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건 게이트 반지를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모리온을 찾을 방법 말이에요.”
나를 온갖 따끈한 것으로 둘러싸고 크루엘로는 말했다.
“약혼 후에 바로 공작성에 가시게요?”
“성으로 가도 못 찾아요. 열쇠 마법으로 숨겨져 있어서.”
“그게 뭔데요.”
“다섯 명이 열쇠를 나눠 가지는 은폐 마법이에요. 열쇠가 다 모여야만 특정 공간으로 가는 문이 열리죠.”
그 말은 즉, 모리온을 찾으려면 다섯 명의 원로에게서 열쇠를 빼앗아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성직자가 필요해요. 흑마법이라 쉽게 감지할 수 없거든요.”
“열쇠를 가진 원로를 사냥하라……. 그러면 약혼식을 언급하신 것도 그것 때문이겠네요.”
원로회는 나를 금방이라도 갈아치우길 바라고 크루엘로의 비극에는 무대가 필요하다.
약혼식 당일이 얼마나 그럴싸한 기일이겠는가.
앞선 상대들에게 닥친 불행을 생각하면, 나를 죽이려들 건 분명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
“그런 일엔 보통 하수인을 쓰지 않나요?”
“좀 복잡한데요. 한 번 실패하면, 그걸 만회할 때까지 원로에게 계속 임무가 생겨요. 두 번 실패하면 다음 일은 꼭 최종 책임자가 직접 나서더라고.”
“세 번은 자존심이 상하시나?”
“세 번 실패하면 모가지라서.”
오! 아, 잠깐만.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펴서 세 보았다.
내 입적을 축하하는 파티, 수확제, 그리고 신관에서의 일까지.
세 번인데?
“아.”
입적 파티를 망치려던 건 줄리안이니 원로는 아니지, 참.
“더군다나 목줄을 매어 놓은 개가 점점 엇나가고 있으니까요.”
그게 제 이야기였음에도 크루엘로는 눈을 휘어 웃었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날 감당하려면 원로쯤은 와 줘야죠.”
“열쇠가 없는 원로면…….”
“흑마법도 익히지 않았을 테니 일에 끼워 주지도 않을 거예요. 그건 걱정 말아요.”
“좋아요, 그러면 약혼식이 개판이 될 건 각오하고 있을 거예요.”
“음. 약혼식은 흠 없이 완벽해야죠. 어차피 그쪽에서도 조용히 빼돌려 처리하려고 할 테지만.”
“네?”
“꼬투리 잡을 빌미를 주기도 싫고, 내가 아예 돌아선 인상을 주는 것도 별로고, 달링의 성력을 들키는 것도 내키지 않고.”
“욕심이 과한데요? 무슨 재주로 그걸 다 숨기시려고.”
“약혼식 대리를 세우면 간단해지죠.”
크루엘로는 손가락 두 개를 펴고는 장난치듯 앞뒤로 흔들었다.
“더미를 만들 거예요.”
결론만 말하자면 그것도 마법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주인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인형.
그걸 만들기 위해 나는 머리칼과 피 몇 방울을 빼앗겼다.
그 재료 때문에 저주 인형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실은 지금도.
아무튼 사용 기한이 몹시 짧다고 해서 약혼식이 끝나기 전엔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식 중에 갑자기 사람이 지푸라기로 변하면 볼만할 테니까.
그렇게 크루엘로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오늘이 되었다.
나는 큐딜의 당황한 낯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저 얼굴 보려고 애 좀 썼지.
[함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
통신구 너머의 아레스가 큐딜에게 재차 물어 왔지만, 그녀는 다 듣지도 않고 연결을 끊어 버렸다.
후우, 큐딜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이번엔 양손을 들어 올렸다.
9원로가 기세 좋게 소리쳤다.
“좋아, 원하는 게 뭐야?”
“원로회 얘기부터 다 털어 볼래?”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내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리 말해 두는데 거짓말하면 재미없을 거야.”
***
“함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레스의 말은 다 전해지지도 못했다.
수정구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연결이 끊겼다는 뜻이다.
으득, 사내는 턱 근육이 불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일방적인 행패에 머리끝까지 열이 치솟는다.
‘짐작은 간다.’
함정이라는 건 곧 큐딜이 속아 넘어갔다는 말이다.
그러면 약혼식에 있는 시오라 보네티가 진짜겠지.
큐딜은 아마도 얼굴이 비슷한 다른 여자나 더미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워낙에 덜렁거리는 천치니 이상치도 않다.
하지만 그 일을 제가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아레스의 손아귀 힘에 통신구가 산산조각 났다.
그는 고민 없이 구슬 조각을 내버렸다.
어차피 더 연락이 올 일도 없을 테니까.
대신 그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큐딜은 실패했으나 아직 기회는 남았고, 약혼식 날을 넘기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일을 미루는 건 아레스의 성미에 맞지 않았으니까.
‘그분께서도 용서치 않으시겠지.’
좋아.
그는 결심을 굳혔다.
식을 마치고 시오라 보네티가 대기실에 들어온 즉시, 그녀의 숨을 앗아 가기로.
암살은 아레스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특기였다.
그 순간, 대기실 가까이 인기척이 느껴져 사내는 흩어지듯 어둠에 숨어들었다.
***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 방면으로 보네티 백작은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제 손에 명을 달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시오라 보네티를 죽이기 위해, 개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정교한 방식을 택했다.
약혼 서약 직후, 남녀는 맹세의 입맞춤을 나누고 축배를 나눠 마신다.
준비된 술은 골든 블레스 31년산이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술에 몇 가지 조건이 더해지면 심장마비를 유발하는 독이 된다.
필요한 건 두 가지.
하나는 동부 지역의 증류주로 백작이 이미 준비해 두었다.
축하주라고 말하며 건네면 시오라는 의심 없이 삼킬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등나무 꽃의 향기였다.
‘식이 끝나면 한 번은 대기실로 돌아올 테니.’
그런 이유로 백작은 식의 막바지에 잠깐 대기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꽃병에 있는 꽃을 죄 빼 버리고 등나무 꽃을 그득히 꽂았다.
이 모습을 들키더라도, 남들에게는 새로 얻은 딸의 약혼을 몸소 축하해 주려 한다고 꾸며대면 그만이다.
이 조합이 독이 된다는 건 보네티 백작도 우연히 알게 됐으니, 아무도 그의 범행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설사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화이트데저트 공작만 아니면 상관없다.
어차피 원로회에서 시오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백작도 익히 알았으니까.
‘좋아, 식만 끝나면 된다.’
백작은 화사하게 피어난 등나무 꽃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스산한 기세가 그의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피네Fine.”
암녹색 올빼미가 우아하게 날개를 펼쳤다.
동시에 숨어 있던 아레스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암살자라고는 믿을 수 없이 당당한 자태였으나, 눈으로 보면서도 백작은 그의 기척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넌 누구냐.”
“골치 아프게 됐군. 묻는 걸 보면, 눈치채고 온 건 아닌 거 같은데.”
올빼미가 눈을 굴리며 아레스를 경계했다.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검을 빼 들었다.
“네 운 없음을 원망해라.”
아니지, 아레스가 비죽 웃었다.
“생각해 보면, 건방지게 상대를 갈아치우려 한 것도 죄가 되겠군.”
혼담 상대를 미뉴엣 보네티에서 듣도 보도 못한 천출로 바꾼 게 백작이었으니.
“그게 무슨…….”
“좋아, 오늘은 네 딸의 목숨 대신 네 목을 가져가마.”
검날이 움직였다.
***
나는 만신창이가 된 큐딜을 결박 주문으로 꽁꽁 묶었다.
이어진 심문에 그녀는 순순히 응했다.
“네 역할이 뭐야.”
“보통은 상단 운영하면서 신수랑 베아티투도를 밀수입하지. 영지도 감시하고 동물로 이거저거 주워듣고 윗선에 전달하기도 하고.”
말하자면 잡무 담당?
큐딜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사람 필요하면 다 날 갖다 때우려고 한단 말이야, 짜증 나게.”
“마지막 기회라서 그런 게 아니고?”
“아, 알았어. 그것까지 안단 말이지, 젠장! 그래서 말인데 자기변호 하나 해도 될까, 신관님?”
“말해 봐.”
“나 죽여 봐야 아무 의미 없어. 소모품이거든.”
“불쌍한 척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
“아, 마지막 기회란 거 안다며! 원로 목숨이란 게 파리 목숨이야. 대원로, 2원로 빼면 거의 10년을 못 넘기고 목이 떨어지거든.”
밑에서 치고 올라올까 봐 되게 견제한다니까, 그 늙은이들.
큐딜이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그런 자리에 왜 올라갔는데?”
“그야 떨어지는 것도 많으니까! 신관님은 모르겠지만, 교단에서 양지로 나오려고 또 경쟁이 엄청……. 아, 교단 모르시나?”
“알아. 검은 뱀 교단. 원로회의 전신. 악마를 숭배하는 네크로맨서 단체.”
“안다니 하는 말이지만 경쟁이 굉장히 치열해. 너무 잘난 놈들은 뻗대다가 잘려 나가서 나 정도가 쓰고 버리기 딱이거든!”
“그렇구나. 네가 그렇게 중요도가 떨어져서 네 몸에 열쇠가 있구나.”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큐딜의 얼굴이 굳었다.
그 반응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큐딜이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진짜로 열쇠가 있다.
나는 다정히 웃으며 손짓했다.
“아악!”
큐딜의 몸을 감싼 사슬이 뱀처럼 그녀의 몸을 조여들었다.
“거짓말하면 재미없을 거랬지.”
어디서 개수작이람.
“우윽, 아니, 거짓말은 안! 열쇠 마법도 알 줄은. 놀랍다, 콜록.”
“거짓말이 아니라고?”
“그거, 윽, 역오망성을 응용한 주문이라, 우윽. 열쇠도 다섯 개 있어야 해. 숫자 채우기용!”
오, 명목상이란 건가?
그럴싸한 말에 나는 다시 손짓했다.
사슬이 조금 느슨해지고 큐딜이 혀를 빼물었다.
“후, 그러니까 잡무 담당한테 심어 놓은 거지. 내가 당하면 금방 티가 나니까.”
“그럼 열쇠가 누구한테 있는지나 말해 봐.”
“나한테는 말 안 해 주지, 소모품이라니까?”
지금 허접하게 잡혀 있는 꼴을 봐!
큐딜이 당당히 말했다.
짜증 나는데 그럴싸해서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추측이라도 하는 성의를 보여.”
“대원로, 2원로, 나, 10원로? 마지막 하나는 모르겠더라, 궁금한데 알려 줄래?”
에휴, 됐다.
어차피 이 여자한테서 얻으려고 한 건 하나뿐이니.
“아무튼 열쇠가 필요하다는 거지? 내 열쇠 줄까? 근데 지금은 없어. 내가 나만의 은신처에…….”
큐딜이 지껄이는 말은 더 듣지도 않았다.
어차피 헛소리일 게 분명했으니까.
대신 그녀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생각만큼 쉽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기야 그랬으면 바깥 신관들에게 쫓겨 다녔겠지.
열쇠야, 어디 있니.
“하루, 아니 이틀만 주면 가져올……”
“아.”
답은 큐딜이 고개를 쳐들 때 튀어나왔다.