티를 대신해 수건을 건넸다.

    못 본 새 잔뜩 초췌해진 청년은 가보트였다.

    “어, 가보트.”

    장례식 이후 거의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 걸로 아는데.

    며칠의 간극이 어색해 나는 머뭇거리며 수건을 받았다.

    그가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해.”

    숨 막힌다. 초조하다. 시계 소리가 왜 이렇게 커?

    처음, 시오라 보네티가 되었을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나는 3초에 한 번씩 가보트를 흘금거렸다.

    나를 불러 놓고 그는 말이 없었다.

    장례식 때처럼 눈이 부어 있진 않았지만, 잘 지낸 것 같지도 않다.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안 찾아갔는데 좀 챙겨 줄 걸 그랬나?

    아니지. 가보트는 백작이 나 때문에 죽은 것도 모르는데 그것도 기만 아닌가.

    백작이 나를 죽이려고 한 것도 아마 모를 거고.

    안 되겠다.

    계속 이러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나는 입을 열었다.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당초의 목적도 잊지 않고, 목소리를 차갑게 깔았다.

    “무슨 일─.”

    “미뉴엣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아.”

    차갑게 말하기 실패.

    가보트가 한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쓸어 냈다.

    “너한테 말은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어……. 휘슬로 내려간다는 거야, 왜?”

    “미뉴엣의 상황이 좋지 않을 거야. 내가 내려가서 해결해야 해.”

    “음.”

    무슨 말일까. 미뉴엣을 위로해 주러 간다는 걸까?

    느낌상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캐묻기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일단 알아들은 척했다.

    “나도 갈까?”

    “넌 이 저택을 지켜 줘, 시오라.”

    “으응, 그러지, 뭐.”

    “부탁할게.”

    그리고 가보트는 붙잡을 새도 없이 나가 버렸다.

    쾅, 문이 닫혔다.

    ***

    ‘그래, 내가 해결해야 해.’

    사실을 나오며 가보트는 결의를 다졌다.

    다른 사람한테 떠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여타 가문에서도 원로회의 힘은 막강했지만, 보네티는 개중에서도 유별났다.

    보네티가 정령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 가주는 수호신이라 부를 만큼 막강한 정령을 불러낼 수 있었으나 그것도 다 옛말이다.

    정령의 힘은 시간이 지나며 약해졌고 가주의 위세는 떨어졌으며 하이에나들이 그 부스러기를 탐하였다.

    언제부턴가 원로회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고 그들은 가주마저 통제하려 들었다.

    그 수단의 하나가 혼담으로, 백작의 직계 자식, 개중에서도 특히나 차기 백작은 원로회에서 지정해 준 사람과 혼인해야 했다.

    가보트의 아버지가 그랬고 할머니가 그랬다.

    웬디 벨벳─가보트의 고모이자 시오라의 양모─이 가문에서 내쫓기듯 한 것도 정략혼을 거부한 죄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뉴엣은 따르길 거부했다.

    “3원로님의 양자와 혼인하는 게 정치적으로 무슨 이득이 있죠?”

    그녀는 원로회와 가주 간의 위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게 스물이 넘을 때까지 미뉴엣에게 아무런 약혼자가 없던 이유였으며 가보트가 혼자인 이유이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뉴엣은 월등한 후계였고 가보트에겐 권력욕조차 없었다.

    그녀의 후계 자리는 굳건했으나 원로회와의 기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들에게 순종적인 백작은 퍽 골치 아파했지만, 미뉴엣에게 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별일이 없다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도중 타협점을 잡아, 미뉴엣은 무난하게 백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보네티 백작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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