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나는 그녀의 턱을 붙들고 꾹 눌러 입을 벌리게 했다.
드러난 입천장에서 희미하게 똬리 튼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뭐욱, 윽!”
성력으로 그 기운을 살살 긁어내자, 검은 마나가 질색하며 뛰쳐나왔다.
큐딜의 입천장에서 중지만 한 크기의 열쇠가 끌려 나왔다.
자못 기괴한 광경이다.
피를 보진 않았지만, 시각적으로 불쾌하고 손이 찝찝했다.
“침 묻은 건 아니겠지.”
나는 보라색 열쇠를 찜찜하게 바라보다가, 큐딜의 셔츠 자락을 찢어서 손을 박박 닦았다.
이쯤 되면 진짜로 손수건을 들고 다녀야겠는데.
“헉, 허억! 아 씨, 헉, 들켰네.”
“더럽게 이걸 왜 입 안에 숨겨 놨어?”
“흐으, 그거야, 흐, 피부에 심어 놓으면 금방 들키니까…….”
그럴 거면 나불거리지나 말든가.
쉴 새 없이 입천장을 노출시켜 놓고. 어이가 없다.
큐딜은 거의 바닥에 엎어질 기세로 고개를 수그리고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두 눈의 실핏줄이 터져서 흰자위가 붉어진 게 꼭 귀신 같은 몰골이다.
큐딜이 히죽 웃었다.
“근데 신관님, 이걸 다 어떻게 알았어? 전하께서 말해 주셨나?”
“아니. 내 신의 제단에 예언서가 진상됐는데 그걸 읽고 알았어.”
“뭐, 그렇겠지. 뱀을 잡으려고 전하께서 신전을 끌어들인 거. 요즘 반항기시니까.”
“안 들을 거면 왜 물어봐?”
애당초 안 믿을 줄 알고 한 소리지만.
“전하가 뭐라고 꼬셨어?”
“허?”
“성력 밀도를 보니까 가치관은 선한 사람인데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전하의 개가 됐나 궁금해서.”
온갖 잡소리가 안 먹히니 이제는 이간질로 방향을 선회했나 보다.
“악마 숭배 집단을 처리해야 한다? 모리온을 없애야 세계가 평화로워진다? 인류를 위한 거다?”
“네가 알아서─.”
“신관님 속은 거야.”
큐딜이 뱀처럼 속살거렸다.
“전하의 행적을 봐. 진짜 정의를 위하는 사람이면 왜 대원로 밑에서 납작 엎드려 꼬리만 흔들었겠어.”
“…….”
“지금도 봐. 일은 다 신관님한테 떠넘기고 혼자 빠져 있잖아. 이게 무슨 뜻 같아?”
“하고 싶은 말만 해.”
“전하를 믿지 마. 그 사람의 목적은 그런 평화로운 게 아니야.”
“그럼 뭔데.”
“글쎄, 아마도 모리온?”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뭐든지 가능해지는 힘이야. 삼키면 신이 된다니까? 아니, 악마라고 해야지. 그게 안 탐나겠어? 신관님은 그 힘을 탈취하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그게 다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전하가 무슨 생각이신지 알아봐 줄 수도 있고, 뭣하면 벗어나게 도와줄 수도 있어. 지금 눈감아 주기만─.”
“유언은 그게 전부냐고 묻는 거야.”
아무렴, 내가 남들보다 사회 경험이 적다고 해도 원로의 말에 귀 기울일 만큼 순진하진 않다.
그리고 이 여자보다는 내가 크루엘로를 잘 알 거라 믿고 있었다.
큐딜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더니 그녀의 입매가 비죽 뒤틀렸다.
“아, 이래서 신관이란 것들은 말을 해 줘도 모른다니까. 멍청하고 눈치도 없어.”
큐딜의 맹렬한 비난에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꼬마야. 아까 말 안 했는데 내 특기 하나 더 있어. 자질구레하고 섬세한 마법을 잘하거든.”
“…….”
“이를테면, 마도구를 잠깐 망가뜨려 놓을 수도 있고.”
그 순간, 마차가 흔들렸다.
멈췄던 말이 다시금 마차를 절벽으로 밀어내는 충격이었다.
큐딜이 깔깔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관절을 뒤틀어 사슬 사이로 손을 꺼내서는, 내 팔을 우악스레 움켜쥐고서.
“내가 등신도 아니고 마도구를 내버려 뒀겠냐? 재밌을 것 같아서 어울려 줬더니 시간만 낭비했네.”
“뭐. 같이 죽자고? 이제 목숨이 안 아까워?”
“실패해도 죽는 마당에 개뿔. 그리고 말이야, 어차피 죽어도 상관없거든.”
내가 뿌리치고 도망가기라도 할까 싶은지 큐딜의 두 팔은 거의 나를 끌어안듯 옭아맸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말들은 끊임없이 마차를 밀어냈다.
그리고 기어이는 마차가 기울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날 되살려 주실 테니까!”
눈을 번뜩이며 큐딜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마차가 허공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아하하하! 하하, 하…… 하?”
추락하지 않는다.
큐딜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야! 마차가 어떻게……? 신성 주문에 비행은 없을 텐데?”
“쉽게 고장 나지 않는 마도구가 함께 왔거든요.”
마부석이 뜯겨 나간 자리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타이밍이라면 당연하게도.
“크루엘로…….”
큐딜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녀는, 크루엘로의 손짓 한 번에 마차 벽면에 눌어붙었다.
맛없는 팬케이크 같네.
그가 다시 자유로워진 나를 향해 다가왔다.
“다 놀았어요, 달링? 제때 온 것 같아 기쁘네요.”
제때?
지금 제때라 했어?
“한참 늦었는데요. 그쪽을 기다린다고 재미도 없는 음모론을 몇 분이나 들었는지 알아요?”
“그래도 식장은 제대로 보고 와야죠. 그러다 그쪽에서 일이 터지면 닭 쫓는 개 꼴이 될 텐데.”
“아, 그쪽에 10원로가 가 있긴 할걸요? 아까 통신구로 대화하던데.”
“괜찮아요, 그 정도는. 예식 중에 암살을 저지를 머저리는 아니고 만약에 저질러도 뭐, 재밌는 공연이 벌어질 뿐이잖아요?”
예비 신부가 지푸라기 인형이 되는 게 재밌냐?
……재밌긴 하겠지만.
크루엘로가 손을 까딱 움직이자, 벽면에 달라붙었던 큐딜이 마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더미 시간 얼마나 남았어요?”
“10.”
“10분?”
“9, 8…….”
이놈이 이런 때에 장난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돌아봤더니 크루엘로가 소리 내어 웃었다.
“6분 정도 남았을걸요. 마법이 풀린 더미가 지푸라기로 돌아갈 때까지.”
“……혹시 그 꼴이 보고 싶어서 느긋하게 온 거예요?”
“그럴 리가. 알았어요, 빨리 할게요.”
크루엘로가 가볍게 웃으며 손짓했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마나가 꿈틀거리는 큐딜을 둥글게 감쌌다.
동시에 그녀의 외관이 변하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칼이 길어지고 금빛으로 물들었다.
골격이 변하고 이목구비도 달라졌다.
그리하여 완성된 건 시오라 보네티…… 와 꽤 닮은 얼굴이었다.
“쿨럭!”
잠깐 기절했던 큐딜이 의식을 되찾았다.
제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금발을 보고, 그녀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허! 나를 시오라 보네티로 위장해 죽이려고?”
목소리는 그대로라 엄청 위화감 드네.
“정확히는 미끼로 변장시켜서 죽이려고.”
큐딜이 속아서 가짜 시오라 보네티를 죽였다고 꾸며 낼 생각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나 싶겠지만, 큐딜이 시체로 발견되는 것과 그대로 실종되는 건 꽤 다르다.
뭐, 일에 또 실패한 큐딜이 도망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고?
약간의 시간 벌이밖에 안 되겠지만, 그 약간이 중요한 거다.
“잡일 담당이랬지? 이쪽도 부탁해.”
“바보 같은 소리, 죽고 나서 안 풀리는 변신 마법이 어디 있어? 바람만 세게 맞아도 풀리는데.”
“그래서 내가 있는 거지.”
아까와는 반대로, 내가 큐딜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당연하다.
바깥의 신성 주문엔 이 비슷한 것도 없을 테니까.
고대 신의 신도에게는 고유 주문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수확제에서 썼던 역행도 그랬고.
“위대하고 지혜로운 페불라시여, 그대의 종이 감히 바랍니다.”
“페…… 불라?”
지금 쓸 주문도 그렇고.
“불행히 굳어진 진실을 뒤틀어 주소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소서.”
영혼에 잠들어 있던 성력이 엉성한 길을 뚫으며 흘러넘친다.
저번보다는 약했지만, 내일의 나는 건강하지 못하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고유 주문은 그렇다니까, 원래 몸이 그리워.
“타고난 육체에 고여 있는 가엾은 영혼에게 한 번의 선택을 허락하소서.”
“커어억!”
내게서 흘러나온 성력이 큐딜의 몸을 고르게 감쌌다.
그녀에게 잠들어 있던 검은 마나는 힘도 쓰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력은 그녀의 몸에 덧그려진 환상을 따라 큐딜의 육체를 재구성했다.
아예 다른 얼굴로.
변신 마법이 풀리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외관으로.
“단 하나의 신도가 바라나이다.”
─페불라 신학 9주문. 수정modification.
원래는 불치병이나 선천적인 장애를 다룰 때 쓰는 주문이며, 지금은 선량한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주문은 막힘없이 흘러나와 큐딜의 외모를 바꾸어 놓았다.
내 뜻이 선하지 않더라도, 원로회의 사냥을 포함해 이 모든 일을 내게 지시한 것이 페불라였으니까.
검은 마나가 사라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큐딜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지.
그 몸에서 나는 결박의 사슬을 거두어들였다.
“다 됐나요?”
크루엘로의 물음에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크루엘로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우리는 부유 마법으로 마차를 빠져나왔다.
허공에 떠 있던 마차에서 그가 마법을 거두었다.
마차가 추락한다.
처음에는 느리게, 다음은 빠르게, 이내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그맣게 마차가 박살 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죽었네, 사람이.
기분이 이상했다.
“이러다 약혼식이 끝나 버리겠어요.”
아차차, 쓸데없는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지.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가요.”
크루엘로는 묘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게이트를 열었다.
***
“그리하여 이 인연이 무사히 이어질 수 있도록…….”
게이트와 연결된 곳은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예배당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건물의 지붕이었다.
감각을 열어 놓은 탓에, 의식을 주관하는 지루한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우리는 조심조심 지붕에서 내려와 창문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화 마법을 걸어 두긴 했지만, 마나에 민감한 사람한텐 들킬 수 있으니까.
“오, 저게 더미예요?”
골든스토브 백작의 앞에 두 남녀가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시오라 보네티와 누가 봐도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저게 실은 지푸라기란 말이지?
신기하긴 한데 어떻게 바꿔치기를 한담.
“얼마나 남았어요?”
“50초요.”
“아하, 이제 49초네요!”
“이젠 45초?”
“그러면 우리…… 포기할까요?”
“달링이 원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