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크루엘로의 물음에, 에이미가 얼떨떨하게 답했다.
“소원? 어, 그랬지.”
“그러면 평생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어?”
“벌써 프러포즈하는 거야?”
평소라면 그 놀림에 얼굴을 붉혔겠지만, 크루엘로는 진지했다.
조그만 고양이가 떠나가는 것도 아프다.
부모님 때의 일은 시간에 파묻혀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하다.
만약에 에이미가 그렇게 되면 어쩌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물론 아이의 비극 대부분은 사고로 생긴 일이었기에, 에이미의 약속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루엘로에게는 조그만 확신이라도 필요했다.
그게 아이의 소원이었다.
그런데.
“음……. 있잖아, 로이.”
에이미의 얼굴이 천천히 흐려졌다.
그 표정을 보며 크루엘로는 문득 깨달았다.
제 불안이 잦은 사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미래를 이야기할 때, 에이미는 언제나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차라리 그 답을 듣고 싶지 않았으나 에이미의 입은 결국 열리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던 그때.
“세상에, 아직도 연무장에 계셨어요?”
지나가던 집사 하나가 아이들을 보며 놀라 다가왔다.
기묘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조각났다.
에이미는 아무렇지 않게 크루엘로의 손을 붙잡았다.
“들어가자.”
자신을 안아 줄 때와 달리 그 손은 몹시 차가웠다.
그 조그만 손바닥에 에이미의 답이 있던 것처럼.
“어쩌면 그때, 넌 이미 알고 있었을까.”
궐련 연기가 희뿌옇게 피어난다.
정지한 마차 한가운데에서 크루엘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에이미 로열샌드.
자신의 첫 번째 약혼자는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희한하게도 당초 병약하지 않았던 에이미는 시간이 갈수록 몸이 약해졌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신관을 불러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에이미는 담담했다.
마치 그럴 걸 알던 사람처럼.
크루엘로는 아이가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했으나 그 애의 끝은 생각보다도 최악이었다.
에이미는 크루엘로 대신 독을 먹고 죽었다.
홍차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몬스터 독.
원래는 크루엘로의 차에 녹아 있었던 악의 때문에.
“로이, 네 차가 더 맛있어 보이는데 나 그걸로 마실래.”
치사량은 아니었지만, 당시 에이미의 몸 상태와 맞물려 새로운 비극이 태어났다.
그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너무 많이 울어서 기억이 거의 날아갔으니.
조금 괜찮아지고 그날을 되돌아볼 때면 크루엘로는 한 번씩 고민했다.
그날 에이미가 제 차를 대신 마신 게 단순한 변덕이었는지. 아니면 뭘 알고 그런 건지.
물론 제 답은 번번이 전자였다.
후자였다면 한 번쯤은 꿈에 나와 줬을 테니까.
“날 원망해, 에이미?”
크루엘로는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허공에 던져 봤다.
그러고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웃었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크루엘로에게는 몬스터 독의 해독제를 종류별로 구비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창고가 터져 나갈 만큼이나 모았다.
쓸 일도 없고 쓸 생각도 없어서.
그러던 것이 처음으로 쓰임을 찾은 게 이 보네티 백작저였다.
“…….”
크루엘로는 마차의 바깥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고양이가 죽은 날처럼, 에이미가 죽은 날처럼.
보네티 백작의 죽음을 에이미와 동가로 두긴 싫은데 말이야.
그는 픽 웃고는 궐련을 버리며 손짓했다.
이내 마차 안은 궐련을 피웠던 흔적조차 없이 깨끗해졌다.
크루엘로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시종이 허둥지둥 우산을 드리웠고 보네티의 많은 사용인들이 돌처럼 굳어 그를 쳐다봤다.
곤란하기도 했겠지, 백작저 앞에 와 놓고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없이 마차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그 소식이 위에까지 올라간 걸까, 우산을 든 시오라 보네티가 마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종의 우산을 빼앗아 들고 크루엘로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제 우산을 그녀의 우산 위에 드리우고.
그러고는 피로감이 눅진하게 묻어나는 그 얼굴을 향해 말했다.
“검, 가르쳐 줄까요?”
“여긴 또……. 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평소처럼 또 황당하다는 얼굴로 면박을 줄 줄 알았다.
예상대로 시오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고 눈을 몇 번 깜박였으며 또.
“그럴까요?”
입매를 늘여 웃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비에 젖은 머리칼에서 빗방울이 툭.
그 순간, 크루엘로의 가슴께에 미묘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그 얼굴에서 에이미를 떠올리는 건, 제 병증이 낫지 않은 탓이겠지.
크루엘로가 그녀를 따라 웃었다.
***
“우웨엑!”
철퍼덕, 바닥에 엎어져 나는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저 시늉이었기에 더러운 꼴을 보이진 않았다.
보였더라도 금방 빗줄기에 쓸려 내려갔겠지만.
비는 쏟아지는데 난 뭘 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 따라 나오긴 했는데 다른 의미로 자괴감이 솟는다.
“달링, 체력이 형편없네요.”
바로 앞에서 애석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크루엘로다.
“아닌데요.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요. 장례식 때부터 엉망이었는데요.”
“그 거창한 주문 때문에요? 전처럼 바로 쓰러지진 않던데.”
“그것보단 하위 주문이라서요.”
수확제 때 쓴 건 10주문, 큐딜 때 쓴 건 9주문.
숫자로 보기엔 한 단계 차이지만,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말하자면 3분간 전력 질주를 한 것과 세 시간 전력 질주를 한 차이 정도?
물론 이 몸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수확제에서 쓴 것보다 상위 주문도 있나요?”
“있다고는 들었는데 난 몰라요.”
페불라의 고유 주문은 총 네 가지였지만, 최상위 주문 두 개는 소실되어서 이름만 안다.
11주문이 탈피, 12주문이 헌신.
너무 추상적인 단어라 짐작하기도 어렵다.
탈피는 좀 알 것 같기도 한데……. 육체가 재구성되는 느낌 아닐까? 그 왜, 영웅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고대 교단이 왜 무너졌는지 모르겠네.”
“시대가 변했잖아요. 극단적인 믿음은 줄어들었어도 신관 수는 늘었고.”
여러 가치관이 공존했던 고대와 달리 지금은 하나의 보편적인 정의관에 묶여 있다.
극단적인 정의주의자는 줄어들고, 대부분의 신관은 적당히 정의롭게 살아간다.
그 때문에 최고 지도자의 수준은 깎여 나갔으나 신관은 외려 늘었다.
“그러면 자기의 믿음이 그토록 극단적이란 말이에요?”
“왜요. 내가 별로 신실해 보이지 않아서 이상해요?”
“딱히 시비 걸려던 건 아닌데.”
“나도 그렇게 듣진 않았어요.”
우연히 페불라의 신전에서 태어났고 어쩌다가 마지막 신도가 됐을 뿐이다.
내 신앙심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지켜보셨다면 기절할 정도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키려다 실패해서 도로 주저앉았다.
“좀 더 쉬어요, 팔이 후들후들 떨리는데.”
“아닌데요, 제 팔 멀쩡해요. 크루엘로 눈은 멀쩡해요?”
“솔직히 말해서 좀 의외예요. 달링은 검을 잘 다룰 것 같았거든요.”
하늘 같은 스승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울컥해서 크루엘로를 노려봤다.
시오라의 몸이 에이미보다 재능이 하아안참 떨어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움직이려고 해도 저렇게 움직이는 몸으로 뭘 어쩌라고!
세상에 이런 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래도 전에 반사 신경은 좋았잖아요. 이렇게 둔재일 줄이야.”
“혹시 검을 가르쳐 준단 말은 절 비꼬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나요?”
“음……. 미안해요. 그냥, 좀 겹쳐 봐서 그래요. 또 병이 도졌는지.”
크루엘로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는 허리를 수그렸다.
긴 다리를 접어 눈높이를 맞추고, 그가 가벼이 물었다.
“그래서 기분은. 좀 풀렸어요?”
풀렸겠어?
눈으로 되묻자 크루엘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비 걸려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내가 힘들 때 누가 그렇게 해 준 적이 있거든요.”
“네?”
“그러고 보니 하나를 잊었네요.”
크루엘로가 엄지로 내 턱을 눌렀다.
뒤이어 벌어진 입 안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달고 동그랗다.
체력이 회복되는 기분에 나는 말없이 사탕을 우물거렸다.
비 오는 날, 몸을 움직여 기분 전환.
입에 사탕을 넣어 주기 전에도 크루엘로가 뭘 떠올리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십 수 년 전과는 다르다.
나는 딱히 힘들지 않았으니까.
“내가 힘들어 보여요?”
“백작의 시체를 발견하고부터 내내 죽상이었잖아요.”
“그럴 리가.”
보네티 백작이 죽은 게 뭐 대수라고.
그가 괴롭힌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건 나도 이제 알고 있었다.
“정말?”
단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크루엘로가 제 허벅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가늘게 휘어진 눈은 내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듯 보였다.
으으음.
“찝찝하긴 해요. 아주! 조금! ……나 때문에 죽은 거잖아요.”
“백작이 달링의 대기실에서 죽었는데도?”
“대기실에 들어간 게 백작이 아닐 수도 있었어요. 이를테면…… 가보트라거나.”
“그 친구한테 정이 많이 들었나 보네.”
크루엘로가 입매를 늘여 웃었다.
“질투 나라.”
여전히 개의 언어에 능하군.
“착한 애예요,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보네티를 나가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나요?”
“잘 안 된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달링이 아직 여기 있으니까요.”
반박할 것 없는 정론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음.
백작의 죽음이 슬프진 않지만, 아예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가보트는 백작의 장례식에서 온몸의 수분이 다 빠질 것처럼 오열했다.
미뉴엣은 제 슬픔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으나 동요한 건 분명했다.
그 외에는 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으나 그 둘이 문제였다.
각자의 방식으로 백작을 애도하는 남매의 모습에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두 사람에게 더 정이 들었다는 걸.
이전의 삶에선 함부로 정을 주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조차 없었다고 해야겠다.
에이미의 가족은 로열샌드 경뿐이었고 비가는 고아였으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내겐 크루엘로뿐이었으나 원로회에서 그를 죽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니 이제야 알았지만, 가까운 이가 생긴다는 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거리를 두는 게 좋겠죠.”
굳이 위험성을 따지지 않아도 그래야겠지.
나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 신전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그러나 크루엘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재차 물어왔다.
“그게 다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