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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34화 (34/162)

34화

원해서 하는 소리겠냐고.

황당해 크루엘로를 노려보자 그가 웃었다.

“좋아요, 진지하게 할게요. 일단은.”

이어진 손짓에 내 옷이 연청색 드레스로 바뀌었다.

엉망이 된 머리칼이 깔끔하게 정돈되고 머리 장식까지 생겼다.

크루엘로의 옷도 더미가 입은 것과 똑같이 변해 있었다.

마법 진짜 편하다.

“그리고…….”

크루엘로가 손을 한 번 더 튕기자 예식장의 불이 꺼졌다.

안쪽의 사람들 사이에는 소란이 일었지만, 나는 두어 번 눈만 깜박였다.

이거 익숙한데.

“폴터가이스트?”

“주인공이 입장할 시간이네요.”

그가 다시 내 손을 붙들고, 반대쪽 손을 튕겼다.

시야가 뒤집히더니 새까만 어둠이 눈앞을 뒤덮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는 더미와 위치가 바뀌었다.

나는 원래 있던 창문 쪽─더미가 옮겨졌을 곳─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숨을 가다듬었다.

곧바로 불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잔뜩 인상을 찡그린 골든스토브 백작을 볼 수 있었다.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전하, 약혼식에서까지 장난을 치지 마십시오.”

“음, 조금 지루해서. 미안하게 됐네.”

“얼마나 남았다고.”

백작은 몇 번을 더 꿍얼거리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봐주겠다는 듯, 그녀가 미간에서 힘을 풀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맹세의 입맞춤으로 식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미간에는 힘이 들어갔다.

어라.

입맞춤?

결혼도 아니고 약혼식인데 뭘 하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 크루엘로를 돌아보자 그는 재밌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못 하겠어요?’

그 모양새가 퍽 나를 도발하는 것 같았지만,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못 하겠냐고? 아니! 내가 못 하는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래, 뭐.

장례식도 아니고 약혼식 중에 입, 입맞춤 정도야!

얕보이지 않으려고 나는 크루엘로의 양 뺨을 붙잡아 당겼다.

이런 건 망설일수록 힘들어지는 법이니까.

곧바로 입술이 맞닿았다.

“읍?”

성인판 크루엘로는 온몸이 얼음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따뜻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말랑…… 이 아니라!

나는 서두르는 모양새로 보이지 않게 신경 쓰며 얼굴을 떼어 냈다.

그제야 당황한 듯 표정이 사라진 크루엘로가 보였다.

이겼다!

그때.

“……헉.”

식장의 누군가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보통은 크루엘로가 미친 짓을 했을 때 나는 소리다.

왜…… 놀라?

입맞춤이란 제국어에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길함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보트와 눈이 마주쳤다.

죽은 물고기처럼 그의 얼굴이 별로였다.

‘왜?’

내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가보트는 썩은 표정으로 제 입술을 가리켰다가 손가락으로 X 표시를 했다.

곧이어 제 이마를 가리키곤 손으로 O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입술이 아니라 이마?”

“흠, 크흠. 이상으로 식을 마치겠습니다! 두 사람은 축배를…….”

골든스토브 백작이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진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아니라 이마.

입술이 아니라…….

입술이…….

***

나와 크루엘로는 대기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걸음을 빨리했다.

이런 실수는 처음이다, 치욕적이야.

“그렇게 창피해요?”

크루엘로가 물었다.

놀리려고 한다기보다는 정말로 신기해하는 목소리다.

지나가는 사용인들을 흘긋 보고, 나는 소리를 낮춰 따졌다.

“이건 백작님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분명히 입맞춤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랬죠.”

“그쪽은 왜 안 피했어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잖아요. 이마란 거 알았으면서!”

“나도 처음이라 놀라서?”

“허, 못 하겠냐고 도발까지 해 놓고.”

“내가 크니까 이마에 닿겠냐고 묻는 거였어요.”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네.

“연습했다고 생각해요, 달링. 결혼식에선 진짜로 입을 맞춰야 하거든요.”

“크루엘로는 하나도 안 창피한가 봐요?”

“창피를 알았으면 이렇게 못 살았겠지.”

그건 그렇지.

너무도 맞는 말이라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래, 생각해 보면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이건 내 몸도 아니고 시오라의 몸이잖아?

다 끝나면 돌아갈 거니까 괜찮아.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야.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침, 대기실이 코앞이었다.

어차피 백작저로 돌아가겠지만,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까진 저기에 처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크루엘로, 손님 배웅하러 안 가요?”

“집사장이 알아서 하겠죠.”

“오?”

“알잖아요, 내가 허수아비인 거.”

보통은 치욕적인 말 아니야?

방패로 삼는 솜씨가 아주 능숙하다.

뭐, 책임을 다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의 문을 열려는 때.

“시오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부른 건 미뉴엣이었고 가보트도 함께 있었다.

백작도 왔을 텐데 어디 간 거람.

“무사히 식을 마치신 걸 축하드려요, 전하.”

“……축하드립니다.”

두 사람이 크루엘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미뉴엣이 자리를 비워 달란 듯 그에게 눈치를 줬지만, 크루엘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축하 고마워요.”

그러더니 얘기를 나누라는 듯,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미뉴엣은 눈썹을 한 번 까딱했으나 크루엘로를 모르진 않아서인지 금방 단념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과감한 면이 있네.”

“……내가 원래 그런 편이긴 해. 아, 백작님은─.”

“네가 전하의 뺨을 붙잡고─.”

“악!”

말을 돌리려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소리치자 가보트는 귀를 막았고, 미뉴엣은 황당하단 얼굴로 웃었다.

“이런 걸 부끄러워하는구나?”

미뉴엣은 나를 대체 뭘로 본 걸까.

크루엘로와 동류……? 생각하니 찝찝해졌다.

생각을 털어 내듯 고개를 젓다가 그녀의 품에 있는 술을 발견했다.

“그건 뭐야?”

“아버지께서 주신 축하주. 원래 대기실에서 직접 따라 주신다고 하셨는데 안 오시네. 그냥 줄게.”

“어디 가셨는데?”

“몰라, 예식 후반부에 일이 있다고 잠깐 나가셔서 안 돌아오셨어.”

가보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이걸 수상해하는 건 좀 과한가?

어쨌거나 술은 안 마시면 그만이니까.

나는 미뉴엣에게서 술을 건네받으려 했다.

“미뉴엣?”

“…….”

“손에 힘을 빼야 내가 술을 가져가지 않을까?”

병을 왜 이리 힘줘서 잡고 있는 거람.

미뉴엣의 힘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끌어올 수 없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술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생각이 바뀌었어.”

“뭐?”

“먹지 마, 그냥.”

미뉴엣이 술을 도로 가져갔다.

어…….

“축하 못 하겠다는 소리야? 이제 와서?”

“과잉 해석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술을 마시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뱉고 웃었다.

평소 같은 미소였으나 이질감이 든다.

크루엘로가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어째 기류가 이상한데.

“밖에서 그만 떠들어 대고 일단 대기실로 들어가자. 전하께서도 오실 거죠?”

그렇게 말하며 미뉴엣이 문고리를 돌렸다.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뿐,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뭐야, 이 냄새…….”

가보트가 중얼거린 것처럼, 문을 열자마자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처참한 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대기실의 바닥을 가득 적신 붉은색.

깨진 꽃병과 붉은색에 잠겨 든 꽃.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

보네티 백작.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

내가 백작의 상태를 확인했을 땐 이미 늦었다.

그의 영혼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역행으로도 그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약혼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장례식이 열렸다.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던 만큼,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됐다.

그 죽음을 애도하듯 하늘에선 빗줄기가 쏟아졌고 보네티의 성을 가진 이들이 백작저로 모여들었다.

새카만 모자와 새카만 옷.

가족장임에도 상당한 사람들이 다녀갔다.

마치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신관의 애도마저 끝나고 텅 비어 버린 예배당에서, 백작의 관은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미뉴엣, 가보트. 그리고 요양 중이던 백작부인까지.

내가 다가갈 상황이 아니라, 나는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검은 옷의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크루엘로였다.

“흔적을 확인했어요. 10원로의 소행이 맞아요.”

크루엘로의 단언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는 대기실에서 나를 죽이려다가…….”

“백작이 들어와서 처리한 거겠지.”

백작이 왜 내 대기실에 들어갔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그렇다.

속이 울렁거린다.

나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수그렸다가, 눈을 들어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그는 몹시도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 백작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 잿빛이 장례식과 어울렸다.

나는 무심코 물었다.

“내 잘못이에요?”

“아니요.”

“…….”

“신경 쓰인다면 내 잘못인 걸로 해 둬요. 아레스가 백작을 죽일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생각해서 해 준 말이겠지만.

갑자기 이 모든 상황에 짜증이 나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크루엘로. 나 보네티가 아니게 될 수도 있는데…….”

“상관없잖아요, 그런 건.”

크루엘로가 손을 뻗어 비뚤어진 내 모자를 바로잡았다.

“쫓겨나면 찾아와요.”

옅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무서울 것도 없지.

그 순간 뒤쪽에서 미뉴엣이 나를 불렀다.

“시오라,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해.”

크루엘로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는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다가 백작의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가보트는 눈이 탱탱 부어 붕어 같았고, 미뉴엣의 눈가도 붉어진 채였다.

그리고 백작부인.

“네가 시오라구나.”

남매와 똑같은 은발을 정갈히 올려 묶은 여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원래도 몸이 안 좋아 요양 중이라 들었으니 그렇겠지.

그녀가 슬픔 어린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부인.”

“그래,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반갑다.”

백작부인이 내게 백합 한 송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파스피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 주렴.”

백작의 가슴팍에는 이미 세 송이의 백합이 올라가 있었다.

나는 순순히 허리를 수그리면서도 궁금해졌다.

내가 이 위에 꽃을 올려도 될까.

빈말로도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최저의 인간이었지만, 나 때문에 말려들어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음…….

장례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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