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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35화 (35/162)
  • 35화

    “할 말이 있어, 미뉴엣.”

    식을 마친 즉시 나는 미뉴엣의 방문을 열었다.

    이 일로 보네티에서 쫓겨나게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미 목적한 바는 이루었고 다른 일에 말려들 겨를도 없다.

    더군다나 잘못 휘말려 죽는 게 백작 하나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미뉴엣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재차 그녀를 부르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휙 들었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들을 시간이 없겠네. 짧게 말해.”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숨도 내쉬지 않고 말했다.

    “백작님 돌아가신 거 나 때문이야.”

    직설적으로 토해 낸 말에 미뉴엣이 꾸밈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암살자가 죽이려고 했던 거 나니까. 책임질 생각─.”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미뉴엣이 내 옷깃을 틀어쥐었다.

    그녀답지 않게 과격한 행동이었으나 이만큼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 몰라? 아버지가 왜 그날, 네 대기실에 들어갔었는지.”

    “…….”

    “아버진 널 죽이려 했어.”

    미뉴엣도 만만치 않게 직설적인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고 답했다.

    “짐작은 했어.”

    나를 해치려는 것 외에, 몰래 대기실에 들어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심지어 나는 비리로 백작을 잔뜩 긁어 놓은 상황이었는데.

    미뉴엣이 축하주를 주려다 말았을 때 대강 눈치챘다.

    백작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

    그리고 미뉴엣이 그걸 도중에 멈췄다는 것도.

    “그걸 알면서 아버지가 너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려고?”

    “백작님은 미수였잖아. 별개의 사건이야.”

    “얼빠진 소리 그만해!”

    미뉴엣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뭐야!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죄책감을 느껴? 널 탓해 주길 바라, 시오라?”

    “…….”

    “널 죽이려다가 똑같은 목적으로 온 암살자한테 당한 머저리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미뉴…….”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어, 나도 알아! 그런 인간이 내 아버지란 게 재수 없게 됐지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를 계산도 못하는 머저리로 만들지 마. 그건 마땅한 최후였어, 내가 감당할 일이었고.”

    내게 말하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말하는 걸까.

    미뉴엣은 제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네 머리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시오라.”

    “…….”

    “지금 네가 느낄 건 죄책감이 아니라 분노고. 그러고도 여유가 남는다면 동정이야.”

    “내가 널 동정하길 바라?”

    “……그래.”

    그녀는 마른침을 넘기고 힘주어 말했다.

    노려보듯 나를 직시하는 두 눈엔 살벌한 분노가 들끓었다.

    “날 동정하고 가엾게 여겨. 그래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누군지 꺼내 놔.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야.”

    슬픈 노여움이었다.

    답할 수 없다는 게 애잔할 만큼이나.

    ***

    11년 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쏟아지던 날.

    크루엘로가 정을 주던 고양이가 죽었다.

    얌전하던 사냥개가 뛰쳐나와 고양이를 문 것이다.

    “아이고, 그래도 도련님을 안 물어 다행이네요. 이 개는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9원로, 큐딜은 실실 웃으며 개를 데리고 사라졌다.

    크루엘로는 후원에 고양이를 묻어 주며 울었다.

    단순히 그 작은 짐승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끝 모를 공포가 발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속삭인다.

    ‘너도 이리로 떨어져.’

    크루엘로가 정을 준 건 전부 죽어 나갔다.

    부모도 사용인도, 살갑게 굴어 조금 쓰다듬었을 뿐인 고양이조차도.

    신에게 버림받은 게 틀림없다.

    이러다 남은 사람도 전부 데려가 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아이는 손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엉엉 울었다.

    그 때문에 에이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로이?”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을 보고 아이는 화들짝 놀랐다.

    우는 얼굴을 봤을까? 창피했으나 한순간뿐이다.

    짧은 생에 쌓이고 쌓인 비참함이 수치를 압도했다.

    “미안한데 에이미, 오늘은 돌아가 줘.”

    “너 울어?”

    “아냐. 날 내버려 둬.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왜 우는데. 로이, 나 봐 봐. 손은 왜 그래, 앞에 만든 무덤은 뭐야?”

    “됐다고 했잖아!”

    기어이 무덤 이야기가 나오자, 크루엘로는 울컥해 소리쳤다.

    내뱉자마자 후회했지만.

    “미, 미안해. 에이미, 나는 그냥…….”

    “어…… 아냐, 괜찮아. 무슨 일인지는 다음에 들으면 되고 말 안 해 줘도 되고.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오늘은 그냥 돌아가면 되지?”

    “……아니야. 가지 마, 에이미. 미안해. 같이 있어 줘.”

    크루엘로가 울먹이며 에이미를 붙잡았다.

    그제야 에이미는 당황해 굳은 표정을 풀고 아이를 안아 줬다.

    내리는 비는 차고 에이미는 작다.

    하지만 그 작은 온기에 기대어 크루엘로는 목 놓아 울어 댔다.

    어색하게 등을 도닥거리는 손길이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울음을 추슬렀을 때, 두 아이는 건물 외벽에 기대어 앉았다.

    크루엘로가 돌연 입을 열었다.

    “나, 마법 배울까?”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제게 힘이 있다면 그 조그만 고양이 정도는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불행에 대비해 두는 게 어떨까 해서.

    “……갑자기?”

    “에덴이 권해 줬어. 배워 둬서 나쁠 게 없다고.”

    “아, 그 대원로의 아들…….”

    에이미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입술을 떼었다.

    “마법은 배우는 데 너무 오래 걸려. 차라리 검이 낫지. 정신 수양에도 좋고 몸도 건강해지니까.”

    “검…… 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가르쳐 줄까? 해 보고 싫으면 그만해도 돼. 그런데 괜찮을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면 기분도 풀리거든.”

    “으응.”

    “너,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래? 하기야 로열샌드 경의 솜씨는 형편없으니까 그럴 만하지. 말해 두는데 난 달라!”

    에이미가 가슴을 펴고 소리쳤다.

    “좋아, 로이. 목검으로 대련해 보자. 날 한 번이라도 때리면 소원 들어줄게!”

    그 말에 크루엘로는 거절하려던 말을 쑥 삼켰다.

    아까보단 덜했지만, 빗줄기가 흰 선들을 그려 대고 있었다.

    이런 때 목검을 들고 설치긴 싫었으나 소원이란 말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에이미는 작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하니까, 금방 이길 수 있겠지.

    크루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에이미의 자신감은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었다.

    “다시!”

    무겁고 투박한 목검이 어쩌면 그리도 나비처럼 날아오르는지 모르겠다.

    크루엘로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검을 휘둘러도, 아이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차차 가능성이 생겼고 마침내.

    “이겼다!”

    팔목을 맞은 에이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쓰러졌다.

    아니, 드러누웠다.

    “에이미! 미, 미안해. 많이 아팠어?”

    에이미는 고개를 젓더니 헐떡거리며 말했다.

    “내, 체력이, 형편, 없어서, 그래.”

    여자아이는 한참 숨을 골랐다.

    그렇게 검을 잘 쓰면서 왜 저렇게 체력이 나쁠까?

    크루엘로의 머릿속에 에이미 유령설이 다시금 떠올랐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유령이 이렇게 다정할 리 없어.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에이미가 꾸물꾸물 일어났다.

    “에이미, 괜찮─.”

    “아.”

    “아?”

    반사적으로 입을 벌린 남자아이의 입으로 포도맛 사탕이 들어왔다.

    달다.

    조금은 녹았지만 따뜻하고.

    크루엘로는 평소 단맛을 그리 즐기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사탕은 특별했다.

    아이는 볼을 우물거리며 행복을 녹여 먹었다.

    “기분은 좀 좋아졌어?”

    다정하고 따뜻한 말.

    분명히 행복해야 할 상황인데도 이유 모를 설움이 차올랐다.

    사라진 줄 알았던 비참함이 다시금 아이를 짓눌렀다.

    눈물이 치밀어 올라 크루엘로는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곤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에이미에게 웅얼거렸다.

    “에이미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또다시 터져 버렸다.

    크루엘로는 도통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 하염없이 울기나 할 것이지, 제 혀조차 멋대로 움직였다.

    “내 부모님도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진 않았어. 에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단 말이야.”

    “어, 음. 로이……? 설마 나 때문에 우는 거야? 나 뭐 잘못했어?”

    “이상해. 그래서 불안해. 에이미가 나한테 잘해 주는 게 다 꿈같아. 왜야, 왜 그래?”

    “그건, 그건…….”

    에이미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리며 빠르게 눈을 굴렸다.

    “네가 예쁘고 돈도 많은 데다가 곧 엄청난 권력가가 될 거라서 그래!”

    한순간이지만 크루엘로의 눈물이 멈췄다.

    굉장히 속물적인 말에 놀라,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말에 실망한 건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계속 예쁘고 돈이 많으면, 공작이 되면 계속 잘해 줄 거야?”

    “무슨 소리야, 로이! 이럴 땐 화를 내야지! 어떻게 된 게, 넌 나보다 상식이 없어!”

    에이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리쳤다.

    “화를 내라고? 하지만…….”

    “따라 해 봐! ‘달링은 내 얼굴 보고 만나요?’”

    “달…… 달리……. 못 하겠어! 그런 느끼한 말을 어떻게 해!”

    얼떨결에 에이미의 말을 따라 하던 로이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배가 당기도록 웃었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비가 그쳤다.

    구름이 열린 틈새로 빛줄기 하나가 에이미의 얼굴에 기다란 선을 만들었다.

    크루엘로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너한테 잘해 주는 이유는 별로 멋지지 않아. 네가 알면 화낼걸.”

    “……뭔데? 말해 줄 수는 없어?”

    “음……. 말하지 말래.”

    누가?

    묻고 싶었지만, 에이미의 표정이 너무도 이상했기 때문에 크루엘로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에이미, 조금 전에 소원 들어준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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